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80화 (80/151)

#80. 금단의 영역(2)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다.

설렘과 두려움.

내게 첫 공기놀이는 그렇게 다가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오후, 아이들도 모두 집에 가고 없는 이 시간에 누가 손님으로 올까 싶었으나 나는 행여나 들킬까 두려워 문방구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서 공깃돌을 던졌다.

여자아이들의 세계는 실로 잔인하면서 냉정했다. 마지막 손등에 올려 다시 잡을 때까지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프로의 세계.

만약 바닥에 놓인 다른 공깃돌을 건들거나 혹은 던져진 공깃돌을 다시 잡는 데 실패한다면 아무런 소득 없이 상대방에게 턴이 넘어간다.

공수의 전환.

그러나 잔인하게도 수비로 넘어간 사람은 세상 다시없을 엄격한 심판으로 돌변한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짝처럼 붙어 다녔던 친구가 갑자기 도끼눈을 치켜들고 ‘건드렸어!’를 외치게 되는 이 웃지 못할 시스템은 지금껏 수많은 분쟁과 갈등을 낳았다. 무언가 걸린 내기도 아닌데 매번 이 공기놀이를 하다 싸우고 우는 아이들을 참으로 많이 봐왔다.

그만한 재미가 있는 놀이였다. 혼자 하는데도 어려운 코스가 나오면 괜스레 손이 떨리고 안 하던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실수로 점수를 내지 못하면 나이답지 않게 방구석이 꺼져라, 한숨을 쉴 정도로 몰입했으니 말이다.

홀로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는 날이 계속될 무렵, 장마처럼 추적추적 길게 내리던 봄비가 잦아들고 우리는 다시 운동장을 쏘다니는 나날을 보냈다.

“으앙.”

“영미, 왜 울어?”

축구공을 차며 한참 뛰놀던 나는 수돗가에서 울고 있는 영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오빠, 영미 공깃돌에 들어 있던 쇳가루가 이 바람에 다 날려갔대.”

“두 개를 하나로 합치려다가… 으앙!”

봄 날씨는 변덕스럽다. 으레 예고 없는 비가 내리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한다. 방금까지 축구를 하느라 흘린 땀을 말려주던 바람은 작은 쇳가루가 모두 날아가기에 충분한 세기였다.

“민호 형! 빨리 와!”

“어? 응.”

아이들의 보챔에 나는 별다른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하지만 영미의 눈물은 계속 마음에 박혔다.

재미있게 축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만화영화를 보고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도 어딘가 멍한 사람처럼 지냈다.

영미의 눈물은 남자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였다. 그까짓 쇳가루, 자석을 들고 와 운동장을 몇 번 훑으면 한 움큼씩 구할 수 있다. 바람에 조금 날려갔다 해서 서럽게 울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기놀이를 해봤다면, 공깃돌의 메커니즘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리 무심하지 못할 것이다.

공깃돌에 들어가는 재료는 크게 두 가지다.

고추씨와 쇠구슬.

고추씨처럼 납작하고 둥근 모양의 쇳조각이 들어가 있는 공기도 있었고 작은 쇠구슬 알갱이가 들어가 있는 공기도 있었다.

우리 동네 여자아이들은 알갱이 모양을 단연 선호했다. 땅에 떨어졌을 때 반동이 적어 변수가 훨씬 줄어들었다. 손등에 올릴 때도 고추씨보다 부드러운 움직임이 가능했다.

하지만 원한다 해서 알갱이 모양의 공깃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깃돌은 여자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작고 예쁜 통에 담겨 있다. 하트 표, 보석함 등등. 반투명한 재질이라면 적어도 꽃잎 모양인지 아니면 팔각형인지는 알 수 있었으나 안에 들어간 재료는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흔들어봐도 통과 같이 울리는 공깃돌 소리 때문에 안에 무슨 재료가 들어가 있는지 알아차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확률은 반반. 그렇게 뽑기에 성공하더라도 더 큰 시련이 남아 있었다.

공깃돌은 무거울수록 쉬웠다. 배가 불룩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속을 가득 채운 공깃돌을 만들기 위해 그 안에 최소한 세 개의 공깃돌 분의 재료를 희생하기도 했다.

물론 그걸로 끝나기만 한다면 다행이다.

공기놀이에서 사용할 공깃돌은 가위바위보로 정하게 된다. 내 손에 익은 공깃돌이 경기에 쓰일 확률은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줄어들었다.

결국, 3개분, 2개분, 1개분, 고수들이 쓰는 반개분까지. 다양한 무게의 공깃돌을 구비해야 하는데 영미는 이제 막 입문한 터라 3개분이 들어간 공깃돌도 겨우 만든 상태였다.

그 알갱이를 잃어버렸으니 또 얼마나 많은 공깃돌을 사면서 모아야 할지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정말 운이 나쁘다면 계속 고추씨를 뽑아 미니카 한 대값을 쓰고도 만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짤랑짤랑.

나는 손에 쥔 공깃돌을 흔들었다. 이 묵직하면서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공깃돌은 나로서도 적지 않은 용돈을 희생하고 만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욱 소중한 사명이 있었다. 골목대장으로서의 사명이.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밥도 거르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영미의 책상 서랍 한 구석에 종이봉투 하나를 넣어두었다.

쇠 알갱이가 가득 들어간 종이봉투를.

하지만 나는 그 후로도 한동안 은밀한 공기놀이를 즐겼다.

바로 빈 공깃돌로 말이다.

* * *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형, 이제 좀 비슷한 것 같은데. 한판 할까?”

“꼴찌가 빠삐우 사기! 어떻스므니까?”

“그거 좋다!”

탐욕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나를 꺾는 것도 모자라 트로피까지 챙기겠단 심산이다. 저들은 둘. 나는 혼자. 비슷한 실력이라면 두 배로 유리한 경기다. 설사 저들 중 한 명이 꼴찌를 하더라도 이미 뒤가 구린 거래가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 하자.”

우리는 평상 가운데 모여 앉았다.

“가위바위보!”

첫 번째 주자는 나였다.

후두둑.

힘없이 던져진 공깃돌이 모두 가운데 모여버렸다.

“푸하하! 형! 한 개씩 집어야 하는데 이렇게 모아두면 어떡해? 이번에 한점도 못 먹겠네.”

철진이의 놀림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대방과 대결이라고는 하나, 미니카와 다를 게 없다. 결국, 차례가 돌아오면 나와 공깃돌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꽈아아악.

나는 오른손에 온 힘을 집중시켰다.

미세한 잔떨림이 생길 정도로 온 힘을 다한 손은 핏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왔다.

“뭐, 뭘 하려는 거시므니까?”

“잘 봐둬. 이게 형의 공기놀이다.”

팍. 촤륵.

내 공기가 시작되자 두 녀석의 놀림은 없어졌다. 그저 두 눈을 크게 뜨고 절도 있게 움직이는 공깃돌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스므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스므니다.”

정답이다.

나는 시간을 멈췄다.

바닥에 뿌려진 공깃돌을 잡기 바로 직전에.

영미에게 아낌없이 쇠 알갱이를 전해주고 남은 속이 빈 공깃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써보려고 모래를 넣거나 혹은 자석으로 쇳가루를 모아서 넣기도 해봤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처음 공깃돌을 열다 보니 이빨로 깨물어 여는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빨로 씹듯이 여는 바람에 휘어진 공깃돌 뚜껑은 번번이 열려 모래를 토해냈다.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공깃돌을 모두 비우고 던지는 것이다.

그 당시 여자아이 중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난이도였다. 또래에 적수가 없어 매번 페널티를 안고 공기를 했던 예린이조차 반만 넣은 공기를 썼으니까.

속이 빈 공깃돌은 애초에 공깃돌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플라스틱 덩어리였다.

조금만 힘을 줘서 던지면 저 티비장 아래까지 굴러 들어갔고 살짝만 잘못 집으면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렇게 밤마다 빈 공깃돌로 홀로 싸워온 날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마침내 해답을 찾아냈다.

바로 시간을 멈추는 것이다.

잔뜩 힘을 준 오른손은 공기가 위로 던져진 순간 공깃돌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마치 정권을 찌르듯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손은 마치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쎄액.

그리고 빠르게 돌아가던 시간은 이내 멈추게 된다. 바닥에 놓인 공깃돌의 바로 앞에서.

뚝.

손을 내지를 때 썼던 근육은 그 짧은 순간 온 힘을 다해 멈추는 데 쓰인다. 권투의 잽처럼 힘을 빼고 휘두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멈춘 손은 다시 원래의 시간을 되찾는다.

하늘로 쏘아진 공깃돌이 미처, 다 올라가기도 전에 이미 바닥의 공깃돌에 도착한 손은 극한의 여유를 가진다.

그리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정해진 개수를 집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말이다.

촤륵.

“5점.”

5점, 10점, 15점. 점수는 계속 올라갔다. 그리고 땀범벅이 되어서 팔에 힘이 슬슬 풀려갈 때가 되어서야 나의 질주는 겨우 멈췄다.

“자, 48점. 이제 너희들 차례야.”

“난 형이 어떻게 하는지 알았어.”

“오호. 그래?”

철진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고 팔을 걷었다. 흡사 보디빌더의 팔뚝처럼 두껍고 갈라진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흐아아압!”

기합이 가득 들어간 철진의 손이 그대로 공깃돌을 향해 쏘아졌다.

투두둑.

“아!”

철진이 내지른 손은 제때 멈추지 못했다. 바닥을 추하게 훑으며 밀려 나간 손이 공깃돌을 모두 평상 밑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한 번 보고 흉내가 가능한 기술이었다면 그렇게 오랜 수련을 할 필요도 없었다. 눈썰미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숙련도의 차원이 달랐다.

승부는 허무하게 끝났다.

겨우겨우 1점을 낸 지환이가 2등, 그리고 철진이가 당연히 꼴찌였다.

“그런데 너 800원밖에 없잖아.”

공짜 빠삐우를 먹을 생각에 신이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냉동고로 향하다 문득 달력에 적힌 초라한 철진의 남은 용돈이 떠올랐다.

“지환이가 빌려주기로 했어.”

“지금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신용이 쌓여 있다고 생각합니까?”

“야! 약속했잖아! 구두계약도 엄연히…….”

“구두계약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증인이나 녹취 증거가 필요합니다.”

빛보다 빠른 배신이다.

갑자기 발음이 또박또박해진 지환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이 되어 철진을 쏘아붙였다.

대의 없는 봉기가 덧없이 실패로 끝난 역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저 둘의 야합은 모래 위에 쓰인 글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4월 21일

조철진: 3,300원 -> 800원 -> -2,200원」

“처음이니까 이자는 안 붙일게.”

승리의 트로피 대신 주황색 빠삐우를 거머쥔 나는 두 녀석과 평상에 반쯤 누워 살랑이는 바람으로 땀을 식혔다.

“참! 누렁이 병원!”

공기놀이에 집중하느라 잊을 뻔했다.

“지금 몇 시야?”

“5시 10분이므니다.”

“바로 가면 되겠다.”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와 느긋하게 낮잠을 자고 있던 누렁이를 안아 이동장에 넣었다.

“너희들도 오늘은 일찍… 뭐야?”

누렁이가 든 무거운 이동장과 선물로 줄 공깃돌과 옷 갈아 입히기를 양손 가득 들고나왔더니 평상에 두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형! 가게 문 잠그고 빨리 타!”

“아.”

두 녀석은 어느새 내 차 곁에 서 있었다. 통화했을 때 지었던 그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기어코 간호사와 수의사를 직접 만나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담긴 어필이었다.

“어휴. 그래. 같이 가자.”

서둘러 출발해도 아슬아슬하게 예약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저 둘과 실랑이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

내 작고 오래된 경차는 오늘도 나이에 맞지 않는 무리한 운행을 할 운명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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