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66화 (66/151)

#66. 숨겨진 의도(2)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의 두루뭉술한 업무 지시만큼 곤욕인 것도 없다. 제대로 시키긴 한 건지, 내가 지금 제대로 하긴 하는 건지도 모르고 무작정 감에 의존해서 버틴 게 벌써 일주일째다.

‘선수들을 서포트하세요.’

이 서포트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미니카의 부품이나 용어도 모를뿐더러 딱히 도와줘야 할 업무도 없었다.

혼자 개조하고 트랙을 달리고 선수들끼리 이견을 조율하면 될 일이다. 여기서 도움을 준다고 해 봤자 결국 초시계를 들고 구간마다 도착 시간을 체크하는 것 정도였다.

“12.81초. 아까보다 빠르긴 한데 살짝 뜨는 거 같지 않아?”

“그러게요. 무게중심을 좀 바꿔야겠어요.”

“그런데 구단주님은 왜 이런 일을 시키시는지 통 모르겠네. 다른 업무도 많은데 말이야.”

“저희도 딱히 서포트는 필요 없는데 말이죠.”

“어휴. 뭐 우리야 1년 더 번 셈인데. 그래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네.”

“왜요?”

“회사에서 밀려난 게 오래전이야. 나도 승승장구할 때가 있었지. 그런데 부서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 하나가 엎어졌어. 가족 같던 팀원들 다 뿔뿔이 흩어지고 부서는 없어지면 안 되니까 나랑 신입사원 하나만 남았지 뭐.”

“그래도 삼정그룹이면 이직할 때 좋은 조건으로 갈 수 있지 않나요?”

“부서 나름이지. 나같이 외부에 아무 접점도 없는 부서에서 일하면 나와서 불러주는 데도 없어. 자식새끼는 이제 막 대학교 들어가서 돈도 많이 나가는데 씀씀이는 커지고 막막하지. 요샌 수위도 늙어서 잘 안 받아 준다나 봐.”

대기업 부장의 연봉은 분명 외벌이로도 풍족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 수준에 맞는 지출을 한다는 점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았다.

정년퇴직이 코앞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족들에게 이제 아껴 쓰자는 말을 차마 꺼내기 힘든 가장의 자존심을 가족들은 모르고 살았다. 그저 다른 부장들처럼 정년퇴직을 하면 전관예우 차원으로 하청업체로 가서 또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는 줄 알고 있었다.

당장에 집과 차를 팔고 다 늙은 몸을 써주는 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게 벌써 수개월이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훨씬 나은 처지였으나 앞날이 불투명함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3년의 계약 기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1등을 하지 못하면 그 기간마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임정훈 선수는 지난날 구단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1등…….”

“응?”

“아, 아니에요.”

“자, 그럼 이제 저쪽 코스로 갈 차례인가?”

“잠시만요. 몇 가지만 더 체크해 보고요.”

‘1등을 하면 부장님이 3년 더 회사에 다닐 수 있다. 1등을 하면.’

일주일 동안 붙어 있으면서 어느덧 이런저런 개인사까지 듣는 사이가 되었다. 나이는 아버지뻘로 처음엔 어색한 단답형 대화가 오갔으나 종일 곁에 붙어 있으면서 밥까지 같이 먹는 사이다. 으레 그 나이에 있을 법한 조언을 가장한 꼰대질도 없었고 의외로 말이 통하는 상대다. 그 사이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리고 어두운 얼굴을 애써 털어내고 힘차게 이야기하는 부장님의 직장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초, 아니, 0.1초라도 빨리 들어와야 한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내 어깨에 다른 사람도 올라와 있었어.’

임정훈 선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부품을 정비하는 손은 전보다 더 신중해졌고 앙다문 입술이 얼마나 진지하게 레이싱에 임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차재훈 부장의 눈에도 이채가 서렸다.

* * *

“자, 들게.”

“잘 먹겠습니다.”

나는 전파상 아저씨가 손수 타오신 커피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우리 호야가 이번엔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다 했나?”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흔쾌히 방문을 허락한 전파상 아저씨는 찾아온 이유가 퍽이나 궁금하셨는지 잘 지냈냐는 겉치레 인사 한번 없으셨다.

“제가 이번에 한국 미니카대표팀의 구단주를 맡게 되었습니다.”

“오, 그래? 이거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런 경사도 모르고 있었네그려.”

“아닙니다. 일부러 언론에는 크게 노출 안 했으니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기껏해야 최신 뉴스에 잠깐 나왔다 사라진 기사들이었다. 그 찰나를 지켜본 사람은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저씨의 도움이 조금 필요해서요.”

“응? 내 도움?”

“저번에 만드셨던 그 롤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선수마다 조금씩 차가 다르니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할 겁니다. 여기 계약서.”

「외부 기술고문 채용 계약서」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에게 기술 지원을 요청하면 검증된 인력이 파견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니라면?

대회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마당에 또다시 사람을 보내 달라 할 순 없었다. 확실한 답안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참고서를 살 필요는 없다. 그것도 그룹 차원에서 지원한다면 건너야 하는 서류가 몇 가지며 하던 일을 내려놓고 나올 수 있는지도 불투명했다.

그래서 지금은 전파상 아저씨의 도움이 절실하다. 아니, 절실한 정도가 아니라 없어선 안 된다.

“오호. 금액이 상당하네.”

계약서를 넘겨보시던 아저씨가 금액이 적혀 있는 장을 보시더니 눈이 커지셨다.

“이거면 이번 신상 3D프린터도 사겠네. 좋네. 하지!”

“감사합니다!”

당연히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에 비하면 섭섭지 않은 금액이다. 우리 팀의 운용비는 그리 많이 들어가는 편이 아니니 말이다.

“자네 미니카도 다 타버려서 새로 만들어야 하고 다른 선수들도 다 세팅이 다를 거니까 직접 가서 봤으면 하는데.”

역시 지금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셨다. 한시가 급한 사항이다. 스피드트랙을 제외하더라도 점핑트랙에 참여하는 다섯 선수의 미니카에 맞는 롤러를 다 제작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아직 반이나 남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일어섰다.

그렇게 차를 타고 달리길 십여 분.

“그런데 호야는 차는 안 바꾸나? 이거 원 구단주라는 사람이 차가 이래서 되나?”

“하하.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이게 편해서요.”

정확하게 말하면 비싼 차를 사는 게 불편했다. 내 기준으로 비싼 차라 함은 당연히 경차 바로 위 단계다. 물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불편함보다 편함이 더 많겠지만 그동안 내 발이 되어준 이 작은 녀석을 배신하는 것만 같았다. 아직 에어컨도 빵빵하게 나오고 조금 힘을 내면 고속도로도 달릴 수 있는 녀석이다. 더 이상 수리가 힘들 때까지 타고 다닐 작정이다.

“딸내미가 투정을 안 해야 될 텐데…….”

“네?”

“아, 아닐세.”

“저깁니다.”

끼익.

나는 대각선으로 주차해도 널찍하게 남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저씨를 안으로 안내했다.

“잠시만 모여주시겠습니까?”

잘 들릴 것 같지 않아 크게 외친 내 목소리가 건물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분은 이번에 기술고문으로 오신 박기동 박사님입니다.”

진짜 박사학위가 있는 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호칭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박사님이 제일 어울렸다.

“박기동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사님이 제 롤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필요하시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 이분이!”

예상대로 점핑트랙 선수들이 가장 반가움을 표했다. 스피드트랙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개조법과 세팅법으로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지만 점핑트랙은 그렇지 못했다. 기껏해야 4년, 새로운 방식의 개조 방법이 얼마나 시간을 단축하고 안정성이 뛰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기간이다. 그 때문에 지금도 다섯 대가 모두 개조 방식이 달랐고 점핑 구간에서의 운에 따른 요소를 반영하자 어느 개조 방식이 빠른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내가 사용했던 자이로스코프 기능이 들어간 롤러는 불이 나기 전만 해도 2등으로 치고 나가던 준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저들이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똑똑하십니다.”

어느새 다가온 차재훈 부장이 말을 걸었다.

“네?”

“기술고문을 빨리 불렀다면 선수들의 관심도가 모두 저 사람에게 쏠렸을 테니까요.”

“어디 보자. 일주일이네요. 예상보다 빨리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렇다.

저들의 업무를 그만두고 서포트를 하라는 다소 이상한 지시를 한 것은 선수들과 유대감을 키우고자 벌인 짓이다.

어릴 적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순수한 마음을 가진 선수들이다. 분명 같이 붙어 다니다 보면 친해진 직원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최선을 다할 것임이 분명했다.

마음가짐의 차이. 그것을 나는 이용한 것이다.

“그저 1등을 해야겠다는 마음과 1등을 하지 않으면 우리 팀의 존속이 위태로워진다는 마음은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냥 놔뒀으면 선수는 선수들끼리, 직원은 직원들끼리 모여 다녔겠지요.”

“하! 고작 그런 각오가 생긴다고 해서 성적이 좋아지길 바라셨습니까?”

“차재훈 부장이 모르는 게 아직 더 있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대회 따위. 조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트랙을 따라 달리는 것뿐인데 세계대회씩이나 있을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차재훈 부장은 입에 전자담배를 물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나가시죠.”

그렇게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치익.

차재훈 부장의 입에서 하얀 담배 연기가 나와 내 코끝을 간질었다.

“왜 세계대회씩이나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하셨지요?”

“…….”

“미니카는 당시에도 꽤 비싼 장난감에 속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용돈으로는 덥석 고를 만한 가격대가 아니었지요.”

한 달, 혹은 수개월을 모아야 비로소 살 수 있는 비싼 장난감이다. 하지만 돈을 모은다면 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큰 희생을 치르고서 신중하게 고른 장난감. 그 소중함은 천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정도다.

“저도 그랬습니다. 힘들게 용돈을 모아 미니카를 사고 너무 기쁜 마음에 품에 안고 잠들 정도였지요. 우리에게 미니카는 그런 존재입니다. 추억은 떠올릴수록 선명해지니까요. 차재훈 부장도 그런 추억이 담긴 물건이 있을 겁니다. 그걸 저 미니카라고 생각해 보시면 아마 저들이 더 잘 이해가 될 겁니다. 날이 춥네요. 들어가죠.”

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차재훈 부장을 채근해 안으로 들였다.

돈만 생각하는 냉혈한 같은 작자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무단횡단을 하면서도 길가에 쓰레기를 줍는 게 사람이다. 처음부터 글러 먹은 성정이었다면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다. 회사에서 내쳐진 신세. 당장 살길을 찾기 위해 떠났음이 옳았다.

아직 납득가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부분이 차재훈 부장의 선한 면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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