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67화 (67/151)

#67.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1)

“이번 주는 구단주님 일정이 꽉 차 있으셔서요. 혹시 다음 주는…….”

“선수들 인터뷰는 그럼 화요일로 확정하겠습니다. 주소는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시간은 상대적이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증명한 지극히 물리적인 법칙 때문만이 아니었다. 유독 달콤하고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반대로 바쁘고 힘든 시간일수록 더디게 흐른다. 그렇게 빠르게 흘러간 시간을 안타까워하는 시와 노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금 MM 프로팀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더디게 흐르고 있다. 구단주의 생뚱맞은 지시사항에 다소 널널한 업무 시간을 보냈던 터라 갑자기 정상적인 업무를 하려니 뻣뻣한 톱니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삐그덕거리기 일쑤였다.

거기에 더해서 민호의 다소 악의적인 업무지시는 조삼모사의 행태로 업무의 총량을 줄여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데드라인이 가까워진 상태로 살인적인 업무량이 몰린 셈이다.

“이 대리! 구단주님은?”

“아직 취재가 안 끝나셔서요. 급한 건이면 제가 들어갈까요?”

“아니야. 조금 이따가 연락 준다고 할게. 그 너튜버 촬영은 언제 온대?”

“오늘 두 시에요.”

“시간 한번 칼같이 타이트하네.”

“네. 저희도 저희지만 구단주님이 진짜 숨 막히게 빠듯하죠.”

처음부터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룬 계획임을 사전에 여러 번 알렸기에 다들 어느 정도 바쁠 것이라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회에 가까워지자 가장 바쁜 사람은 다름 아닌 구단주 민호였다.

미니카 붐을 다시 일으킨 장본인이자 다 타버린 미니카를 소중히 안아 들던 사진의 주인공인 민호에게 온 매스컴이 집중되어 저번 주부터 사실상 대부분의 업무는 언론사 인터뷰와 취재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스케줄 조정은 차재훈 부장님이 총괄하시죠? 그런데 차재훈 부장님 좀 어렵지 않아요?”

“어렵지. 딱히 사람들한테 안 좋은 소리를 하진 않는데 말이야.”

컴퓨터 앞에 앉은 두 직원이 누가 들을까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저희야 보고만 하면 되는데 일정상 구단주님은 계속 차재훈 부장님이랑 붙어 있어야 하니까 얼마나 불편하실까요?”

“그래도 상사잖아. 우리보단 낫겠지 뭐.”

* * *

“미니카대표팀의 구단주가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후원해 주시는 기업에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이런 자리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을 해본 것인데 이렇게 될 줄 저도 몰랐습니다.”

“아, 그 사진! 저도 가슴이 먹먹하더라고요. 그 미니카를 수리해서 이번 대회에 나가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저도 어떻게든 수리해 보려 했는데 너무 손상이 심해서 집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이번 대회에 나가는 기종은 보안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경쟁팀이 있으니까요.”

“호호호. 아니에요. 팀의 기밀을 제가 알려달라고 할 뻔했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대회에서 바라는 성적은 어느 정도일까요?”

“사실 성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입상을 못 한다 하더라도 프로팀은 계속 운영되며 비시즌에는 일반인들에게 연습장이 개방됩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미니카를 즐기는 문화가 되도록 앞으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네, 국내 최초로 결성된 미니카프로팀 MM의 승전보를 기원하며 오늘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좋은 영상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감사하죠. 대회 준비 중이라 한창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도 내주시고 직접 방문까지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너튜버분과 짧게 악수를 하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몇 번째 인터뷰인지 이젠 세는 것도 까먹어 버렸다. 물어보는 질문도 비슷비슷했고 당연히 그에 맞게 대답하는 답변도 비슷비슷했다. 종일 앵무새처럼 똑같은 질문에 답하고 또 답하는 일과가 고통스러웠지만 이젠 그마저도 어느 정도 적응해 버린 듯했다.

“어휴.”

너튜버를 배웅하고 돌아오다 거울에 마주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 옷도 다시는 안 입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세 녀석의 계략으로 이 마물 같은 핫핑크 유니폼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홍보 효과가 극대화되려면 인터넷에 퍼진 사진과 최대한 똑같은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는 그럴싸한 논리에 무언가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래도 싫으니 알아서 만들어 입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될 일이지만 홍보가 절실한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승낙하고 어쩔 수 없이 받은 유니폼을 앞으로도 대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고된 스케줄보다 더 막막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아, 부장님.”

“촬영은 다 끝나셨습니까?”

“네. 그래도 사전촬영을 팀원들이 좀 해주셔서 저번 너튜버분보다는 빨리 끝내주셨네요.”

“오늘 일정은 이제 따로 없습니다. 퇴근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직접 알려주러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직원들은 문서 작업과 병행해야 할 업무가 많아서요.”

현명한 업무 처리다. 지금 대부분의 일정은 내 홍보활동에 맞춰져 있다. 이 일정을 조율하고 직원들이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한정된 시간 내에 좀 더 효과적으로 홍보를 할 수단을 선택하는 일은 당연히 최고 결정권자인 내 몫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나는 요 며칠 연예인이 어떤 삶을 사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외부 사람을 만나는 것에만 집중해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결국, 전담해서 일정을 조율하는 사람은 귀찮은 보고체계가 필요 없으면서 주어진 시간 내에 본인의 업무와 그 외적인 업무까지 모두 소화 가능한 사람으로 정해졌다.

차재훈 부장이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속뜻이 있는 나는 당연히 붙어 있는 시간이 길수록 좋았다.

차재훈 부장은 유능했다. 아니, 유능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업무 능력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지금이 자신의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음을 지금까지의 태도로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인재를 잘 운영되어 봐야 1년 남짓인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단 하나다.

정신 차리고 오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현그룹은 아쉽게도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진 않으나 내 손에 들어온 걸 좀처럼 빼앗기는 법이 없다는 점을 말이다.

“다른 직원들은 다 퇴근했나 보네요.”

문을 열고 나오니 사무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저희 일정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럼 차 부장도 퇴근하시지 그러셨어요. 기다리실 필요는 없는데.”

“의전 인력이 없다면 외부에서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요.”

여전히 냉랭하지만 적어도 처음의 이유 없는 적의는 많이 사그라진 태도다.

고전적이지만 여기선 이게 최고겠지? 마침 아무도 없고 말이야.

“그럼 같이 술이라도 한잔 마시러 갈까요?”

“저는 괜찮…….”

벌컥.

“형!”

차재훈 부장이 뭐라 말하려는 사이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여긴 웬일이야?”

“문방구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아직 형 차가 보이길래.”

“이제 퇴근해요?”

“어, 차재훈 부장이랑 소주 한잔 마시려고 했지.”

“좋네! 우리도 같이 가!”

“그럴까? 저 밑에 통닭집 가자. 참, 차재훈 부장님은 철진이랑 구면이죠?”

“아! 네, 네.”

“그럼 자리도 한결 편하겠네. 같이 가요.”

“아. 저는…….”

“갈 때는 어차피 택시 타고 각자 찢어질 거니까 차는 그럼 철진이 차로 한 방에 가자. 제일 크니까. 5인승 맞지? 참, 소개가 늦었네. 여기는 우리 팀 총괄을 맡고 있는 차재훈 부장. 여긴 삼정건설 조상진 전무, 여긴 루데건설 이지환…….”

“상무이무니다! 상무!”

“잠깐 헷갈렸어, 인마! 그런데 얘는 우리랑 같이 가도 되나? 엄연히 경쟁팀 후원사잖아.”

“그러네요. 지환이 넌 대회 끝나고 같이 먹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갑작스럽게 계획에 없던 불청객이 추가되었으나 한번 둔 패를 물리긴 힘들었다. 아쉽지만 둘이 먹는 소주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다 같이 거나하게 마셔야 할 분위기다.

그래, 기회는 또 있으니까.

* * *

차재훈 부장은 갑작스럽게 술자리를 같이하게 된 엄청난 인물들 때문에 긴장해 술이 코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자자, 어서 마시라고!”

‘그만… 이건 맥주잔이잖아……. ’

곁에서 맥주잔에 자꾸 소주를 따라주는 사람은 최악의 첫 만남이었던 조철진 전무였다. 품에 권총을 차고 다니는 정신 나간 재벌 2세, 하지만 그 미친 행동만 빼고 본다면 한직에서 엄청난 판매 실적을 갈아치운 신화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같이 온 두 명의 재벌 2세들도 결코 급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우디에서 유례없는 규모의 사업을 비밀리에 추진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삼정건설의 조상진 전무를 비롯해 루데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이지환 상무까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경제를 쥐고 흔들 만한 차세대 인물들이 지금 자신과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작자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렇게 엄청난 인물들을 격 없이 대한단 말인가?’

분명 아직은 힘이 부족하고 공식 석상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젊은 사자들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10여 년 안쪽이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그룹의 주인은 젊은 사자들에게 넘어간다.

대현그룹의 후광이 없는 차재훈 부장에게는 더없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이 술자리는 너무도 신기하게 흘러갔다.

바로 김민호 구단주를 중심으로 말이다.

다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자신이 개조한 미니카 이야기를 꺼내며 누구를 이겼느니 혹은 오락기에 레버가 잘 안 움직인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보고를 올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실무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재벌 2세들이라기엔 너무도 순수한 모습에 긴장이 풀려버린 차재훈 부장은 이내 그들과 같이 어울려 잔을 부딪쳤다.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 오랜만에 과하게 들어간 술이 문제였다.

“웩!”

그렇게 비틀대며 택시에 올라 집에 도착한 차재훈 부장은 공용현관을 들어가기도 전에 뱃속의 알코올과 기름진 치킨들을 잔뜩 게워냈다.

‘으으. 이제야 정신이 좀 드네.’

삑삑. 삑. 삑.

“왔어?”

자꾸만 눈앞이 흔들거려 더듬더듬 누른 도어락이 계속 틀리는 와중에 기다렸다는 듯 계단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왔어요?”

“아니,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계단에서 차재훈 부장을 부른 사람은 행색이 초라한 한 노파였다. 허리는 다 굽어 보행기가 없으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위태로운 자세, 옷은 모두 보풀이 일고 계절에도 맞지 않아 여러 겹 두껍게 껴입은 모습이었다.

“찾아오지 말랬잖아요.”

“재훈아, 그게 아니라…….”

“엄마 혼자 살겠다고 버려놓고 인제 와서 무슨 염치로 자꾸 나타나냔 말이에요!”

“엄마가 미안하다. 미안해.”

“나가주세요.”

“재훈아…….”

삑삑삑삑. 철컥.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취기가 사그라든 차재훈 부장은 빠른 손놀림으로 도어락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철퍼덕.

차재훈 부장은 거실에 제멋대로 널브러진 채 불도 켜지 않고 조용히 두 눈에 팔을 갖다 댔다.

‘날 버리지 않는 건 돈뿐이야.’

시간이 조금 흐르고 현관 밖에서는 낡은 보행기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술자리 끝에는 어색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재훈 부장에게는 둘 다 원치 않는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