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72화 (72/151)

#72. 마지막 자비

(네. 말씀드리는 순간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빠르게 치고 나가는 대한민국 선수들의 미니카! 압도적인 차이입니다!)

(아무래도 올해 처음 대회가 열린 영국과는 수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섭게 치고 나가는 우리 미니카에 비해 영국팀의 미니카는 너무나 느렸다.

이미 직선 구간에서부터 확정된 피지컬의 차이는 전략적인 튜닝으로 어떻게 줄여볼 간격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내 미니카는 독보적인 스피드를 자랑했다. 뒷차와의 거리는 어림잡아 3미터 이상, 팀 내에서도 테스트할 때 이 정도의 빠르기를 계속 유지했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 내 미니카에는 스피트트랙에서 쓰는 모터가 들어가 있다. 토크를 최대한 줄인 다른 점핑트랙 모터와는 그 회전수부터가 차이가 났다. 무모하고 근본 없는 튜닝.

코너링은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문제는 총 3번의 점프대였다.

(말씀드리는 순간 드디어 김민호 선수의 미니카가 첫 번째 점프대로 진입합니다!)

(점핑트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 점프대의 유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아무리 속도가 빠르더라도 이 점핑트랙에서 코스 이탈을 한다면 탈락입니다. 지금 김민호 선수의 속도가 상당한데요? 과연 잘 넘어갈 수 있을지!)

내 미니카가 드디어 점프대에 돌입했다.

그리고, 날지 않았다.

투둑.

짧고 간결한 소리와 함께 점프대를 마치 무시한 듯한 움직임으로 점프대 위에 붙어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아! 어찌 된 일일까요? 김민호 선수의 미니카가 점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더 안정성 있는 주행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연습주행에서 생각보다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180도 달라진 주행입니다. 크게 달라진 세팅은 없는데 어떻게 이런 주행이 가능한지 저희도 참 궁금합니다.)

우연이었다.

이런저런 개조를 해보다 꿰맞춘 바퀴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큰 모양이었다. 휠에 맞춰 넣어도 조금씩 헛도는 상황.

조금 귀찮지만, 같은 부품을 사러 다미야 매장으로 향하다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마찰력에 변화를 준다면 차라리 바퀴가 헛도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실험은 간단했다.

근래에 갑자기 인기가 높아진 탓인지 구하기 어려운 부품들은 제대로 검수조차 없이 출하된 모양이었다. 비슷한 문제가 있는 바퀴를 여럿 구할 수 있었고 앞타이어만 그렇게 헐렁한 상태로 끼워 넣었다.

다미야 정식 부품이니 검차는 당연히 통과. 그렇게 필드를 달리다 보면 마찰열로 확장된 바퀴가 힘을 덜 받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오르막을 오르면 뒷바퀴에 모든 힘이 집중되고 이내 앞바퀴가 헛돌면서 극단적으로 짧은 점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무게 중심은 모두 앞쪽으로 쏠려 있는 상태여도 충격을 받을 점프 거리가 짧으니 스피드 이외에 나머지 변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에 더해 전파상 아저씨의 롤러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위아래로 일어나는 충격을 착실하게 잡아줬으니 사실상 나 홀로 스피드트랙을 달리는 것과 같았다.

(김민호 선수의 미니카가 빠르게 치고 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점프대의 내리막길이 가속도에 도움을 줘서 훨씬 속도가 올라가겠는데요?)

(그렇습니다. 활공 시간에 손해 보는 힘이 없어지니까요! 국내 경기에서도 구형 미니카로 출전해 뛰어난 활약을 펼쳐준 선수답게 이번에도 독보적인 개조 방법이 가미된 듯합니다!)

다소 격앙된 해설진들의 중계 속에서 점점 속도가 빨라진 내 미니카는 어느덧 마지막 결승선에 다다랐다.

(김민호 선수 1등! 그 뒤로 임정훈 선수, 줄줄이 우리 대한민국의 선수들이 들어옵니다!)

낙승.

상대 팀에게는 안타깝게 되었으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채로 진행된 레이스치고는 결과가 너무 좋았다.

다행히 연습주행을 못 해봤던 선수도 코스 이탈 없이 무사히 도착, 승패는 너무도 명확하게 갈렸다.

당연히 예상된 결과다. 우리 계획상 일본과 첫 번째 경기를 하지 않는다면 준결승까지는 다이렉트로 뚫고 간다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희생양(?)이 된 영국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무리 취미였던 장난감 경주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부스로 돌아가는 저들 대신 우리가 졌다면 결코 저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테니까.

본 게임은 내일이다.

준결승과 결승이 연이어 진행되는 일정에 경기장도 바뀌게 된다.

살아남은 팀은 절반. 이 절반에 속하게 된 것은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결과로 여겼으니까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작전이 잘 먹혀들었네요.”

나는 긴장이 다소 풀린 선수들을 다독였다.

사실 전략이라 칭하기도 민망한 작전이었다. 각자 최선을 다하라는 말 따위에 무슨 중요한 전략이 담겼겠는가? 지면 끝장이라는 쌍팔년도에나 통할 법한 근성 주입 이외에 내가 한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선수들은 잘 따라주었다.

고맙고 미안한 일이다.

만약 내가 다그치지만 않았다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지원받은 직원들을 다시 돌려보내기라도 했다면, 상황은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패배한 영국 선수들처럼 웃으며 다음 해를 기약하고 대회를 즐겼을 터였다.

그러나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우승이 아니라면 우리 팀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그건 지금의 팀이 아닐 테니까.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세요. 어차피 내일 경기입니다. 지금 상대 선수들의 주행을 봐도 우리가 캐치해서 적용할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졸리면 잠깐 의자에 기대서 잠도 자고요.”

“그래도…….”

“어차피 오늘 밤도 다들 못 주무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다른 경기를 집중해서 보는 선수들에게 나는 잠깐이나마 쪽잠을 권했다.

나를 비롯해 다른 선수들도 모두 어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마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은 승리로 잠시 긴장이 풀린 지금이 아니면 또 뜬눈으로 밤을 새울 터였다.

“이거 덮으세요.”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또 어디선가 급하게 사 온 담요들이 하나씩 선수들의 다리에 덮이자 난로의 열기와 담요의 포근함으로 그렇게 선수들은 하나둘 단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받아 든 담요를 다른 선수에게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단주님, 어디 가세요?”

“잠시 이야기를 나눠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오늘 일어난 이 지저분한 일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할 사람이 있다.

* * *

“이쪽으로 오시죠.”

하시모토 부장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민호를 발견하고 인사도 생략한 채 행사장 내부에 마련된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을 비워주세요. 그리고 제 지시가 있기 전까지 아무도 들이면 안 됩니다.”

하시모토 부장이 총괄하는 대회였다. 그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일어난 스탭들이 사라지자 자리에 앉기를 권했으나 민호는 이미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상태였다.

“앉으시죠.”

되려 앉기를 권한 쪽은 다리를 꼬고 앉은 민호였다.

가시방석.

하시모토 부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함을 그대로 얼굴에 내비쳤다.

‘사죄한다면 공식적으로 다미야에서 편파 진행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꼴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알고 온 김민호 선수에게 끝까지 잡아뗄 명분도 없다.’

회사와 직원은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평생직장이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고 하나 최소한 불혹을 넘어가는 하시모토 부장에게 다미야의 존재는 그러했다.

젊은 날의 열정을 바쳤다.

일밖에 모른다며 매번 섭섭하다는 말을 꺼냈던 아내와 딸에게도 직장생활이 다 그렇다는 변명으로 머쓱하게 웃어넘긴 세월이 벌써 20년이었다.

신념과 회사를 저울질하는 이 순간이 하시모토 부장에게는 그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제가 부탁드린 두 가지 요청이 그리 어려우셨습니까?”

“아닙니다…….”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번 대회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 최대한 다미야의 행보를 방해할 생각입니다. 아니, 지금 마음 같아서는 문을 닫게 하고 싶군요.”

“…….”

“일개 미니카 프로팀의 구단주 주제에 너무 건방진 말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분명 그러했다.

개인의 힘은 미약하다.

게다가 기껏해야 이제 막 서른 중반을 넘은 바다 건너 타국에 있는 사내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체급이 아니었다.

후원받는 기업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역시 가능성이 적었다.

다른 기업도 아니고 세계적인 기업인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이다. 이 장난감 경주 때문에 매출이 잘 나오는 일본에 굳이 대립각을 세울 명분을 만들 정도로 경솔한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미야는 그렇지 못했다.’

어린아이 장난처럼 유치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세계적인 완구기업의 타이틀을 달고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불편했지만, 안타깝게도 김민호 선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대답 없이 점점 더 복잡한 표정이 되어가는 하시모토 부장을 무시한 채 민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미니카의 인기는 오롯이 제 덕분입니다. 후원을 받고 딸린 식구도 많은지라 제한적으로 매스컴에 나오긴 했지만 지금 제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성황리에 대회가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호의 오만한 발언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 사진 한 장 때문에 미니카에 관련된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저는 내일 준결승을 치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할 생각입니다. 두 손에 미니카를 꽉 쥐고서 말이죠. 그리고 결승에는 나가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각종 언론매체와 너튜버들의 인터뷰를 빠짐없이 진행할 겁니다.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까지도요.”

“김민호 선수!”

‘정말 그렇게 한다면 미니카 사업은 돌이킬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하시모토 부장에게 이보다 더 무서운 협박은 없었다.

김민호 선수가 트랙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환호성이 터지고 박수가 쏟아질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그런 극적인 쇼(?)를 하고 결승에 불참한다면 그 인기의 파급력만큼 비난의 화살이 다미야와 일본팀에게 향할 것이 자명했다.

“이 인기가 사그라들기 전에 티비에 방영할 애니메이션 제작도 빠르게 진행하고 있겠죠? 아마 다미야의 매출 규모를 봤을 때 애니메이션 하나를 제작하려면 꽤 출혈이 클 겁니다. 한국에서 시작되는 비판적인 여론을 잠재울 만한 자금을 더 끌어올 여유 따윈 없을 텐데 걱정입니다. 하핫.”

‘맙소사!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가장 민감한 키를 손에 쥐고 극비 정보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민호를 하시모토 부장은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흔들리는 눈을 들여다본다면 사실대로 실토하는 것과 같았다.

“내일 준비한 더러운 일을 지금 미리 실토하세요. 어차피 위에서 시킨 일이니 거부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드리는 마지막 자비입니다.”

긴 정적 끝에 깊은 한숨을 내쉰 하시모토 부장의 입이 어렵게 열렸다.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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