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5화 (55/151)

#55. 선택의 기로(1)

「지금 다미야 트랙마다 미니카가 가득 차는 이유.jpg

(동영상)

바로, 이 영상 때문임.

다미야 미니카 대회는 매년 연례행사처럼 해왔음.

그런데 솔까 지금 와서 나이 찬 아재들이 미니카가 눈에 들어오겠음?

아니면 젊은 애들이 가지고 놀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냥 소수 마니아만 출전하는 고인물 잔치였음.

올해도 그렇게 진행되나 싶었는데 여기서 뜬금없이 삼정자동차 후원을 받은 팀이 나타났음.

이게 골때리는데, 3명이 한 팀으로 그중에 두 명은 삼정그룹 장남과 차남. ㅋㅋㅋㅋㅋ

상상이 감?

아니, 재벌 2세들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핫핑크 옷을 입고 미니카 대회에 나오냐고. ㅋㅋㅋㅋ

뭐 철저히 계산된 마케팅이다, 후계자 수업이다, 말은 많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님.

이 셋이 내놓은 미니카가 20년도 지난 진짜배기 올드카였다는 거.

(사진)

심지어 셋 다 저 위에 보이는 똥차들로 본선까지 뚫어버리는 기염을 토함.

게다가 수행비서인지 아니면 그냥 직원인지 모르겠는데 팀원 중 나머지 한 명이 결국 결승까지 가버림.

그리고 결승에서 바로 전설의 이 짤방이 나왔음.

(사진)

캬~

이거 완전 청춘 드라마 아니냐?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미니카로 대회에 나와서 불까지 났는데 아슬아슬하게 완주라니.

여기서 아재들이 다 눈이 돌아가서 지금 온라인몰은 부품까지 싹 다 품절이고 주말에 다미야 매장 트랙에 가보면 달리는 미니카가 너무 많아서 무슨 기차놀이가 따로 없음.

└ㅇㅇ: 이거 직관한 애들 레전드였을 듯.

└부치: 마스크만 봐도 미남상이네.

└ㅇㅇ: 지금도 품절이냐?

└니니가: ㅇㅇ 싹 다 품절이고 재입고 예정 박혀 있다.

└두부: ㄹㅇ짤로만 봐도 사나이 가슴을 울린다. 나도 오늘 바로 시작한다!

└56분두통정보: 이 새낀 머리가 좀 나쁜 거 같음. jpg라면서 동영상을 가져왔네.

…….」

“휴.”

이 게시글은 몇 주째 히트 게시판에서 내려오질 않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이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점점 사진이 여기저기 다른 커뮤니티로 퍼지더니 이젠 미니카로 검색해도 내 사진이 가장 많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철진이와 상진이에게 어느 정도 그 관심이 분산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내가 다 타버린 미니카를 드는 사진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만약 저 사진이 찍혔을 때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면 어떤 참사(?)가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너튜버를 할 것도 아니고 얼굴이 팔려 곤욕을 치르고 싶지 않다.

다행히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그냥 평소처럼 생활하고 있지만,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꺼림칙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꺼림칙함은 오늘 전화 한 통으로 더 확실해져 버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다미야 미니4WD부서 하시모토 타케시 부장입니다. 혹시 이번 다미야 미니카 대회 점핑트랙 부문에 출전하신 김민호 선수 휴대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죠?”

(미니카 세계대회 출전 건으로 참가를 요청하고자 전화를 드렸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찾아뵐 수 있을지요?)

갑자기 다미야의 일본 직원이 왜 전화했는지 얼추 짐작이 가는 대화였다. 무턱대고 찾아온다는 게 당혹스러웠지만 일단은 거절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바빠서 참가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자, 잠깐만요!)

전화를 끊으려 하자 반대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한번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주세요. 그 뒤에 결정하셔도 좋습니다!)

내키지 않았다.

성격상 나는 거절을 잘하질 못하는 축에 속했다. 전화통화가 아닌 얼굴을 마주한다면 더욱 그 거절이 힘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너무나 간절하고 다급한 목소리다.

외통수다.

전화부터 이러면 반칙이지…….

“그럼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네. 주소 보내드릴 테니 이쪽으로 7시까지 와주세요. 혹시 너무 멀면 이야기해 주시고요.”

(아닙니다! 시간에 맞춰 가겠습니다!)

나는 회사 근처 카페 주소를 문자로 찍어 전송했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로 전화를 끊은 걸로 보아 아마 나도 7시 전에 카페로 가야 할 듯했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목소리가 정중하고 간절하기까지 했으니 만나서도 거절이 쉽지 않겠지.

사이코패스는 직장생활을 잘해서 다른 평범한 사람들 대비 진급이 빠르고 연봉이 많다는 통계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 세상은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야 이득을 보는 법이다.

나와는 반대다.

매사 적당히, 그리고 두루뭉술하게 살자는 게 인생의 모토이니 말이다.

이왕 엎질러진 물이다.

전화통화로 적당히 거절이 안 된다면 차라리 직접 만나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장문의 문자와 이메일로 몇 번이나 요청이 들어오는 것도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니까.

나는 회사에서 적당히 너튜브를 보다 6시가 조금 넘어서 카페로 향했다.

다들 밥을 먹고 카페에 오긴 아직 이른 시간.

자리는 널찍널찍했다.

(저는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커피 한잔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세요.)

띠링.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내가 문자를 보내는 타이밍에 맞게 알람이 울려 폰을 열었다.

“저, 혹시…….”

“아! 처음 뵙겠습니다! 다미야 미니4WD 부서 부장 하시모토 타케시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민호입니다.”

사석에서 굳이 직책을 밝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주고받을 명함만 한 장 내밀었다.

그렇게 받은 명함에는 일어와 영어가 적혀 있었다. 정말 다미야 본사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이쪽에 앉아도 될까요?”

“네!”

하시모토 타케시 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정말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왔는지 곁에 커다란 케리어가 놓여 있었다. 키는 조금 작았지만, 선한 눈매와 시원한 미소가 인상적인 얼굴이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시네요. 일본분인 줄 모를 뻔했습니다.”

“과찬입니다.”

빈말이 아니다. 당장에 한국 사람인 주제에 특정 조건이 되어야만 유창한 한국말이 발동되는 놈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시죠.”

의미 없이 오가는 빈말이 많아지면 대화가 겉돌기 마련이다. 나는 되도록 빨리 거절하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나와 만나기 위해 숙소도 들르지 않고 먼 길을 달려온 사람이다.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니 역시나 짐작대로 선뜻 거절의 말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원래 미니카 세계대회는 각 나라의 우승자만 참여가 가능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대회에 출전하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실격 사항을 체크할 때 봤던 항목이었다. 사실 이 작은 장난감에 무슨 세계대회까지 있냐며 속으로 조금 우습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번 김민호 선수의 경기 영상과 사진으로 미니카가 다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제가 찍은 사진도 아닌걸요.”

지나치게 깊게 숙여진 고개로 되려 내가 미안해지려 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김민호 선수가 세계대회에 출전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변경했습니다.”

“네? 저는 꼴찌로 도착했는데요?”

“이번 대회부터 국가별로 다섯 선수가 뽑혀 팀 대항전이 됩니다.”

“아!”

이제야 내가 어떻게 세계대회에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렸다. 어찌 되었건 내 미니카는 도착점에 들어왔다. 공식적으로 다시 깨질 일이 없는 최하 기록을 찍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결승은 총 다섯 명이 출전했다.

이미 결승에 올라온 것만으로도 세계대회 출전권을 따낸 것과 다름없게 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 코스 이탈을 했다면 형평성과 공정성 문제가 있겠지만 결승전답게 그런 사고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세계대회에 출전만 해주시길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

분명 다른 선택지도 있을 터였다. 특별히 신경 써서 세계대회에 출전권을 주는 거니 감사하게 받아라, 라는 뉘앙스로 말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그래도 이 큰 기업의 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단번에 한국으로 날아와 공손하게 부탁하는 모양새는 충분히 진정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는 제안일 뿐이다. 심지어 어떤 이득도 내밀 수 없다.

“결국, 제 얼굴을 팔아 대회를 크게 열어보겠다는 의도로 그렇게 하신 것이겠지요. 다른 나라의 선수들과 형평성이 있으니 제가 따로 받을 수 있는 금전적인 혜택도 없을 테고요.”

“…….”

내 말에는 조금 가시가 돋아 있었다.

거절하기 난처한 모습으로 당장에는 이 남자가 고개를 숙이지만 내가 수락한다면 결국 상대방은 원하는 걸 취하고 나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다.

멀리, 그것도 바다를 건너 온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는 건 나로서도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제안이다.

“김민호 선수의 말이 맞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저희는 김민호 선수의 스토리를 이용해 대회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계획에 있습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이번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실은…….”

한참 뜸을 들인 하시모토 부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김민호 선수가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면 저는 직장에서 나와야 합니다. 아, 부담감을 드리려고 꺼낸 말이 아닙니다. 사실 이제 뒤가 없는 나이니까요. 어차피 오래 버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김민호 선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저희 회사는 썩어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권력만 휘두르며 회사를 좀먹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평생을 바쳐 다닌 이 회사를 말이지요. 이번 대회를 성공시켜 그들의 무능함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를 무릅쓰고 이번 일을 벌였습니다. 여러모로 불편한 부탁을 드리게 되어서 죄송했습니다.”

나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다.

나는 딱히 회사에 애정이 없었으나 이 사람의 눈에선 진심으로 자신의 회사를 걱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저 한직으로 떠밀려 갈까 두려워 시키는 일을 묵묵히 했던 나와는 달리 평생을 다닌 직장을 걸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단칼에 거절하고 일어나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으나 막상 수락과 거절을 저울 위에 올려두니 선뜻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오늘 하루만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부담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 때문에 급히 오시느라 식사도 못 하신 듯한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드시겠습니까?”

그래도 나를 보려고 멀리서 온 사람이다. 저녁 식사 정도는 대접하고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밥이라도 사면 나중에 거절하더라도 죄책감이 조금 덜 할 것 같다는 다소 얕은 생각도 포함되었다.

“특별히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실까요?”

“아닙니다. 김민호 선수가 드시고 싶으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족발 괜찮으실까요?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족발 말고 다른 걸 드시죠.”

젠장, 지환이 놈 때문에 무의식중에 족발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족발 괜찮습니다!”

“하하…….”

미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식사는 어색함을 풀어 줄 소주를 불렀고 그렇게 나는 또다시 막다른 절벽 끝에 매달린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

나는 미니카 세계대회에 한국의 다섯 번째 대표선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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