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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6화 (56/151)

#56. 선택의 기로(2)

“으…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침을 맞이했다.

나도 지금껏 회식으로 단련되었다 생각했는데 상대방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적당히 술이 들어가고 난 뒤에는 결국 처음 만난 사람도 친구가 된다. 적당히 이완된 몸과 느슨해진 마음이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서로의 진심을 터놓게 되니까.

그 뒤에 술이 깨고 나면 다시 어색한 사이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그래도 필름이 끊기지 않는 이상은 전보다 훨씬 돈독한 사이가 된다. 그렇게 한번 두번 술먹는 횟수가 늘어나면 이내 편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른바 어른들의 방식이다. 싫어도 좋아도 해야 하는 어른들의 친분은 그렇게 술의 힘을 빌리게 된다.

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술자리였다.

하시모토 부장은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았으나 매사에 열정적이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말로 나에게 과한 부담을 주긴 했지만, 영업직군이라면 으레 알면서도 당해주는 그런 얕은수를 쓰는 게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친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선심을 쓰듯 제안을 수락한 모양새로 빚을 안겼다.

분명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으나 고민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철진이와 상진이 때문이었다. 막상 단칼에 거절하려는 마음이 고민해 보겠다는 방향으로 바뀌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 떠오른 얼굴들이다.

결승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렇게 뛸 듯이 기뻐했는데, 세계대회에 나간다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났다.

얼굴이 팔리는 일이야 어차피 마스크도 쓸 테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일들로 묻힐 터. 준비 기간은 조금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결국 대회는 당일 하루에 모두 치러진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깨를 짓눌렀던 부담도 조금 가벼워진다.

이젠 내가 바빠질 차례다.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줬으니 그에 합당한 비용을 청구할 차례다. 호구처럼 사람 좋은 일만 하는 건 사양이다.

나는 폰을 열고 하시모토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미야 4WD 마시모토 부장입니다.)

전화기 너머 갈라지는 목소리의 일본어가 들린다. 마시모토 부장 역시 오늘 숙취로 꽤 고생한 모양이다.

“김민호입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아! 덕분에 어제 즐거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말씀드린 내용에 대한 확답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어제 너무 취하셔서 혹시나 기억나지 않으실까 봐요.”

(하하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스폰서 업체 선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이 주 뒤에 발표하는 것, 그리고 미니카 개조에 관한 규정을 기존 대회 규정과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 이 두 가지지요? 오늘 내부 회의가 끝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상식선의 내용이라 아마 두 가지 모두 김민호 선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확정 지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일부러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별것 아닌 요구. 언뜻 보면 모두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이 대회에 이권을 들이대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것들이다.

미니카 대회는 지금 격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인기를 타고 있는 만큼 홍보를 위해 기업들도 각종 아마추어 경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인기가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기에 철진이처럼 막무가내로 스폰서를 하는 곳은 아직 없다.

굳이 2주 뒤에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달라고 한 건 그 때문이었다. 스폰서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발표되면 관심이 없던 다른 기업들도 주판알을 튕겨볼 테고 경쟁적으로 달려들어 만약 다른 업체가 한국팀의 공식 서포터가 된다면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된다.

이왕이면 철진이가 있는 삼정자동차가 우리 팀의 서포터가 되었으면 했다. 조금 치사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애초에 우리 팀의 화제성과 진짜 화재(?)가 인기의 발단이었다. 이 정도 어드벤티지는 수용가능하다 못해 공정한 수준이다.

2주간의 물밑 작업으로 철진이의 직원들이 남은 대표 선수들과 계약할 수 있다면 국가대표팀의 공식 스폰서가 될 수 있다.

개조에 관한 규정 부분을 동일하게 해달라는 것 역시 일종의 안전장치다.

우리 팀이 구형 미니카로 본선에 오르고 결승까지 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전파상 아저씨가 제작해준 롤러에 있었다.

롤러에 관한 규정은 개수와 모양의 제한이 없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만약 다미야 부품이 아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면 스폰서를 달고 있는 우리 팀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논란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대회규정과 동일하게 진행한다는 명시가 필요했다. 그래야 국내 대회에서 검차를 마치고 출전 자격을 얻은 명분을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안배는 철진이가 있는 삼정자동차가 스폰서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 효과가 있다.

「민호: 자냐?

상진: 왜요?

철진: 왜?

민호: 나 오늘 월차 썼으니까 일찍 와도 된다고.

지환: 바로 가겠스므니다.

철진: 쟤는 일도 안 하나 봐. 우리도 반차 쓰고 간다!」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호들갑스러운 케톡 문자보다 놀란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굴 보고 논의해야 할 일도 많다.

우선은 해장이다.

뒤집힌 속에 빨리 국물이라도 집어넣어야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찬장에서 컵라면 하나를 꺼냈다.

* * *

“형, 형!”

“왔어?”

철진이가 거칠게 흔들어 대는 바람에 머리가 또 울렸다. 그냥 불러도 일어난다고, 이 자식아.

눈을 떠보니 세 녀석이 벌써 아이스크림과 과자들로 거하게 판을 벌여 놓은 상태였다. 거기에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비디오가 벌써 중반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잠깐 비디오 멈춰봐.”

삑.

“형이 이번 세계 미니카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뭐?”

“형 떨어졌잖아요.”

“대회 규정이 바뀌었대. 팀 단위로 출전해서 상위 기록을 가진 5명이 자격을 갖게 되는 걸로.”

“그럼 민호 형이 5등이니까…….”

“우와! 국가대표네!”

“야, 이런 걸로 국가대표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그거 때문에 일찍 부른 거예요? 저희가 준비할 게 있을까요?”

눈치 빠른 상진이가 먼저 핵심을 찔렀다.

“스폰서 업체에 관한 규정 발표는 2주 뒤에 날 거야. 그전에 공식 스폰서 계약을 하려면 미리 움직여야 해.”

대회 출전 자격을 얻은 사람은 나뿐이다. 하지만 만약 스폰서로 삼정자동차가 들어가게 된다면 철진이는 상당히 바빠진다.

나머지 두 사람은 여유롭게 관람하는 입장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진짜 대단하네. 역시 그 사진 때문이지?”

“그런 거 같아. 본사 직원이 직접 왔었으니까.”

“키햐! 오늘 축하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엔 좀 괜찮은 신형 미니카로 조립하죠! 저도 도울게요!”

역시나 두 녀석이 가장 들떠 있다.

어설픈 추억으로 시작했던 미니카로 대회까지 나갔고 우여곡절 끝에 국제대회까지 나가게 되었다.

내가 아니라 철진이나 상진이가 출전한다 했어도 지금처럼 기쁘게 축하해줄 일이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한 팀이었으니.

그런데 지환이가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너무 우리끼리만 분위기를 탔나? 그때는 지환이가 없었으니 소외감을 느낄만 했다.

“지환이도 같이 갈 거지?”

“저도 갑니다…….”

“뭐야? 갑자기 왜 또 발음이 좋아졌어?”

“형! 이 새끼 배신자야!”

갑자기 철진이 폰으로 무언가 검색하더니 우리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루데, 일본 미니카 프로팀 스폰서 계약 체결. 한국과 일본 양국에 본사를 둔 루데가 완구유통업의 시너지 효과를 목표로 다미야 미니카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일본 선수를 지원하게…….)

“아, 아니므니다! 이건 민호 형이 떨어지고 나서 진행한 계약이므니다!”

“잡아.”

내 말 한마디에 철진이와 상진이가 지환이의 양팔을 붙잡았다.

“유언은?”

“진짜 아니므니다! 억울하므니다!”

“더러운 변절자 놈 같으니. 여기서 우리 정보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거지?”

“아니므니다! 난 그리고 루데건설이라 이 일에는 1도 연관이 없스므니다!”

“이 자식! 삼정건설인 상진이까지 걸고넘어져? 아주 악질이구먼!”

나는 방 한구석에 진열해 둔 고무줄 총을 꺼내 들었다.

“철진아. 등 까.”

“그거 진짜 아프므니다!”

그렇게 지환이는 등에 고무줄 5개를 맞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디까지나 철진이가 있는 삼정자동차가 스폰서를 따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기업들은 국내로 한정된다. 지환이가 있는 루데가 일본팀을 스폰서하는 것은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국가대표전인데 내가 지환이 회사 팀을 꺾으면 좀 그런가?”

“종주국을 이기려 하다니 가소롭스므니다.”

“다시 붙잡아.”

우리는 한참의 설득 끝에 겨우 지환이에게서 내부 정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 * *

하시모토 부장은 다미야 한국지부 화상회의실에 앉아 화면이 연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운 친구네. 그저 잘생긴 숙맥인 줄 알았더니.’

지난 만남으로 대회에 출전하겠다는 의사를 들은 뒤부터는 긴장의 끈을 놓고 있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곱씹을수록 김민호 선수의 요구 조건은 기발하고 치밀했다.

언뜻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요구 조건이었다.

하지만 김민호 선수와 한 팀이었던 삼정그룹의 두 후계자의 존재를 떠올리자 뒤늦게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스폰서를 확실하게 따낼 기간을 확보함과 동시에 대회 주체인 다미야는 표면적으로 별다른 혜택을 받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묘수.

‘대회에 나가지 않겠다 한 것도 연극이었나?’

공항에 내려 연락하고 곧장 보내준 주소로 달려와 만나기까지 불과 4시간 남짓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절묘한 수를 떠올렸다는 사실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두 번째 조건은 부끄럽게도 아직 그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속이진 않았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부담을 준 자신의 처세술에 당해주는 척하며 결국 실리를 챙긴 것이다.

‘이렇게 보기 좋게 당한 건 오랜만이네. 그저 뒷돈이나 요구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자신보다 열 살도 더 어린 그 잘생긴 청년은 영악하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제법 많은 양의 소주를 마셔서 흐트러진 모습이었는데도 예의를 잃지 않았고 타국까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날아온 남에게 난감한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뒷돈을 요구했다면 사람을 잘못 본 눈을 탓하고 그냥 일본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애환이 담긴 아련한 표정으로 미니카를 들고 있는 사진을 찍었는데 뒷돈이나 요구하는 시정잡배 수준이었다면 추후에 논란의 여파가 클 것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좋든 싫든 연관성을 가진다. 맥도날두가 지렁이 패티로 곤욕을 겪은 것처럼 결국 그런 사람이 인기를 얻어 승승장구하다 추악한 실체가 드러난다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미니카도 같은 이미지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될 가능성을 남겨둘 바엔 미니카 대회의 대대적인 마케팅을 없던 일로 되돌리고 스스로 옷을 벗고 나오는 게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첫 단추는 무사히 채워졌다. 아니,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아, 들립니까?)

지직거리는 마이크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프레임이 떨어지는 본사 회의실이 로딩되었다.

“네, 잘 들립니다. 이렇게 급하게 회의를 요청한 이유는…….”

이제 남은 일은 김민호 선수의 숙제를 자신이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다.

급하게 출장을 와 여독이 쌓인 채로 술까지 마셨지만, 확신에 찬 어투로 회의를 진행하는 하시모토 부장의 표정에서는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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