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MM(1)
“니 말대로 후원이 아이고 프로팀 창단으로 구색을 갖찼다. 이제 됐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헌데 와 하필 대현자동차랑 같이한다 그라노? 어차피 계약서는 미리 다 받았다매?”
‘올 것이 왔구나.’
“삼정자동차의 판매 실적은 대현자동차에 절반도 못 미칩니다. 대현자동차를 끌어들여 같은 위치에 로고를 광고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삼정자동차의 브랜드 가치가 대현자동차와 동급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를 가집니다. 운용비도 훨씬 줄어들고요.”
“허, 그래. 머리 좀 썼고마.”
‘민호 형 고마워!’
철진은 속으로 민호에게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중이었다.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연신 설렁탕을 떠먹고 있는 조동욱 회장의 기대와는 달리 대현자동차와 공동으로 프로팀을 창단하는 계획은 민호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었다.
무리하게 연습실을 꾸민 탓에 대현자동차와 비교해 조금 민망한 계약금을 주게 된 철진이 민호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였다.
“저… 아버지, 그래서 말인데요.”
“와?”
“제가 이번에 미니카프로팀 구단주로 한번 나서보고 싶습니다.”
“또 그 소리가? 실때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마저 무라.”
지난번 미니카 대회 때도 스폰서로 팀을 만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단발성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번듯한 프로팀을 이끄는 구단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미 계약도 완료했고 이제 창단식만…….”
“니 밑에 딸린 아가 몇이고?”
“열일곱입니다.”
“가들 많이 데꼬 가봐야 다섯이다. 안 글나?”
“…….”
철진은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아버지의 입으로 듣게 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작 10명밖에 안 되는 선수가 모인 프로팀이다. 그것도 광고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시범적인 팀에 수행 인력을 부른들 최대 다섯이었다. 나머지는 원래 있던 부서에 계속 남아야 했다.
“아랫사람 잘 부린다는 평판 하나 믿고 이까이 온 놈이, 제 식구 버리고 가면 돌아와서 니 챙겨줄 사람이 또 생긴다드나?”
“아버지, 그래도!”
“그라고 삼정그룹 장남이 반쪽짜리 간판 달고 나가믄 밖에서 우리 회사를 우에 보겠노?”
삼정그룹의 두 젊은 호랑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실무는 어떨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유교적 통념으로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속했다. 적어도 대외활동을 하면서 무게 있는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마흔은 넘겨야 젊은 CEO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와중에 후계자 수업도 안 끝난 장남이 경쟁업체와 급조해 만든 프로팀의 구단주가 된다고 함은 곧 차기 회장이 차남으로 기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10년은 강산도 변할 시간이다.
그사이 발생할 수 있는 오너리스크를 감수하고 후보 없이 단박에 차기 회장을 결정하는 경솔한 모습을 재계 서열 1위인 삼정그룹이 보여선 안 되었다.
스포츠팀 구단주를 해보고 싶다는 철진의 꿈은 또 한 번 그렇게 좌절된 것이다.
“몬난 놈. 그 자리는 이미 누가 드갈지 정해놨다.”
“누굽니까?”
“누구기는, 대현자동차 끼고도 지 손 안에 사람들 마음대로 조물딱거릴 수 있는 아가 누구겠노?”
“아!”
“아는 무신. 바보 돌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이거 설렁탕 미래옥 꺼 맞나? 와 이리 맛이 슴슴하노? 고마 입맛 배릿다. 니는 빨리 문방구나 불러온나. 해짔으니 문방구 퇴근했을 거 아이가!”
* * *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뜬금없는 일에 휘말릴 때가 있다.
지금 나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저더러 미니카프로팀 구단주를 해달라 그 말씀입니까?”
“그래.”
팍.
나는 철진의 옆구리를 몰래 주먹으로 힘껏 때리며 무슨 일인지 설명을 요구했다. 급하게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해서 퇴근하자마자 달려왔더니 당혹스러운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가 하려고 했는데…….”
“문방구, 니 한번 설명해 봐라. 와 점마가 구단주를 하면 안 되는지.”
“오너리스크 때문입니다. 적어도 회장님의 은퇴설이 나오기 전에는 최대한 많은 선택지가 있는 게 유리하니까요. 철진이가 그룹 밖으로 나오면 내외부에서 보기에 오너리스크가 커집니다. 단기간에 무마될 문제가 아니니 외부에서 상진이의 실적을 트집 잡아 흔들어 대면 주식은 그때마다 계속 떨어지겠지요.”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무엇보다 1년에 두 번, 짭짤하게 들어오는 내 배당금이 달려 있으니까.
“카모 구단주는 누가 되어야 하겠노?”
정답을 들은 조동욱 회장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대현자동차도 바보가 아니니 최대한 많은 인력을 넣으려 할 겁니다. 하지만 구단주를 비롯해 핵심 인력 상당수는 삼정그룹 사람으로 선점할 수 있을 겁니다. 아쉬운 쪽에 손을 내미는 형국이 아니니까요. 맹장보다는 덕과 지략이 있는 장수가 필요합니다. 매출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계약 기간 내에 무탈하게 팀을 운영하다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해체해도 뒷말이 안 나올 정도로 처세술이 좋은 장수로요.”
“자기소개는 그쯤하고 얼른 거 사인하그라.”
“네?”
“똑똑한 기가, 어리한 기가? 지금 이 자리에 그런 사람이 니빠이 더 있나 이 말이다.”
“천하의 삼정그룹입니다. 그 정도 되는 사람 하나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능력을 떠나서 외부인인 나에게 그런 중책을 맡길 이유가 하등 없었다.
차라리 삼정그룹의 단독 팀이었다면 외부 인재를 영입할 이유가 합당했다. 전문 경영인을 뽑는다는 것만으로도 투명한 운영을 약속하는 보증이었으니까.
그러나 팀을 운영하는 내내 대현자동차 사람들과 마찰이 있을 게 불 보듯 뻔한데 힘도 없는 외부 인력이 구단주에 앉아 있다면 그것만큼 지옥도가 없을 것이다.
“그 정도 되는 아가 있으믄 새 사업 하나 때가꼬 맡기지, 말라고 돈도 안 되는 일에 쓴단 말이고? 넉넉하게 챙겨 줄 끼니까 고마 사인하그라.”
“저는 싫습니다.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넉넉한 기준은 알 길이 없으나 길어야 고작 3년이다. 3년의 공백이면 내 평생의 커리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간이다. 이리저리 회사는 팔려 다니겠지만, 정년 언저리까지는 일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리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다.
돈 욕심이 문제가 아니라 내 한 몸 건사할 노후자금까지는 마련해 놔야 한다. 당장에 큰돈을 벌겠다는 심산으로 안정적인 월급과 커리어를 포기함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이 늙은이 부탁이다.”
“…….”
“니 덕에 임마랑 둘째가 사람 구실 하고 다닌다. 내사마 인제 한시름 놓고 사는 기라. 내 평생 장사꾼으로 살믄서 값 안 치르고 물건 가져온 적이 읎다. 일마 둘이 사람 만든 값 치르기 전에 눈감아 뿌면 내가 얼매나 억울하겠노? 인자 오늘내일하는 노인네 억지 들어준다 생각하믄 안 대긋나?”
조동욱 회장은 힘이 없어 떨리는 손으로 다시 펜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삼정그룹의 회장은 보이지 않았다.
“고민을 좀 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엔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그라모 이 계약서 들고 가그라.”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계약서를 손에 쥐고서야 겨우 응접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길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 형! 하자!”
“안 한다니까.”
차를 몰고 문방구로 향하는 동안에도 철진이는 계약서를 계속 들이밀며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왜!”
“왜긴! 평생 해온 일을 관둬야 하는데 너 같으면 덥석 수락하겠냐? 당장 계약서라도 안 가져가면 회장님이 안 보내주실 기세라서 들고만 나온 거야. 내일 연락해서 정중하게 거절할 거니까 너도 그런 줄 알아.”
분명 금액은 내 평생 다시 받을 수 있을까 싶은 연봉이었다.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그러나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나는 철진이나 상진이처럼 여유로운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살지 못한다. 문방구에서는 같이 웃고 즐기지만 결국 사회로 나오면 각자의 위치가 달랐다.
“하고 싶잖아!”
“뭐?”
“형도 하고 싶을 거 아냐!”
“야,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하고 싶은 건 맞지?”
“팔자 좋은 소리 그만하고 계약서 좀 치워. 옆이 안 보이잖아!”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미니카프로팀, 그것도 다른 업체와 같이 창단한 팀에 구단주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무거운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자리다.
만약 잘못된 결정을 한다면 그저 옷을 벗고 나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잘못된 결정 하나에 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 말이다.
평생 사무직에 몸담았던 내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 * *
“갔나?”
“네. 방금 조철진 전무와 같이 차에 올랐습니다.”
배웅을 나갔던 박 상무가 돌아와 곁에 서자 조동욱 회장은 슬쩍 커튼을 열어 마당을 빠져나가는 차를 바라봤다.
“오래 살고 볼 일인기라. 대통령한테도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했는데 억지로 붙잡는다고 산송장 연기를 다해뿟네. 허허.”
“그 문방구 주인이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니도 대꼬 올라고 안달복달하지 않았드나?”
“회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난놈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연봉으로 똥골배이 여덟 개를 준다 캐도 싫다는데 도리가 있나. 아쉬운 내가 바짓가랑이 붙잡아야지. 끌끌. 착해빠진 기라. 저리 똑똑한데 또 신기하구로 지사람한테 모진 말은 못 한데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부터는 자존심을 굽히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장사를 하려면 간이며 쓸개를 모두 내놔야 한다지만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큰돈을 벌기 시작한 뒤에는 뻣뻣해진 목을 숙일 성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마치 결제대금을 미뤄달라 사정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 그 구질구질한 시절처럼 처량한 표정에 아쉬운 소리를 오랜만에 꺼냈다.
“곳간에 살이 가득 쌓이모 인자 사람 욕심이 난다켔다. 내 죽고 나믄 이 회사에 두 아들놈 비빌 언덕은 있어야 안 돼긋나?”
지난 첫 만남 때 두 아들을 친한 동생으로 여긴다 했었다. 하지만 조동욱 회장이 보기엔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평생을 장사꾼으로 살아보니 사람을 엮는 데에는 돈만 한 게 없었다. 신의, 의리, 약속. 이런 허울 좋은 말을 백번 해 봤자 주고받은 계약서 한 장만도 못했다.
“쓰읍. 5년으로 해야 했는데. 이것도 불안시립네.”
비싼 삼정그룹 회장의 동정심까지 팔았다 생각하니 그제야 3년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계약처럼 보였다.
“문방구 주인이 거절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 거절은 무신! 점마는 절대 거절 몬 한다. 아들내미 둘이 들들 볶을 낀데 지가 무슨 수로 버티겠노?”
두 아들과 문방구 주인이 알고 지낸 시기는 비록 짧았으나, 그 사이가 각별하다는 것쯤은 굳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비범한 문방구 주인은 정에 너무 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