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9화 (59/151)

#59. 어른들의 사정(3)

“요즘 제안팀 무슨 일 있어?”

“네?”

“아니, 김 과장 요즘 업무 시간에 왜 이렇게 열심이야?”

“저, 저희 원래 열심히 합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하하하…···.”

이경수 팀장은 당황하여 어색한 웃음으로 어떻게든 무마하려 했으나 사장은 아예 이 팀장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하반기 추가 사업 나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 지금 일할 게 뭐가 있다고?”

“저도 한사코 말렸는데 예상되는 추가 사업 건이 있다면서 미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김민호 과장의 업무 방식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발주처에서 어떤 사업이 나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한단 말인가?

영업부에서 어떻게든 구워삶으면 분기별 떨어지는 사업비 정도는 알아낼 수 있으나 회의 한 번에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는 게 이 바닥 사업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헛수고일 가능성이 9할 이상인데 벌써 며칠째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들기는 걸 말려야 하나, 아니면 열심히 일한다는데 내버려 둬야 하나 고민하다 오늘에서야 조심스럽게 이 팀장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같이 모여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지?”

김민호 과장의 소문은 익히 들어와서 알고 있었다. 혼자 두세 팀이 해야 할 업무량을 소화하면서 실무에 관련된 산출물까지 관리했다 들었다. 이렇게 무모한 작업을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판단한 사장은 팀장급 회의에 김민호 과장을 불러들였다.

* * *

간만에 업무에 치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늘 철야에 치여 살다 갑자기 느긋한 일정이 되면 적응이 안 될 줄 알았으나 나태함은 의외로 적성에 잘 맞는 편이었다.

업무 회의를 핑계 삼아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달콤했고 이따금 의자에 몸을 기대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도 했었다.

제안팀의 업무는 롤러코스터와 같다. 빠르게 내려가는 시즌이 있으면 천천히 올라오는 시즌이 있다.

12월에 1년짜리 프로젝트가 나왔다면 4, 5월에는 연관된 추가 사업이 발표된다. SI 회사가 사업을 수주하는 사이클은 의외로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월까지 굵직한 사업을 따냈다면 최소한 4월까지는 제안서 템플릿과 발표 자료 디자인을 새로 뽑거나 보완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미덕이지만 지금 나는 그렇지 못했다.

“김 과장, 지금 하는 업무 때문에 그런데 잠깐 회의 좀 할 수 있을까?”

“네, 알겠습니다.”

지금쯤 부를 때가 됐지.

널널하게 지내야 할 제안팀에서 돌연 개발팀과 영업팀을 쑤시고 다니며 부산을 떨고 있으니 나 같아도 무슨 일인가 싶어 불러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불려간 회의실에는 사장님을 비롯해 각 부서 팀장님이 모여 있었다.

“아니, 김 과장. 추가 사업을 벌써 준비한다던데 그거 왜 그런 거야?”

“지금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객사에 휘둘리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뭐 매년 그래 왔던 거고. 별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개발팀 팀장님이 깊은 한숨을 쉬며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업이 하나 나오게 되면 그냥 고객사에서 이러이러한 부분이 필요하니 개발해 줄 업체를 찾습니다, 라며 턱 하고 공시하는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지지 않는다.

관련 사업을 맡은 업체를 들볶아 타당성 검토와 세부 요구사항과 개발 일정까지 모두 받아내게 된다.

당연히 이런 사업 외적인 요구도 두루뭉술하게 업무협조조항이라는 명목으로 추가 비용 없이 요청하기에 그때마다 갈려 나가는 쪽은 개발 일정을 맞추면서 사업에 전혀 관계도 없는 자료까지 준비해 제출해야 하는 개발팀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가볼까 합니다. 어차피 게워내야 할 자료들이라면 우리 입맛에 맞게 처음부터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우리 입맛에 맞게?”

“제가 이번 시스템 개발 이력을 조금 살펴보니까 대부분 6년 주기로 고도화사업이 진행되더라고요.”

“그렇지. 그때마다 보안 툴도 바뀌고 덕지덕지 붙은 내부 로직도 정비해야 되니까.”

“올해는 그럼 UI 개선이 추가 개발로 나와야 합니다.”

“아니, 나와야 한다는 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고객사도 어차피 3월이나 되어야 슬슬 추가 개발 논의를 할 겁니다. 그전에 우리가 선수를 치자는 거죠.”

나는 준비한 자료들을 빔프로젝트에 띄웠다.

“작년에 고객사에서 공개 입찰로 낸 사업이 7개입니다. 그중에 큰 사고가 터져서 언론에 올라간 사업이 3개, 신기록이죠. 모르긴 몰라도 이번 추가 사업도 안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겁니다.”

성과를 내는 사업이 아니다. 애초에 그저 큰 문제 없이 돌아가게 해달라고 낸 사업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필요한 기능이 덩치가 커지면 나오는 게 바로 추가 사업이다. 설계 단계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능은 당연히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가져온다.

이 시한폭탄 같은 추가 사업을 가장 안전하게 회피하는 방법은 단연 UI 교체다.

UI.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지칭하는 용어.

그렇다. 그냥 껍데기만 바꾸자는 거다.

그럴싸하게 껍데기만 새로 디자인해서 넣고 올해는 조용히 넘어가자는 어필을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김 과장, 우리가 아무리 고객사와 막역한 사이라지만 이걸 우리가 고객사에 먼저 말하면 경우가 없는 행동이야.”

화색이 돈 개발팀 팀장님과는 반대로 잠자코 듣던 영업팀 팀장님이 난색을 보였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미리 SR 담당자들에게 기능 안내 관련 상담 건수를 취합해서 통계로 반영해 달라 했습니다. 2달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아마 못해도 백 건은 넘게 쌓였을 겁니다.”

“아!”

사업을 진행하며 발생하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어야 한다. 그래서 있는 부서가 바로 SR, 서비스 담당 부서다. 전화 한 통으로 사용자가 찾지 못했던 기능을 안내하거나 혹은 자잘한 기입 오류를 수정해 주며 문제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부서다. 그리고 통계를 입맛대로 바꾸기 가장 좋은 곳이기도 했다.

“기능 안내 건으로 분류되는 SR 건수를 모두 UI 문제 관련 건수로 재분류해서 보고하시면…….”

“UI 개선 근거 자료도 되고 고객사에서 못 이기는 척 들어주기도 좋고!”

“그렇습니다.”

“으하하하! 세상 이렇게 편하게 일해보는 날이 다 오네!”

“아니, 김 과장,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

“하하. 제가 좀 고생하면 다들 편해지는 일이니까요.”

사실 굳이 놀아도 될 시간에 열심히 일한 이유는 딱히 다른 부서의 업무를 덜고자 한 게 아니었다.

나는 4월에 미니카 세계대회에 나가야 한다. 휴가까지 당겨써야 할 마당에 추가 사업으로 발목이 잡힐 순 없다.

대회 전까지 추가 사업 제안서를 최대한 준비해 놓고 홀가분하게 떠날 작정이다.

* * *

서울 소재의 한 카페.

철진은 구석 자리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얼음째 씹어먹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현자동차 기획부 차재훈 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삼정자동차 전략혁신본부3팀 조철진 전무입니다.”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민 철진을 무시하고 맞은편에 털썩 앉은 차재훈 부장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덕분에 제대로 물먹었습니다. 저희도 큰 행사 하나를 취소하고 밀어 넣은 계약서였는데 역시 삼정그룹인가 봅니다. 뒤로 얼마나 넣으셨을지. 하하.”

“뒤로 넣은 돈은 없소.”

“서로 여기까지 왔는데 속이는 건 이쯤 하시죠. 어차피 물먹은 건 우리니 앞으로 숟가락 올릴 생각하지 말라 엄포라도 놓으려고 부르신 거 아닙니까.”

“말이 안 통하는군.”

철진의 앞으로 열 장의 계약서가 오기까지는 채 3일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금액 차이가 제법 난단 말이야…….’

대현자동차를 뿌리치고 계약서를 들고 와준 마음은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고마웠지만, 그 금액이 문제였다.

근교에 비어 있는 창고를 개조해 연습실로 꾸미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너무 힘을 쓴 탓에 예상보다 큰 지출이 있었고 당연하게도 선수들에게 돌아갈 계약금은 줄어들었다.

탁.

나이 차이는 띠동갑을 짐작케 했으나 면전에서 적대감을 드러낸 상대방에게 굳이 존칭어를 써가며 예의를 차릴 정도로 철진의 성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철진은 테이블에 서류 하나를 던졌다.

「미니카 프로팀 창단 협의서(삼정자동차, 대현자동차)」

“뭐 하자는 겁니까?”

“거기 쓰여 있는 거 안 보이쇼?”

“아니, 그러니까 혼자 먹으면 될 걸 왜 나눠 먹겠다는 거냔 말입니다. 하. 이제 앞뒤가 좀 설명이 되네. 그래. 얼마를 원합니까? 비트코인? 아니면 달러?”

“이보쇼. 푼돈 벌이 하자고 지금 여기 앉아서 댁을 기다린 게 아니오. 생각 있으면 사인해서 들고 오고 아니면 말고. 그럼.”

철진은 몸을 일으켰다.

선수들에게 들어서 대략 어떤 사람인지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코드가 안 맞는 사람일 줄 몰랐다. 더 있다간 험한 말을 주고받을 것 같아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

“아무리 삼정그룹 장남이라지만 이건 너무 안하무인 아닙니까?”

“뭐요?”

“뒷돈도 필요 없다. 나가리 된 계약을 다시 들고 와서 절반을 양보하겠다. 누가 봐도 함정 티가 나는데 이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는 겁니까?”

“믿지 않으면?”

벌컥벌컥.

철진은 남은 커피를 목젖을 크게 꿀렁이며 들이켜고는 말을 이어갔다.

“믿지 않으면 그쪽은 뾰족한 수라도 있수? 나야 그쪽 말대로 삼정그룹 장남이라 뭐 이거 하나 잘못된다고 해서 크게 다칠 일은 없는데, 그쪽은 벌써 행사하나도 취소했다면서? 후원할 선수 하나 못 건진 책임을 지라면 자리보전도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야.”

할 말을 마친 철진은 다시 일어나 상의를 고쳐 입었다.

“…….”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요. 다른 뜻은 없으니까 잘 생각해보쇼. 서로 사인한다고 해도 실무진 뽑고 세세한 협의를 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니.”

“아, 알겠습니다.”

‘뭐야. 왜 갑자기 태도가 고분고분해졌어?’

방금까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대던 상대가 갑자기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하게 말하자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더는 같은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철진이 떠난 자리에 차재훈 부장은 동상처럼 불편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와이셔츠의 등과 가슴에 식은땀으로 무늬가 생길 만큼 흠뻑 젖은 채였다.

‘초, 총이다! 분명 양복 안주머니에 권총이었어! 미친!’

이미 진 싸움에 굳이 사람을 불러내었다.

오가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고 부서 내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차재훈 부장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모두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의심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니? 사인을 안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겠다는 건가? 삼정그룹 장남 성격이 불같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설마 총까지 가지고 다닐 줄이야…….’

그것도 안주머니에 있는 총이 잘 보이도록 일부러 상의를 고쳐 입기까지 했다.

이젠 회사에서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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