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직장인은 쉴 수 없다(1)
경기는 스피드트랙의 결승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대한민국 유일한 미니카 프로팀 MM은 유례없는 성적인 스피드트랙, 점핑트랙 동시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접전이 이어졌던 점핑트랙 결승전은 당시 가슴 졸였던 우리와는 다르게 가장 큰 환호성을 받는 명경기가 되었다.
(곧이어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대상 선수들은 시상대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흰색 시상대가 트랙 가운데 준비되고 안내방송이 우리를 찾았다.
짝짝짝!
시상대로 향하는 우리에게 축하의 박수가 쏟아진다.
“시상대는 구단주님이 오르시죠. 1등으로 들어오셨으니까요.”
누군가 대표로 올라가야 하는 시상대. 하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트로피는 손에 쥐어졌지만, 우승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시상대에는 아무도 올라가지 않습니다.”
“네?”
나는 부스에서 시상식을 보고 있던 다른 나라 선수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선수들이 하나둘 그렇게 시상대로 몰려들었다.
“패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우리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팀의 존속.
지금 내가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면 그 목표를 향해 지금껏 달려온 팀원들과 직원들이 했던 노력의 의미가 퇴색될 것만 같았다.
나는 트로피를 시상대에 모인 선수들 중앙으로 가져갔다.
모두의 손이 닿았다.
한 나라의 선수들만 빼고 말이다.
바로 아쉽게 2위로 떨어진 일본 선수들이다. 본인들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아는지 굳게 다문 입술로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분한 표정이었다면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저들도 선택지가 있었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선택했다면 2위로도 당당히 가슴을 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선택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저들은 아마 1등을 하더라도 그리 기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저들을 마음속으로 용서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약하다.
만약 우리에게 미리 결승에 쓰일 트랙을 달려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하고자 이곳에 온 게 아니었으니.
만약 그렇게 부끄러운 승리를 거두더라도 직원들의 안위가 먼저라는 구실 좋은 합리화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신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책임은 저들에게 있지 않았다. 더러운 술수를 쓴 쪽은 따로 있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나는 같이 트로피를 들자 일본 선수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시상대에 김민호 선수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과 같이 트로피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 자랑스럽습니다! 저도 사실 미니카 대회 중계를 처음 맡았을때 이렇게 박진감 넘치고 감동적인 경기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미야4WD세계레이싱대회 2023년 우승팀은 대한민국이지만 참여한 모든 팀이 그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대회는 끝났다.
그러나 그곳에 패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구단주님! 이번 승리의 주역이 되셨는데 지금 심정이 어떤가요!)
(선수들과 직원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특별히 지시한 작전은 있었나요?)
(없습니다. 선수들의 실력을 믿었습니다.)
“에이, 재미없게 저게 뭐야. 멘트 좀 준비해 가지.”
“그러게 말이야.”
“어쭈? 안 들린다고 욕을 해?”
팍
“형!”
나는 방에 누워 티비로 내가 나온 인터뷰를 보던 철진이와 상진이에게 선물로 사 온 과자를 던졌다.
“언제 왔어요?”
“방금. 원래 하루 더 있으려고 했는데 회장님이 태워주셨어.”
처음 가본 일본 여행이었다.
느긋하게 하루 정도는 관광할 작정이었으나 회장님이 오늘 자로 돌아갈 비행기에 타라 권해 주셨다. 일부러 권해 주셨는데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마지못해 반강제적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야. 누렁이 밥 주고 화장실을 갈아주라고 했지 누가 여기 눌러앉아 살라 그랬어?”
오랜만에 돌아온 문방구는 가관이었다. 문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열어두고 있었는지 흙먼지가 문방구 안까지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멋대로 꺼내먹은 과자봉지들이 방구석에 가득 쌓여 있었다.
“아니, 오기 전에 치우려고 했지…….”
“야옹!”
“뭐, 뭐야? 누렁이가 왜 이래?”
오랜만에 만난 게 반가웠는지 한참 종아리에 몸을 비비던 누렁이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이전의 누렁이가 아니었다.
컸다.
크고 뚱뚱했다.
흡사 너구리로 보일 정도로 포동포동한 모습이었다. 특유의 털 색이 아니었으면 절대 알아보지 못할 몸매다.
“야! 밥을 얼마나…….”
많이 먹었으니 찐다. 당연한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예상대로 누렁이의 밥그릇에는 바닥에 굴러떨어질 정도로 가득 사료가 쌓여 있었다.
“야! 저건 나도 다 못 먹겠다!”
철진이를 믿었던 내가 멍청했다. 상진이는 사우디 사업 건으로 바빠 보였기에 조금 찜찜해도 어쩔 수 없이 철진이에게 누렁이를 부탁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쓰레기장이 된 방과 비대해진 누렁이였다.
“일단 청소부터 하자. 상진이 너는 쓰레기통 가져오고 철진이 너는 빗자루로 문방구 좀 쓸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집을 비운 지 고작 3일인데 문방구는 예전 모습을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탁탁.
나는 털이 다 빠져 빈약해진 먼지털이를 들고 그사이 문방구에 쌓인 먼지를 털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타국까지 다녀온 피로 때문에 당장 눈을 감고 싶었으나 그 피로는 문방구의 문을 열면서 모두 씻은 듯 사라졌다.
낡고 빛바랜 학용품과 장난감, 그리고 불량식품까지.
먼지털이는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는 추억 속 물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용도로 바뀌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물건이 빈다.
미니카 상자, 딱지, 그리고 저 구석에 있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로보트. 모두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 없는 동안 누가 왔었어?”
“어? 왔었지. 무릅 형도 오고 형 예전 직장 동료? 여하튼 그 사람도 왔었네. 물건 판 돈은 저기 카운터에 넣어놨어.”
고작 두 명이 온 것치고는 꽤 괜찮은 매출이다.
직장 동료라 함은 아마 전 직장의 이 팀장님이다. 전부터 아이들에게 줄 장난감을 사러 가겠다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철진이 네가 계산해 줬어?”
“응.”
“누군지 알아보진 않디?”
“조금 긴장하는 눈치던데?”
“그래. 나 대신 웬 건달이 앉아 있었으니.”
“우씨!”
앞일이 어찌 될지 몰라 미니카 프로팀을 맡았다는 말도 하지 못했었다. 직장 동료라는 접점이 끊어졌음에도 잊지 않고 찾아준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늦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담은 문자를 한 통씩 보낸 뒤 우리 셋은 평상에 앉아 조촐한 축하파티를 열었다.
어느덧 우리 문방구의 파티에는 술이 빠진 지 오래다.
안주는 아풀러와 괴돌이가 대신했다. 술도 소주와 맥주 대신 꽝꽝 언 빠삐우오렌지가 사람 수대로 놓였다.
“이제 당분간은 바쁘겠네요?”
“왜? 다음 대회는 내년인데?”
“우승하고 왔으니 여기저기 얼굴을 팔아야지.”
전쟁에서 이겼으니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다. 앞으로 한두 달은 전보다 더 빽빽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차재훈 부장에게서 당장 내일부터 있을 인터뷰 시간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그럼 놀 시간도 별로 없겠네.”
“아니. 난 다음 달부터 오전 출근만 할 거야.”
두 형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설명이 필요한 모양이다.
“지금부터 할 일은 내가 바쁘면 안 되거든.”
* * *
MM 프로팀의 회의실.
일본 출장 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다들 모이셨나요?”
일요일이 대회 마지막 날이었으니 기껏해야 월요일 하루를 쉬고 온 셈이다. 그렇게 하루를 쉬고 와 각종 광고와 언론 인터뷰를 하느라 나를 포함한 선수들 모두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주말과 평일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강행군을 한 이유는 하나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최대한 빨리 맞자는 내 의견이 십분 반영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제를 마지막으로 예정된 일정들을 모두 끝냈다.
그 때문에 회의실에 모인 선수들과 직원들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 사실상 오늘부터는 소위 말하는 월급루팡이 되어도 아무도 탓하거나 원망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들이 쉬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대회와 관련된 일정도 모두 끝났고 이제 우리 팀은 3년을 벌었습니다. 우리는 그 3년 동안 무얼 해야 할까요?”
“…….”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간판부터 떡하니 미니카 프로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미니카 대회 준비 말고 따로 무얼 해야 할지 물으니 선뜻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는 모양이다.
“미니카 대회는 1년에 한 번 있습니다. 대회 준비야 지금처럼 한두 달 정도 걸릴 테고 나머지 열 달이 빕니다. 마냥 놀기에는 아깝지 않습니까?”
눈치 빠른 몇몇이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자료를 한번 보시죠.”
나는 빔프로젝터에 PPT 파일 하나를 띄웠다.
「MM 미니카 판매 사업계획서」
“구단주님, 이 사업은 불가능합니다!”
제목을 보자마자 차재훈 부장의 반대 의견이 튀어나왔다.
“미니카는 다미야에서 판매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판매까지 병행한다고 해도 기존 판매자들과 경쟁하려면 결국 출혈 경쟁이 불가피합니다.”
분석은 완벽했다.
대한민국은 유통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싸고 보잘것없는 물건도 최소한 도매와 소매까지 3번 이상 손을 거쳐야 고객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
미니카는 지금 우리 MM팀의 우승으로 한껏 인기가 올랐다 하더라도 그 수요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안정적인 판매 루트로 유통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신규 사업자가 파고들 틈 따위는 없다.
방법은 한 가지다.
기존 사업자가 망할 때까지 출혈 판매를 하는 것이다.
총알이 많은 쪽이 이기는 단순무식하면서도 확실한 작전. 상도 따위는 이미 고려할 상황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프로팀의 자금이 그리 녹녹치 않다는 점이었다.
“미니카를 팔겠다고 했지 다미야 미니카를 팔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PPT를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미니카를 만들 겁니다. 새로운 규격과 디자인, 구동 방식으로요. 이미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국내 완구업체에서 애니메이션 사업과 동시에 진행한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급하게 노트북으로 검색해 보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뭐 실패한 이유를 들라 하면 수도 없이 나열될 겁니다.”
아류작의 딱지를 벗지 못했다.
제작비의 문제로 애니메이션의 퀄러티도 너무 낮았다.
홍보도 부진했고 제품도 그리 특색 있지 못했다.
인터넷에 그 원인을 검색하면 너무도 상세하게 분석된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네?”
“오답노트가 있는데 우리가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아!”
“3년은 너무 짧습니다. 퇴직은 이름 석 자가 기억나지 않을 때 받을 작정입니다. 우리는 완구산업에 뛰어듭니다.”
황희는 천수를 다할 때가 되어서야 사직을 윤허 받을 수 있었다.
저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