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76화 (76/151)

#76. 직장인은 쉴 수 없다(2)

‘이게 도대체…….’

차재훈 부장은 프린트한 PPT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과 선수들도 마찬가지.

민호가 빠져나간 회의실에는 한동안 A4용지를 넘기는 소리 이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기발하고 과감하다. 판을 엎고 다시 가자는 말인가?’

PPT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미니카를 새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하루 만에 준비했다고 했지만, 그 자료는 실로 구체적이고 방대했다.

“그런데 재미있겠네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이것 좀 보세요. 블루투스로 연동해서 폰으로 바퀴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어요. 양쪽으로 2도씩이요.”

“그것뿐이지 않습니까? 차라리 RC카라면 더 자유롭게…….”

차재훈 부장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자유롭게가 아니다. 장난감의 영역을 벗어나 더 어렵고 전문적인 분야가 되어버린다!’

미니카가 유행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저렴하고 쉬웠다.

내가 만든 장난감이 트랙을 달린다는 지극히 단순한 재미를 아이들의 용돈 수준에 맞게 내놓은 것이다.

“만약 트랙에서 달린다면 이 미세한 방향 전환만으로 시간 단축이 가능해요. 그리고 실수를 좀 하더라도 큰 차이가 나지 않고요.”

선수들의 눈에 기대감이 내비쳤다.

사업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순수한 흥미가 끌릴 만큼 매력적인 장난감이란 뜻이었다.

“예상 가격은 2만 원. 아이들의 용돈으로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가격입니다. 블루투스 수신기와 센서를 포함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가격입니다. 요즘 장난감 물가가 어마어마하거든요.”

“재미도 있고 가격도 저렴하다면 사업성이 충분하지 않나요?”

“중요한 부분이 빠졌습니다.”

“중요한 부분이요?”

“이 자료에는 마케팅이 빠져 있습니다.”

‘몇 수 앞을 보시는 분이다. 이런 방대한 자료를 만드시면서 기초적인 부분을 간과하진 않으셨을 것이다.’

차재훈 부장은 민호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케팅은 사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스틱 쪼가리가 광고 하나로 대단한 의료 장비가 되고 그럴싸한 병에 담긴 소금물이 만병통치약으로 변하는 세상.

하다못해 MM 프로팀도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의 마케팅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제가 구단주님께 다녀오겠습니다.”

결국,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속내를 알지 못함을 가장 먼저 깨달은 차재훈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흐아암!”

대충 컵라면으로 때운 점심이 가벼운 식곤증을 불러왔다.

근무 시간은 오후 다섯 시까지, 지금 시각은 두 시 반. 직장인이라면 사무실에 앉아 남은 근무 시간이 까마득함을 원망하고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가방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붙잡을 사람은 더욱이 없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딱히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일을 안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좁힐 수 없는 관계의 거리가 원인이었다.

상사와 부하 직원의 격차를 넘어선 관계다. 아무리 허물없이 지낸다 하더라도 나 혼자 그리 착각할 뿐이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각별함과는 별개로 같은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은 것처럼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한 사이가 바로 사장과 직원이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나는 일을 열심히 할수록 직원들의 능률을 떨어뜨리는 자리에 있었다.

“일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나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를 하며 살집이 두툼해진 누렁이를 안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되찾은 여유는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

논에는 이장님의 이앙기가 바삐 움직이고 할머님들은 봄나물을 뜯으러 가셨는지 통 보이지 않았다.

봄나물?

나는 얼른 폰을 켜서 케톡을 보냈다.

「민호: 오늘 언제 오냐?

철진: 나는 지금 가는 길.

상진: 저도 조금 있다 출발해요.

지환: 저도요.

민호: 빨리 와. 나물 캐러 가자.

철진: ???

민호: 구두 말고 운동화랑 편한 옷 입고와.」

봄이다.

벚꽃이 피고 개나리가 피는 봄. 물론 늦봄이라 벚꽃은 이미 지고 오후가 되면 햇볕이 제법 따가웠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한창 배고플 나이에 봄은 너무나 반가운 계절이었다. 산과 들에 봄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진미를 놓칠 순 없었다.

그렇게 문방구로 하나둘 녀석들이 모이고 나는 예고했던 대로 나물을 캐기 위해 창고에 있던 망태기를 꺼냈다.

“잘 들어. 우리는 딱 두 가지만 노린다. 두릅이랑 죽순이야.”

평생 도시에 살아서 어차피 다른 나물은 눈앞에 있어도 구분하지 못할 놈들이다.

두릅과 죽순은 비교적 허들이 낮은 나물에 속했다. 쓴맛이 없어서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좋아했다. 무엇보다 초고추장만 있다면 소고기 부럽지 않은 진미가 되는 라인업이다. 짐짓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아이들이 달래나 쑥을 같이 캐서 삶기도 했었지만 메인디쉬는 늘 두릅과 죽순이었다.

“이장님! 저희 나물 좀 캐도 될까요?”

“이이! 안 그래도 할매들 다 올라갔응께 가서 같이 캐면 되야.”

이장님은 때가 타서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 듯한 수첩에 우리들의 이름을 적으셨다.

뒷산은 대대로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해 왔다. 명목상 산주는 이장님이 맡았다. 그마저도 새로운 이장이 선출되면 바뀌는 시스템이다. 주인이 따로 있진 않았으나 그때도 지금도 산에 오르려면 이장님의 허락 아닌 허락이 필요했다.

휴대폰도 없어 집에 사람이 들어오지 않으면 모두 후레시를 들고 온 동네에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절부터 있어 온 나름의 전통이다. 산에서 혹시나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만든 일종의 출석부인 셈이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만 어쩐지 이장님의 수첩에 이름이 적히지 않으면 산에 올라가는 기분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장님이 무언가 산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할 준비를 하시는 듯해 나는 얼른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특히 한번 당한(?) 전적이 있는 지환이가 유독 안절부절못했기에 더욱이 오래 있을 수 없었다.

허락도 받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산을 탈 차례다.

“전부 따지 말고 보이는 거에 딱 반만 따. 알겠지?”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많이 가져갈 욕심에 남김없이 따고 나면 두릅나무는 시들고 대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내년, 그리고 내후년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산길을 따라 걸었다.

세 사람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가면 훨씬 효율적이지만 어차피 한두 시간이면 망태기를 가득 찰 것이기에 굳이 그렇게 본격적으로 동선을 정하진 않았다.

“헉헉, 형 그냥 저기 길가에 있는 거 따면 안 돼요?”

가장 먼저 숨이 차서 현실과 타협하려 한 녀석은 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상진이었다. 처음부터 가장 뒤에서 겨우겨우 따라오다 이제는 그것마저 힘에 부친 듯했다.

그 시절도 가끔 마을에 돈을 내고 약초꾼들이 들락거리는 것 이외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산이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발길이 끊겼는지 켜켜이 쌓인 낙엽과 이제 막 봄기운을 타고 자라기 시작한 잡초들 덕분에 눈 덮인 길을 걷는 것처럼 발이 푹푹 빠졌다.

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들이 운동장처럼 뛰어다녔던 이 산길이 평생 등산이나 해봤을까 싶은 상진이에게는 상당히 고난도 코스였다.

“저건 어르신들 거야.”

다들 나이가 칠순이 넘으신 분들이다. 아직 정정하다고는 하나 좁고 험한 산길을 오르실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점점 좁아지고 가팔라지는 길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높이까지 와서야 우리는 채집을 시작했다.

일단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한번 알려주자 녀석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그냥 뽑으면 돼요?”

“아래쪽으로 힘줘서 당기면 똑 하고 부러질 거야.”

상진이가 가장 먼저 죽순을 발견했다.

적당한 크기에 씨알이 굵은 녀석이다. 너무 크면 쓴맛이 나고 너무 작으면 향도 약하고 막상 껍질을 까서 먹을 게 없다.

툭.

“오호!”

상진이가 뽑은 죽순이 새하얀 몸통을 드러냈다.

나머지 두 녀석도 처음 본 죽순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연신 눌러보고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맛있을까?”

“킁킁. 냄새는 그냥 그런데?”

“또 캐러 가자고 보채지나 마라.”

우리야 어쩌다 별미로 먹는다지만 할머님들은 종일 산을 오르신다. 직접 캐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다음 달까지는 언제라도 오늘처럼 산에 올라 나물을 캘 수 있지만 나 또한 등산에는 별 취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봄나물을 먹고 싶다는 충동과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녀석들에게 추억도 만들어 줄 겸 오른 산이다. 봄이 짧아진 요즘, 또 산에 오르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구슬땀을 흘릴 것이 분명했다.

“형! 두릅은 이 정도면 될까?”

“야, 다 들고 가지도 못하겠다. 인제 그만 따!”

망태기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양의 두릅을 바지 주머니와 양손 가득 들고 온 철진이 덕분에 우리는 금방 할당량을 채웠다.

* * *

“누굴 찾는 겨?”

경운기를 몰고 가다 문방구 앞을 기웃거리던 차재훈 부장을 발견한 이장님이 시동을 끄고 물었다.

“여기 문방구 주인분은 지금 안 계십니까?”

“이? 호야 말하는 겨? 나물 캔다고 방금 복지관 얼라들이랑 산에 갔는디?”

“복지관 아이들이랑 나물이요?”

‘구단주님이라면 그럴 만하시다.’

냉철하고 거침없는 성정의 구단주님이시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 이타적인 분이셨다. 퇴근하고 복지관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혹시 어느 산으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여짝에 산이라 해봤자 저 뒷산밖에 없제. 올라갈라고?”

“네. 급한 일이 좀 있습니다.”

엄청난 사업을 시작하자 하고선 달랑 PPT 파일 하나만 남겨 두고 퇴근해 버린 민호를 찾아 당장에 물어볼 것들이 산더미였다.

내일 아침, 민호가 출근하길 기다리기엔 자신을 포함한 직원들과 선수들의 의욕이 버티질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차재훈 과장은 산을 오르기 전에 더 큰 산을 먼저 넘어야 했다.

“이름이 워째되는 겨?”

“아, 차재훈입니다.”

“차… 재훈……. 그래, 등산은 해본 적 있고?”

“네?”

“등산 말여, 등산.”

“최근에 해본 적은 없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군대에서 지겹도록 올랐던 작개지 말고는 마흔이 넘도록 산을 타본 기억이 없었다.

“아니, 산도 모르고 그렇게 바로 올라간다 그러면 쓰나! 이 산은 말여. 예로부터 사람 목숨은 예사로 가져가는 위험한 곳인겨. 나가 이 마을의 이장된 책무로다가 안전하게 관리를 하고 있지만서도 사고는 한순간이니께! 특히 우리 동네 산은 산세가 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한양 가는 사람들도 둘러가는 아주 그 전문적인 코스인겨.”

“네…….”

‘도대체 나는 여기 앉아서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야?’

그냥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나 물어보려 했던 차재훈 과장은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장님의 연설로 일어설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