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4화 (54/151)

#54. 서바이벌(4)

세진이의 죽음은 어른들 사이에서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수술하러 미국에 갔다는 말로 얼버무렸고 실제로 세진이네 가족들은 그렇게 이사를 떠났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어른들의 표정과 가라앉은 마을의 분위기로 이미 세진이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행여나 정말 세진이가 미국에 치료를 받으러 떠났다고 믿는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선의의 거짓말을 지켜줘야 했으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세진이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랫마을과 총싸움을 할 때 본부를 지키는 아이는 없었다. 그건 원래 세진이의 역할이었다. 문방구에 아이들이 북적거려도 가장 앉기 편한 평상의 가장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술래잡기나 숨바꼭질도 늘 세진이가 앉을 수 있는 자리 근처에서 하는 게 원칙이었다.

세진이는 이제 마을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세진이를 추모한 것이다.

“이야아아아!”

먹먹한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갑자기 이 층으로 괴성을 지르며 세 녀석이 달려왔다.

“민호 형!”

“뭐야? 왜 돌아왔어?”

“형이 귀신한테 잡혀갔을까 봐!”

“야, 뭘 가져오려면 좀 제대로 가져오지 이게 다 뭐냐?”

세 명의 손에는 나무젓가락 두 개를 고무줄로 묶은 십자가, 맛소금에 해장용으로 사놨던 팥죽까지 들려 있다.

“팥죽에 맛소금 치고 젓가락으로 먹으면 딱이겠네. 얌마! 너희들, 어르신들이 복지관 다닌다고 하시는 거 다 꿰뚫어 보신 거야!”

“형네 집에 있는 게 다 이런 건데 어떡해, 그럼!”

“일단 빨리 나가야 하므니다! 여긴 위험하므니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한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녀석들을 진정시켰다.

영혼이나 귀신 따위는 믿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름에 하는 납량특집 티비 프로도 유치하게 보였다.

우리 네 명이 귀신에 홀린 듯 다섯 명이라 착각한 것도 나름의 과학적 근거를 찾자면 폐교라는 장소와 서바이벌을 하며 긴장한 탓인지도 몰랐다.

이 낡은 총도 우연히 내가 주운 것이다. 그리 여기면 된다. 그편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쓸데없는 걱정을 더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세진이와 같이 총싸움을 했다.

그것도 꽤 즐겁게 말이다.

“옛날에 우리 마을에 몸이 좀 안 좋은 애가 있었어.”

나는 문방구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한 녀석들을 앉혀놓고 오래된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자(死者)의 이야기를 굳이 남에게 꺼내는 것은 실례다. 사자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그러나 나와 세진이가 남이 아니듯 이 녀석들과 세진이도 더 이상 남이 아니다.

이 좁은 시골 마을은 반나절만 같이 놀아도 친구가 되니까.

녀석들이 세진이를 그저 무서운 귀신이나 아니면 헛것을 봤다 여기는 게 싫었다. 나는 그렇게 세진이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갔다.

어린 나이에 몸은 아팠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건강했던 그 아이의 이야기를.

“흐어어엉!”

“뭐, 뭐야? 왜 울어, 갑자기?”

짤막한 이야기가 끝나자 감정에 북받친 철진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두 녀석도 눈가가 촉촉했다.

“가까이 있으면 향이라도 피워주러 갈까? 아직 이른 저녁이니까.”

한바탕 울음까지 터트린 마당에 향을 피워 넋을 기리지 말란 법이 없었다.

원래는 혼자 가려고 했으나

우리는 향과 이런저런 물건들을 챙겨 이장님 댁으로 향했다.

“이장님.”

“이? 호야가 웬일로 이 시간에 여길 다 온 겨?”

“여쭈어볼 게 있어서요. 혹시 세진이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이장님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한 아이는 마을을 사랑하는 이장님에게도 여전히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으리라.

딸칵. 치익.

“후우.”

이장님은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나지막이 내뱉으셨다.

“가가 무덤이 없어.”

“네?”

“무덤 맹글어 놓고 어매가 허구헌 날 찾아와서 울어싸니 가족들이 상의해서 그냥 뺏가루를 저 산에 뿌리는 걸로 했제. 그 어린것이 무덤도 올케 없으니, 쯧…….”

애물단지라는 말이 있다.

자식이 죽으면 관을 마련할 수 없던 부모들이 단지에 넣어 무덤을 만든 것에서 나온 말이다. 버릴 수도 없고 평생 떠안을 수도 없는 애물단지.

오죽했으면 자식의 무덤을 제 손으로 없앴을까 싶었다. 우리는 친구를 잃었으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경에 감히 비견되진 못했다.

“근디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겨?”

“무덤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볼까 해서요. 어릴 적 친구니까요.”

“이이. 호야도 가랑 비슷한 나이였제. 한참 애릴 때인디 그때 동무도 챙기고 참 잘 큰 겨. 정 뭣하믄 저짝 언덕에 가서 술이라도 뿌리면 되야. 원래 저짝 언덕 위가 무덤이었으니께.”

“감사합니다.”

이장님이 손짓으로 알려주신 곳은 의외로 걸어 올라가기에 시간이 조금 걸리는 거리였다.

“여긴가 본데?”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언덕이다. 너무 깊은 산중이면 아이가 지루해할까 걱정해서였을까? 이곳에 서니 학교와 문방구는 물론, 마을에 보이지 않는 집이 없었다.

“준비한 거 내려놓자.”

돗자리를 깔자 문방구에 팔던 과자들이 가득 펼쳐졌다.

처음엔 마트에서 과일을 조금 사서 올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내 기억 속 세진이는 한창 문방구 과자를 좋아할 나이다. 제사의 원칙을 따지려 드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향을 피우고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주운 오래된 장난감 총을 올려두었다.

“절은 안 해?”

“친구잖아. 그냥 묵례만 하자.”

어쩐지 절을 하면 정말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야 할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떠난 또래 친구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먼저 떠난 아쉬움과 살아생전 더 잘해주지 못했음을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잠시 눈을 감았다.

“형, 총이 없어! 방금 여기 놔뒀는데…….”

“아래로 굴러떨어진 거 아니므니까?”

“아니야. 그럼 뭐 소리라도 났겠지.”

시끌벅적한 분위기라 울적했던 마음도 금세 추슬러졌다.

권총은 세진이가 가져간 모양이다. 나중에 나도 죽게 되면 장난감 몇 개를 같이 태워달라 해야겠다. 세진이와 다른 친구들도 언젠가 그곳에서 만날 테니 말이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세진이를 업고 마을로 돌아왔던 그때의 노을이다.

* * *

“규정을 변경하잔 말인가?”

“이리 갑자기 바꾸면 반발이 클 텐데?”

“탈락자를 늘리는 것도 아니고 반발이랄 게 있겠습니까?”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은 한 장의 사진을 두고 한창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사진에는 마스크를 쓴 젊은 청년이 까맣게 탄 미니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드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한국 대회 결승전 영상과 이 사진이 올라오고 나서부터 지금 다미야 공식 지점마다 물량이 없어서 난리입니다. 뒤늦게 영상이 퍼진 서양권에서도 눈에 띄게 매출이 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 선수가 세계대회에 나온다면 유래를 찾기 힘든 빅 이벤트가 될 겁니다!”

“흐음. 그래도 이건…….”

‘꽉 막힌 늙은이들 같으니! 받아 처먹은 봉급이 아깝구나!’

노인들 속에 홀로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던 타케시는 속으로 걸쭉한 욕을 한 사발 내뱉었다.

그저 운이 좋은 놈들이다.

미니카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이 연타석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 중역의 자리에 우연히 앉아 있었던 것이 유일한 성과였으면서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까지 실무에 관여하려 했다.

타 부서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좀먹어 가는 주제에 마치 엄청난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도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 역겹고 혐오스러웠으나 어찌 되었든 결정권자는 저들이었다.

“노리고 있던 서구권에서도 만약 반응이 온다면 건덤 프라모델 매출이 정체되어 있는 지금, 미니카 차기 애니메이션 제작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타케시의 달콤한 말로 회의실 공기가 바뀌었다.

세계적인 완구 기업으로 일본 내에서도 프라모델 분야 부동의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판다이를 꺾고 투자를 받아 차기 애니메이션까지 노려봄직 하다는 말은 백발이 지긋한 노인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물론 그렇게까지 되진 않겠지만 말이야.’

싸구려 사탕발림이라도 통한다면 기꺼이 꺼내줄 용의가 있었다.

한때 판다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과거의 영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장인 정신만을 고집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등진 대가였다.

신흥기업들이 대중적인 영화 콘텐츠를 발 빠르게 선점하여 수십만 엔이 호가하는 고급 프라모델을 출시할 때도, 판다이가 애니메이션 관련 완구를 독점하다시피 할 때도, 그저 품질이 우선이라는 고리타분한 소리만 해대며 손을 놓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그 자리에서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두고 봐라. 내가 그 자리까지 가면 모조리 쫓아내 주마.’

직무유기.

타케시의 눈에는 저들이 삼백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암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럼 하시모토 부장이 이 건에 책임을 지겠다 그건가?”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세상 다시없을 공손하고 간절한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타케시에게 가장 상석에 앉은 노인이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잘못되면 옷을 벗으라는 뜻이었다.

일이 잘 풀리면 당연히 좋은 일이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이 일을 빌미로 내보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윗선에 찍혀 옷을 벗는다면 먹고살 길이 막막할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건넨 진짜 의도는 훨씬 더 추잡했다.

‘우리가 네 목숨을 쥐고 있으니 이 자리에서 굴욕을 당하고 알아서 기어라.’

고작 이런 일에 평생 다니던 직장을 걸 리가 없으니 한번 꺼낸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며 사죄하고 다시 주워 담는 꼴을 보고 싶던 것이다.

사사건건 불편한 주제를 가져와 경영진을 흔드는 타케시는 그들에게 더 이상 평생 함께할 가족 같은 직원이 아니었다. 손가락에 박힌 보이지 않는 가시처럼 성가신 존재. 어떻게든 찍어눌러 굴욕을 주고 싶은 의도가 담긴 그 음습함에 다른 노인들도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타케시의 입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이! 제가 책임지고 진행하겠습니다!”

“정말인가?”

“만약 실패한다면 제가 옷을 벗겠습니다.”

“흐음.”

고까운 태도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고작 사진과 동영상이 조금 유명해졌기로서니 그 선수 한 명 때문에 갑자기 미니카 대회의 인기가 다시 올라갈 리는 없었다. 타케시의 자리에 앉힐 지인들을 물색하느라 노인들의 머릿속에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럼, 하시모토 부장이 수고해 주게.”

“감사합니다!”

원하는 답을 들은 타케시는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지금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시간이 없다. 우선은 한국이야. 한국으로 가서 그 선수를 만나야 해!’

살아남아 저 늙은 당나귀들의 목을 물어뜯느냐, 아니면 뒷발굽에 차여 죽느냐의 생존을 건 사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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