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첫 비행(1)
전용기.
계약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원할 때 언제라도 별다른 절차 없이 비행기에 올라 전 세계로 갈 수 있는, 사치의 극이라 할 교통수단이다. 이 전용기 앞에서는 퍼스트클래스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니 지금 누리는 호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놀라워야 했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우와! 의자 넓은 것 봐! 다리가 다 펼쳐지네!”
“출국 수속도 전용 룸에서 따로 할 줄 꿈에도 몰랐다니까.”
나도다.
아니, 출국 수속이 원래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저 뒷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직원들처럼 무언가 기존 항공사와 차이점을 이야기해 보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난 비행기가 처음이다.
“어떻노? 고마 팔아뿌까 하다가 또 대현에서 실때없는 곳간 걱정해 줄까 봐 나둔 긴데. 처음 타보제?”
“네. 정말 편안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데. 임원들은 눈치 본다고 못 타고, 내는 돈 아깝다고 못 타고, 이럴 때 아이모 움직이지도 않는다.”
별일 아니라 너스레를 떠셨지만 분명 과분한 혜택이었다.
“다른 계열사에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 규모의 해외 출장을 더 멀리 가는 부서도 많을 텐데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쪽은 당연히 삼정자동차였다. 한국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그래서 더욱 수출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당연히 대규모 출장이 잦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일에 전용기를 탈 기회가 있었을까 싶었다.
삼정자동차에서 지원받는 우리가 덜컥 이런 전용기를 타고 다닌다면 고깝게 여길 사람이 없으리라 장담하지 못한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을 편하게 가자고 밀접하게 관련 있는 후원사의 직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인터뷰로 정신이 팔려 있지만 않았다면 거절했을 텐데 조금 아쉬운 선택이었다. 뭐 덕분에 직원들도, 나도 전용기를 타봤다는 작은 추억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하! 인마 이거 우리 회사 걱정을 다 해주고, 기특카구마! 이 전용기는 말이다. 난촌기라, 난초. 회장실에 손님이 들어오모 이래 탁상 위에 올라와 있는 난초 말이다. 문 말인지 알긋나?”
“건실한 기업이라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잘 관리되고 대외활동에 사용한다는 명분을 잊지 않을 만큼만 사용하는 용도라는 뜻입니다.”
“허허허. 그래그래. 맞다. 김새구로 정답을 이래 마차뿌네. 그라고 거 일하러 가는 아들이 몸이 편해지믄 놀러 가는 줄 아는 기라. 내사마 젊을 때는 비행기 푯값도 아까워가 하루면 갈 거리를 사나흘 뱅뱅 돌아갔다 카이.”
이럴 때는 또 영락없는 옛 어르신이다.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말이었다.
“아껴야 할 때와 써야 할 때를 아시기에 그룹이 이렇게 커질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하모!”
그저 비위나 맞춰드리자고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천 개의 기업이 있다면 그중에 삼 년도 못 가 문을 닫거나 명패만 근근이 유지하는 곳이 9할이다. 이 척박한 대한민국 땅에서 규모로는 우열을 감히 논하기 힘든 삼정그룹을 키워낸 정신이다. 구시대적인 발상이라 치부하기엔 그 결과가 너무나 대단했다.
“니 양주 물래? 여 양주도 많다.”
“괜찮습니다. 업무시간이라 술은 안 됩니다.”
“안 대는 게 어딧노? 한 잔만 해라. 으른이 주는 술이다.”
“그럼, 조금만 마시겠습니다.”
“여 양주 제일 오래된 걸로 가지오니라!”
칭찬 아닌 칭찬에 갑자기 한껏 기분이 좋아지신 회장님이 양주를 시키자 테이블에는 고급스러운 식탁보가 덥히고 얼음 잔이 놓였다. 그리고 물방울 모양으로 생긴 양주병이 통째로 올려졌다. 감질나는 잔술을 싫어하시는 성정을 미리 파악한 센스 좋은 서비스. 하지만 당장 저 술을 얼마나 마셔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나에게는 최악의 센스였다.
쪼르륵.
얼음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잔이라 얼마 차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양의 술이 따라졌다.
“자, 묵자.”
흡!
혀를 타고 이질적인 휘발유 맛이 뇌를 강타해 하마터면 기침이 나올 뻔했다. 풍미고 깊은 맛이고 그런 건 술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나 즐기는 표현이다. 나처럼 어쩌다 먹는 술이 소주고 집에서는 맥주캔이나 따는 사람들에겐 아무리 비싸도 결국 넘기기 힘든 알코올이었다.
“커흑!”
그리고 그건 회장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결례라 생각해 필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고 표정 관리를 했던 나와는 달리 거침없이 들이켜신 양주가 반사적으로 목에 걸리셨는지 얼굴을 구기시며 기침이 멈추지 않으셨다.
“흠흠. 니 일본은 전에 와본 적 있드나?”
“없습니다. 사실 해외여행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기침이 잦아들고 조금 민망하셨는지 회장님은 대화 주제를 다시 돌리셨다. 그 주제는 나에겐 의외로 맞지 않는 주제였다.
“뭐라꼬? 아니, 그 나이 묵도록 외국도 한번 안 나가보고 뭐 했드노?”
“딱히 출장을 나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요새 젊은 아들 놀러도 많이 가드마. 니도 가지.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일 텐데.”
“필요하지 않아서요.”
회장님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다녀오면 시야가 트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같이 가자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저는 그런 경험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돈이 아깝다고 생각한 건 아닌데 말이지요.”
나는 다시 마시기 두려운 술잔을 손으로 이리저리 돌리며 조금 궁색한 변명을 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끼리 의기투합해 떠나자 케톡방이 시끌시끌했던 적도 있었고 유독 여행 너튜버를 자주 챙겨보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음만 먹는다면 떠날 수 있었던 여행은 지금껏 좀처럼 내키지 않는다는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뜻밖에 회장님께서 알려주셨다.
“니는 그랬을 기라. 그 골방에 앉아가 세상을 다 꿰뚫어 보는데 견식을 넓힐 여행이 뭔 필요겠노?”
“과찬이십니다.”
“세상천지에…….”
딩동.
(우리 비행기는 곧 도쿄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착륙 준비를 위해 좌석 등받이와 발받침대, 테이블을 제자리로 해주시고 좌석 벨트를 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평가는 너무나 후했다. 웃으며 살포시 고개를 저었으나 회장님은 답답하다는 듯 무어라 말을 더하려 하셨지만, 이번엔 안내방송이 내 겸손을 곧바로 이어받았다.
짧은 첫 비행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륙하던 순간의 두근거림도, 구름 위를 나는 기분도 짧게 지나가 버린 비행이다. 하지만 이 아쉬움이 좋다. 지루한 비행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으니 말이다.
“니 뭐 하노?”
“네?”
“상 치워야 한다 안 카나. 빨리 그거 다 마시뿌라.”
“네…….”
비행의 마무리는 역시 축하주다. 그것도 아주 비싸고 독한 축하주.
* * *
“다들 수고스럽겠지만 부스에 가져갈 장비만 점검해 주시고 숙소로 들어가 쉬시면 됩니다. 짐이 있으니까 그냥 가지 마시고 택시 타고 가세요.”
선수들은 다미야 측에서 제공한 숙소에 들어가면 되지만 같이 따라온 직원들까지 숙소가 제공되진 않았다. 그래서 선수들과 직원들의 숙소 대회 장소보다 조금 먼 곳에 있었다.
“자, 그럼 우리도 마지막 점검은 숙소에 가서 하죠.”
나는 짐 속에서 공구 상자를 챙겨 선수들과 숙소로 향했다. 지금부터는 나도 한 명의 선수니까 말이다.
“No! I am Brian! This list is wrong!”
임정훈 선수가 다행히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무리가 없었지만 비슷하게 도착한 다른 나라 선수들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세계대회 선수들의 숙소인데 영어를 제대로 하는 직원이 없네요.”
“구단주님도 여기 몇 번 와보시면 아실 겁니다. 엄청 꽉 막힌 곳이에요.”
카드키를 받고 유유히 걸어 올라가는 우리와 답답한 가슴을 치며 로비 직원에게 무언가 항변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너무나 대비되었다.
“저, 임정훈 선수.”
“네.”
“짐은 내가 같이 숙소로 옮겨줄 테니까 저기 좀 도와주러 가죠. 그래도 같은 선수들인데 보기가 안 좋네요.”
“저는 영어를 잘 못하는데…….”
“제가 어느 정도 하니까 괜찮습니다. 뭐 정 안 되면 번역기라도 쓰죠, 뭐.”
다시 로비로 돌아온 우리는 더듬거리는 영어와 일본어로 브라이언이라는 선수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안내받은 숙소에 소속 국가 선수들이 모두 섞여 있는 게 원인이었다. 적어도 다섯 선수가 2인실과 3인실에 각각 배정받아야 했지만 어디서 꼬여버린 모양이었다. 한국 선수들의 이름은 표기가 눈에 띄어서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This is an edited list. check it out.”
“Oh. thank you! thank you!”
우여곡절 끝에 제대로 된 리스트로 수정된 방 배정을 보고 그제야 브라이언이라는 선수는 얼굴빛이 돌아왔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한 브라이언을 뒤로하고 조금 늦게 숙소로 들어온 우리는 겨우 짐을 풀고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온풍기의 열기가 막 방을 덥힐 무렵.
딸칵.
공구 상자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쉬다가 하지 그래요?”
“내일이라는 생각에 신경이 쓰여서요.”
참가에 의의를 두는 대회가 아니다. 다른 선수들도 다른 직원들의 운명이 자신의 미니카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아마 지금 편히 쉬지는 못할 것이다.
대회가 다가올수록 그 부담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지금 선수들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나는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딸칵.
나도 공구 상자를 열었다. 스페어 장비를 확인하고 이동 중에 파손된 곳이 없는지 만져보는 게 전부였지만 그 간단한 과정도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임하는 우리였다.
* * *
‘정신 나간 작자들 같으니! 이렇게 바쁜데 직접 오라고 나를 불러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 하시모토 부장은 짧게 묵례하고 자리에 섰다.
“이번 대회를 추진한 성과는 윗선에서도 크게 흡족한 모양이야.”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우승은 일본 선수가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답답한 사람. 지금 이렇게 이목이 집중돼 있는데 여기서 시상대 위에 일본 국기가 안 걸리면 결국 남 좋은 일 아닌가 이 말이야!”
‘이게 무슨 헛소리야?’
하시모토 부장은 지금 자신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 선수들의 역량은 최고 수준입니다. 그래서 역대 대회에서도 가장 많은 우승을…….”
“아니! 우승을 뺏긴 적도 있지 않은가?”
“그야 두 번째로 한국 선수들, 그리고 뒤로 다른 선수들도 가끔 우승을 가져갔으니까요.”
“이번에는 이변이 없어야 하네.”
“도대체 어떻게 말씀입니까?”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조금 올라갔다. 무례한 어투였으나 불편한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서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지적할 면이 두꺼운 사람은 없었다.
“하시모토 부죠가 알아서 잘 해야지. 적어도 우리 다미야에서는 일본의 우승을 위해 이 정도로 노력을 했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네.”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가르침이나 듣자고 자네를 부른 게 아니야. 시키는 대로 하게.”
“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