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2)
“끝났다! 으아아아아.”
나는 기지개를 길게 켜며 대장정의 막이 내려갔음을 자축했다.
끝났다.
드디어 오늘 마지막 일정이 끝나고 이제 진짜 본 대회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조금 민망한 말이지만 그 이 주 남짓한 기간 사이 온갖 커뮤니티와 뉴스 기사, 너튜브 메인화면까지 내 얼굴이 올라갔다.
부지런히 약(?)을 친 결실이 이제 막 피어난 것이다.
당장에 대회 준비에 전념해도 모자랄 시간에 팔자 좋게 인터뷰나 하고 있었으니 남들이 보기엔 참여에 의의를 두는가 싶겠지만 눈치 없게도 우리는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똑똑.
“구단주님, 식사 주문은 어떻게 할까요?”
“네, 제 것도 해주세요. 조금 있다 나갈게요.”
밖에서 들리는 직원의 말에 나는 곧 나가겠다 말하고 마라톤 일정을 마무리한 여운을 좀 더 즐기려 마음먹었다.
고급스러운 사무실.
컴퓨터도 그 비싼 액플 일체형 PC에 감성 가득한 마우스, 책상 위에는 한 번도 안 써본 만년필이 고급스러운 무늬가 휘감긴 필통에 꽂혀 있다. 소파도 벽에 걸린 액자들도 모두 하나같이 고급품.
물론 빌린 것들이다.
각종 영상매체에 나올 구단주의 사무실이 빈약하면 후원하는 그룹의 면이 서겠냐는 차재훈 부장의 반협박에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에서 보낸 소품들이다. 명목상은 정말 대여로 잡혀 있어 졸지에 멀쩡한 비품을 빼앗긴 임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는 사실을 철진이를 통해 듣고 나서 알았다.
물론 화려하게 사무실을 꾸미는 취미를 가진 상진이가 가장 큰 피해자였음을 철진이가 통쾌한 듯 고자질했기에 나 또한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바빠서 컴퓨터조차 켜지 못했다. 뭘 써 봤어야 죄책감이 생기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지금은 그저 이렇게 잠시 성공한 CEO 분위기만 즐기는 걸로 만족해야지. 컴퓨터를 제외하면 대회 시즌이 끝나고 모두 돌려보낼 작정이다. 취향에도 맞지 않고 나처럼 사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허영심을 책잡힐 치부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참, 돌려보내기 전에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장식품 하나를 한 손에 뒤집어 들고 셀카를 찍었다.
「민호: (사진)
민호: 야, 상진아. 네 장식품 쩔더라?
상진: 아, 그거 진짜 비싼 거예요! 이태리에서 주문 제작한 거란 말이에요!
민호: (사진)
민호: 짜잔. 3층 탑. 저승까지 가져갈 것도 아닌데 우매한 중생이로다! 이 탑을 보고 기도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거라.
상진: 형, 제발…….
철진: ㅋㅋㅋㅋ
지환: ㅋㅋㅋㅋㅋㅋ」
꼬르륵.
안절부절못하는 상진이를 놀리는 카톡은 칼같이 울리는 배꼽시계로 금방 끝나버렸다.
나는 다급하게 계속 진동을 울리는 카톡을 뒤로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우리가 밥을 먹는 회의실로 향했다. 말이 회의실이지 그냥 사무실 옆에 파티션도 없이 길게 놓인 테이블이었다.
“아직 밥은 안 왔죠?”
“네, 방금 전화했어요.”
“그럼, 밥 먹기 전에 잠깐 모여서 정리 좀 하죠.”
다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사에게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임은 분명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10분 전, 무언가를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어진 내 뒷말이 그 분노를 잠재우기 충분했다.
“점심이 오는 대로 먹고 바로 퇴근하시면 됩니다. 내일은 멀리 가야 하니까요. 다들 일은 마무리하셨죠?”
“네!”
계획에 없는 조기퇴근만큼 기쁜 일도 없다.
그렇게 회의실에 모인 우리는 무언가 적을 수첩 대신 밥숟가락을 하나씩 올려두고 짧은 회의를 시작했다.
“비행기는 삼정그룹에서 전세기를 지원했습니다. 저희는 그걸 타고 갈 겁니다.”
“전세기요? 오늘 표를 따로 보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희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언제쯤 표를 보내줄 거냐고 물어보니 전세기를 타고 갈 거라 상관없다는 답변을 전달받았습니다.”
차재훈 부장의 답변에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다. 어차피 두 회장님의 직접 참관을 요청드린 상태다. 그냥 무작정 오시진 않을 테고 일본에 가는 김에 이런저런 업무를 보실 것이 분명했다. 수행팀을 더하면 우리 MM 대표팀의 인원과 더해서 전세기를 타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잘됐네요. 다른 건요?”
“저, 구단주님.”
“네.”
이번에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운을 뗀 사람은 선수단에서 대표 격으로 있는 임정훈 선수였다.
“저희 정말 이렇게 가도 될까요? 들리는 소문에 다른 팀들은 이런저런 전략을 짜서 준비한다던데…….”
내일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마당에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대회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선수들의 압박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겠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작전은 바꾸지 않습니다. 각자 생각한 방식대로 개조한 미니카로 달리는 겁니다. 평소처럼요. 말이 좋아 팀전이지 사실상 개인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승점 방식은 순위 합산인데 적어도 안전한 튜닝과 조금 도박수 튜닝 정도로만 나눠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들 스페어 미니카는 많아서 어차피 세팅도 금방 끝나고요.”
오랜만이다. 직원과 선수 중에 이렇게 내 의견에 조목조목 반론을 들어 올리는 사람은 차재훈 부장 이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맞고 임정훈 선수가 틀리지만.
“대회 트랙은 당일까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당장 트랙에 맞는 튜닝을 그 자리에서 빠르게 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선수들의 역량을 모두 쏟아부어야겠죠?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따로 전략에 맞는 세팅까지 지시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들 스페어 미니카는 그냥 파손에 대비해서 여유 부품 정도로 동일 세팅을 해놨을 겁니다. 제 말이 맞죠?”
내 질문에 선수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연하다.
이 대회에서 지면 정들었던 직원들의 거취가 불투명해진다. 그 때문에 다들 사활을 걸고 진지하게 대회를 준비했다.
최선을 다한 튜닝을 했고 그 역량이 모두 들어간 미니카로 대회에 출전해야만 한다. 어설픈 전략으로 본인의 100%를 다하지 못함은 오히려 독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많은 미니카와 달리는 겁니다. 어차피 트랙은 한 줄. 빨리 들어오는 미니카가 많은 쪽이 이기는 게임이라면 개인 역량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답변이 되었을까요?”
“네. 이해했습니다.”
“참, 다른 준비는 다 잘 되어 있죠?”
“네, 테스트는 모두 끝났습니다. 촬영은 트랙에서 10미터만 이격되면 상관없다고 다미야 행사팀에서 전달받았습니다.”
“식사 왔습니다.”
타이밍이 좋았다. 그럭저럭 필요한 정보만 주고받은 짧은 회의가 식사 배달에 마무리되었다.
“그럼, 밥 먹고 퇴근하죠. 참! 잠시만요!”
아차차. 빼먹은 게 있다.
나는 얼른 냉장고로 달려가 보자기에 싸인 통 하나를 들고 와 회의실 다른 반찬들 사이에 올려놨다.
“구단주님, 이게 뭔가요?”
“아마 계란 장조림일 겁니다. 저희 어머니가 유일하게 하실 줄 아는 음식이거든요. 하하.”
본의 아니게 자랑하는 모양새가 되어서 민망함을 감추고자 멋쩍게 볼을 긁었다.
“맛은 그냥 그렇습니다. 맞벌이하셔서 음식 솜씨가 없으신데 그래도 아들이라고 이렇게 가끔 챙겨주시거든요.”
커다란 김치통의 뚜껑을 열자 안에는 예상대로 갈색으로 잘 염색된 계란들이 동동 떠 있었다. 어차피 집에서 음식을 잘 안 해 먹으니 다 먹기 전에 상할 게 분명 한 양이기에 여기서 최대한 소모(?)하고 집에 들고 갈 작정이었다.
“아마 부모님의 마음은 다 같으실 겁니다. 자주 못 보면 꼭 굶는 줄 아신다니까요. 매번 오실 때마다 이렇게 다 먹지도 못할 반찬을 가득 싸주시지 뭡니까?”
벌떡.
뭐, 뭐야? 갑자기 차재훈 부장이 일어났다.
“저는 다 먹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니, 아직 밥뚜껑도 안 열었는데…….”
그렇게 차재훈 부장은 갑자기 가방과 겉옷을 챙겨 어디론가 급하게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알아먹었으면 다행이다.
“손 한번 많이 가네.”
“네?”
“아,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식사하시죠.”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남의 가정사에 과하게 참견하는 상사는 최악 중 최악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출병을 앞둔 장수가 사사로운 일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될 일이다. 내일이면 드디어 떠나게 된다. 세계대회가 열리는 일본으로.
* * *
탁탁탁탁.
걸음이 아니었다. 마흔이 넘어 오랜만에 해보는 뜀박질이었다.
주차장에 멋대로 차선을 물고 주차를 한 뒤 공용현관에 달려온 차재훈 부장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택배기사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1층, 2층, 그렇게 3층에 다다르자 계단 한쪽에는 작은 보자기 뭉치가 놓여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곧장 엘리베이터로 가기에 미처 보지 못했다.
차재훈 부장은 떨리는 손으로 그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속에는 얼마나 오래 재활용을 했는지 정체 모를 누런빛을 띠고 있는 반찬통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이미 냉장고에 들어갈 기회를 놓쳐버린 쉰내가 사방으로 퍼졌다.
반찬 통에는 제육볶음과 불고기를 비롯한 평소 좋아하던 고기반찬들이 뚜껑에 눌린 자국이 생길 정도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차재훈 부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버린 지 몇 년 되지 않아 새로 살림을 차린 것을 원망했다.
자신을 잊고 또 다른 자식을 낳고 사는 것도 원망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홀로 쓸쓸히 사는 것이 죗값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을 잊은 것이 아니셨다. 면목이 없어 차마 걸음을 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흘러 보행기에 몸을 기댈 나이가 되어서야 찾아오셨다.
너무 늦었음을 사죄하기 위해서.
잘 살고는 있는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 위해서.
아직 어린아이 같은 자식에게 맛있는 밥 한 끼라도 먹이기 위해서…….
변변치 못한 형편에 저 많은 음식을 준비해 쩔뚝이는 걸음으로 이 먼 길을 왔을 터였다.
눈물이 차올라 볼을 타고 흐르며 지난날의 원망을 씻어내었다.
띠링.
「구단주 김민호: 차재훈 부장은 오늘부터 4일간 다른 출장입니다. 따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지는 아시는 눈치라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화요일에 사무실에서 봅시다.」
차재훈 부장은 그제야 술을 마신 날, 자신이 혼자 힘으로 오피스텔에 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화단에 토를 할 때 누가 등을 두들겨 주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자신을 보내고 주차장에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분명 주차장에서도 들렸을 것이다. 취기에 크게 소리를 질렀으니.
“감사… 합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문자로 전해지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움과 원망, 그렇게 다른 방향으로 흐르던 시간은 조금 멀리 돌아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정(情)의 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