#52. 서바이벌(2)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너튜브에서 흘러나오는 군가 메들리는 오늘 결전의 각오를 다질 전장의 노래다.
나는 장롱 구석에 있던 개구리 군복과 전투화를 꺼냈다.
역시 A급이다.
십오 년이 지났는데도 전투복의 칼 같은 주름과 전투화의 광택은 빛바래지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지금 당장 자대로 복귀해도 될 만큼 상태가 좋다.
그래. 내가 이걸 만드는 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정도 각은 살아 있어야지!
군복은 다리미가 부서져라 눌러대고 군화에 불광을 잘 내는 사람을 찾아 다른 부대까지 찾아갔었다.
그러나 전역하고 버스에 오르자마자 이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창문에 비치는 갓 전역한 내 모습은 군인 아저씨 그 자체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시 군복을 꺼내보니 감회가 새로운 건 어쩔 수 없다. 군복을 입을 유일한 기회였던 예비군은 진작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왜 늦은 아침에 군복과 전투화를 꺼내놓고 있냐고 묻는다면 이 역시 사연이 있었다.
오늘은 약속대로 학교에서 서바이벌을 하는 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폐교가 어떤 상태인지는 먼발치에서 외관만 보더라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창문이 깨지고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건물에서 뒹굴고 뛰어다녀야 하는데 어설픈 옷을 입었다가는 넝마가 될 게 뻔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옷을 사는 데 취미가 없었다.
한 벌 한 벌이 소중하고 용도에 맞게 분배되어 있는 옷들 속에 버려도 되는 작업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 서바이벌을 한다고 진짜 군복을 입고 왔냐는 놀림을 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장롱에서 희생시킬 옷을 나열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녀석이다. 이 군복도 나름 현역 시절에 아껴 입던 녀석이라 아까운 마음이 아주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형! 우리 왔··· 푸하핫!”
예상대로 철진이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뒤에서 상진이와 지환이도 알 듯 말 듯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야, 옷 버릴까 봐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희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내 나이에 현역 시절 군복 입을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잡아봐야 1% 미만이다. 이건 자랑스러운 거야!”
그렇다. 예비군 2년 차만 되더라도 상의 단추가 잠기지 않고 바지는 벨트로 겨우 흘러내리지 않게 묶어만 두는 아저씨가 절반이 넘는다. 4년 차가 되면 대부분 예비군 훈련에서 군복을 마치 옷가게 아저씨처럼 어깨에 제멋대로 걸치고 살이 쪄서 입지 못한다고 버티기 일쑤였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처럼 깔끔하게 현역 시절 체형을 유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건 그렇고, 준비 다 됐으면 이제 가자.”
여기 더 있어봤자 놀림만 당할 것 같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
“키 가져왔어.”
“그냥 뛰어넘으면 되는데 무슨 키야.”
“민호 형 군복 입었는데 그렇게 담 뛰어넘다가 탈영병으로 오해하면 어떡해.”
“하!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도 복장은 제대로구먼, 뭐.”
전에 한 번 고무줄 총으로 연습게임을 해봤던 터라 모두 두꺼운 바지와 겉옷을 입고 왔다.
상진이가 가져온 키로 녹슨 자물쇠를 풀고 힘껏 밀었다.
그르르르륵.
마지막으로 열린 적이 언제였는지 모를 학교의 정문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땐 정문은 24시간 1년 내내 열려 있었으니까.
주말이고 저녁이고 학교 운동장과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간만이네.”
“참, 형, 이 학교 다녔다고 했지?”
“어. 그땐 학생이 스무 명도 안 됐어.”
“진짜 작은 학교네요.”
“그땐 여기만큼 큰 곳도 없었어.”
운동장만 하다는 말이 있다.
몇 발짝 걸으면 금방 가로지르는 이 좁은 운동장이 그 시절 나와 친구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크고 넓은 공간이었다.
축구며 농구며 땀을 뻘뻘 흘리도록 뛰어다녔던 운동장의 흙바닥은 아무도 다니질 않아 잡풀이 무성하게 자랐고 여기저기 빗물이 흘러간 줄기가 선명했다.
지금은 그때의 추억이 선뜻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낡고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기에 마냥 추억에 젖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우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마침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규칙은 어떻게 할 거야?”
“2:2. 상진이랑 내가 가위바위보, 너희 둘이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팀 진 팀으로 하자. 그리고 머리 맞으면 한 방, 몸은 두 방, 팔다리는 세 방. 어때?”
여기서부터는 신뢰의 영역이다.
총싸움은 감정싸움으로 곧잘 번지기 일쑤였다. 맞았다 주장하는 쪽과 맞지 않았다 주장하는 쪽이 나뉘긴 쉬우나 증명하긴 어려웠으니까.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총을 쏘아대며 난전을 펼치면 그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주먹다짐으로 가기도 했는데, 야생의 시대라 그런지 주먹다짐의 승자로 판결이 진행되는 이른바 중세 명예 결투나 다를 바 없는 야만적인 방식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가만 보면 추억 보정 때문에 그리운 시절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많이 했었네.
여하튼 지금 우리 인원은 겨우 4명이다. 누가 잘못 볼 리도 없고 맞았다 안 맞았다 서로 거짓말을 할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그럼 각자 건물 끝과 끝에서 움직이자. 시작은 5분 뒤에. 지는 쪽이 오늘 저녁 돼지국밥 사는 걸로.”
나는 지환이와 한편이 되었다.
덩치가 큰 철진이보다야 총알 맞을 면적이 훨씬 좁으니 일단 조건만 따지자면 조금 유리했다.
“따로 작전이 있스므니까?”
“일단 우리는 건물 외곽으로 돌자. 교실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쟤들보다 훨씬 빨리 발견할 거야. 어차피 창문이 다 깨져서 쏘면 안까지 들어갈걸?”
은엄폐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반대로 몰래 접근만 가능하다면 창문 밖에서 기습이 가능했다.
국민학교의 낮은 창문들은 성인이 엎드려 다니기에 너무나 불편하다.
거기다 덩치가 있는 철진이라면 어떻게든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 세운 작전이었다.
“자, 우리도 슬슬 가자.”
약속한 5분의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우선 건물 밖에 있는 식수대 뒤에 몸을 숨겼다. 이제 건물의 외벽에 달라붙으면 주위에 숨을 공간이 없어 정말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벽 타고 가다가 두 발 쏘고 못 맞추면 바로 도망가는 거야. 알겠지?”
나는 지환이에게 다시 한번 작전을 상기시켰다.
기습이 실패하면 결국 난전이 된다.
만약 성질 급한 철진이 기세 좋게 돌진이라도 한다면 우리는 숨을 공간이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선 기습으로 포인트를 따내고 전력 질주를 해서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첫 목표로 정한 것이다.
삐걱삐걱.
그렇게 교실을 세 개째 지나는 순간, 누군가 오래된 나무복도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쉿.”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멈추고 조용히 하라 신호를 줬다.
발소리는 선명하게 들렸으나 문제는 그 울림이 너무 커서 어느 방향에서 소리가 나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담벼락에 붙어 스마트폰에 카메라를 켜고 살며시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낡은 교실이 비쳤다.
분명 인기척이 들렸는데 교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두리번거렸을까? 다음 위치로 이동하려는 찰나 카메라에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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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폰?
맙소사! 서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폰을 들고 있었나?
너무 당황하면 잠시 사고가 멈추게 된다. 온몸이 굳고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멍하니 바라보는 게 전부인 찰나.
나와 철진은 그렇게 차에 뛰어든 고라니처럼 서로의 모습이 비치는 폰 화면을 보며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젠장! 쏴!”
딱딱.
두 사람 중 다행히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나였다.
조준할 새도 없이 흘려 쏘듯 총을 갈긴 우리는 그대로 현관으로 내달렸다.
“헉헉. 맞췄어?”
“철진 상의 손에 맞췄스므니다!”
“그럼 일단 우리가 유리하네.”
비비탄 총의 유효 사거리는 대략 20m.
그 이상의 거리를 맞추려면 가늠자를 보는 게 아니라 하늘 위로 높이 들어 마치 곡사포처럼 쏴야 했다.
어릴 때는 총 내부에 금이 갈 정도로 무식한 개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다. 그 때문에 제법 먼 거리도 저격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엄연한 불법. 순정 그대로 쏘려니 지근거리의 난전이 될 가능성이 컸다.
곡사로 쏴야 한다면 권총의 가늠자를 보는 것보다 내가 훨씬 유리하다. 하늘로 조금만 올리면 총열에 목표가 가리는 권총보다야 펌프 액션으로 쏘는 레밍턴이 오히려 적을 조준하기 쉬웠으니까.
운 없이 눈먼 총알을 머리에 맞고 한 방에 죽는 것만 조심한다면 손쉬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잠시 숨을 고른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복도를 지나며 교실과 화장실, 그리고 계단까지 상대방이 있을 법한 곳에 총을 겨누며 이동하는데 상상 이상의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져봤자 고작 돼지국밥을 사는 어린아이 장난감으로 하는 내기.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총을 들지 않았다.
패배는 멈출 줄 모르는 긴 티배깅을 불러온다. 이번 전투에서 지는 순간 최소 일주일 정도는 상대 팀의 거들먹거림을 들어야 한다. 특히 철진이와 지환이의 놀림은 옆에서 지켜보는 나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상대방을 긁어댔다. 하물며 그 당사자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앞에 없스므니다.”
“이 층으로 갔나 보네.”
적들은 추격 대신 도주를 택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철진이가 먼저 맞았다 보니 심리적으로 위축된 듯 보였다.
“두 번째 작전으로 들어가자.”
“두 번째 작전도 있스므니까?”
“모험이긴 한데 먹히면 꽤 타격이 클 거야.”
* * *
“헉헉. 젠장! 그냥 나가서 쏠걸!”
2층 한 교실에 숨은 세 사람은 숨을 헐떡이며 밖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눈앞에 민호의 총구가 닿을 듯 가까웠던 철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리 비비탄 총이라지만 눈앞에서 맞으면 얼마나 따끔할지 몰랐다. 게다가 민호의 총은 자신들의 총보다 훨씬 컸기에 그 크기에서 오는 공포감도 상당했다.
“생각도 못 했어. 밖으로 돌아나올 줄이야. 팔에 맞았지?”
“어. 난 이제 팔다리는 두 방 남았어. 깜짝 놀랐네, 진짜. 네가 카메라로 보라고 안 그랬으면 그대로 머리 맞았을 거야.”
허를 찔린 기습이었으나 다행히 철진이 팔에 맞은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여간 민호 형 진짜 기발하다니깐. 그래도 이젠 어쩔 수 없을 거야. 지금부터는 서로 누가 더 잘 맞추느냐 싸움이니까.”
“그럼 우리는 셋이니까 화력으로 우리가 훨씬 유리하지.”
“그래도 확실히 해야 해. 형, 우리 여기서 버티자.”
캠핑.
한 장소에 오래 머물고 지나가는 적들을 노리는 서바이벌 용어를 지칭했다.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게임 자체가 루즈해질 염려가 있어서 비매너로 통했지만 불리한 팀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 용인되는 전략이었다.
물론 그런 서바이벌 지식을 알 리가 없는 세 명은 그저 기습을 당해 놀란 마음에 본능적으로 캠핑을 시작했기에 결코 유리하다고 볼 순 없었다.
오히려 2층이라 앞뒤 문이 막히면 꼼짝 못 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공격을 받은 공포는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