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신의 영역(1)
“흠흠.”
“뭐 선보러 왔어? 왜 너희들이 옷매무새를 다듬냐?”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며 연신 꽃단장을 하는 두 녀석에게 핀잔을 줬지만, 두 녀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쇼핑몰에 도착한 우리는 지금 동물병원으로 향하는 중이다.
선물로 꽃다발이라도 사서 가자는 주책맞은 철진이의 억지를 뜯어말리는 데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한 탓에 정말 빠듯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드르륵.
“늦어서 죄송합니다. 6시에 예약한 누렁입니다.”
“아, 누렁이 아버님, 어서 오세요. 아니에요! 딱 맞춰 오셨어요. 잠시 앉아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진료실에는 아직 다른 환자의 치료가 한창인 듯했다. 5분 정도 늦은 미안함이 조금 가신다.
우리는 나란히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사람은 셋이 왔으나 이 중에 누렁이를 걱정해서 온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두 녀석은 이 신성한 병원에 고작 예쁜 수의사와 간호사가 있다는, 지극히 불순한 목적을 품고 따라왔으니.
“그런데 정말 형이랑 아는 사이야?”
불투명 처리된 유리창 너머 혹시 얼굴이 보일까 봐 미어캣처럼 연신 고개를 뻣뻣이 들고 기웃거리던 철진이 물었다.
“그래. 초등학교 때지만.”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전파상 아저씨의 딸이 내가 다니는 동물병원의 수의사분일 줄이야!
하지만 30년이 다 되어 가는 너무나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전파상집 딸, 아니, 설란이는 우리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한 아이였다. 점차 줄어가는 학생에 마지막 졸업생이었던 나를 끝으로 정든 학교는 문을 닫았고 아이들은 모두 아랫마을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 다른 아이들과의 연락도 자연스럽게 끊겼고 설란이 역시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었다.
별명은 공주. 우리 동네에서 설란이는 그렇게 불렸다.
예쁘장한 얼굴과 딸바보였던 전파상 아저씨 덕분에 늘 비싼 옷과 장난감이 가득했고 워낙 숫기가 없던 탓에 무슨 말만 하면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이 발그레해지기 일쑤였다. 그 모습이 공주라는 별명과 너무나 잘 어울려 우리도 이름 대신 공주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렀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오래된 기억이다.
나도, 설란이도 그때의 모습이 아니기에 서로 알아보지 못했듯 지금 빛바랜 추억을 들먹인다 한들 행여나 껄떡거리는 추태로 보일까 두려웠다.
누렁이의 비정상적인 뱃살을 걱정해서 오긴 했으나 어색한 만남인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누렁이 들어오세요!”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사이 진료실에서 설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동장을 들고 일어섰다. 우리는? 나는 태연하게 같이 들어갈 준비를 하는 두 녀석을 막아섰다.
“억지 좀 부리지 마. 민폐라니까!”
“우리도 들어갈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지.”
결연한 의지는 좀처럼 꺾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렁이 아버님?”
“아, 네!”
진료실로 들어가면서도 몇 번이나 녀석들을 밀쳤지만 끝내 고양이 하나와 장정 셋이 좁은 진료실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아, 누렁이 삼촌들입니다. 걱정돼서 같이… 악!”
나는 아직 인사도 나누지 않은 상황에서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하는 철진이의 발을 힘껏 밟았다.
“죄송합니다. 계속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워서요.”
“호호호. 우선 앉으세요.”
다행히 우리 꼴이 제법 우스웠는지 설란이는 크게 웃으며 안기를 권했다.
“그날은 정말 미안해. 나도 원래 그렇게 취할 정도로는 안 마시는데. 참, 아빠한테 이야기는 들었지? 민호 오빠가 내 병원에 다닐 줄 꿈에도 몰랐지 뭐야! 호호호.”
설란이 먼저 어색한 공기를 깼다. 전처럼 존댓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편하게 대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래.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반갑네.”
사실이었다.
어색함이 사라지고 나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질 반가움만 남았다. 이장님께 여쭙는다면 그때 그 시절 아이들 몇 명의 연락처는 쉽게 알아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나에게 소중한 추억이 그 아이들에게도 같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다. 내가 기대한 반가움이 그 아이들에게 불편한 연락이 될까 싶어 이곳에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 마주치겠지 하는 다소 느긋한 바람으로 지낼 작정이었다.
그렇게 만난 첫 번째 인연은 다행히 서로를 잊지 않았다.
“난 계속 여기 살았어. 대학도 근처로 다니고 병원도 여기에 열었지 뭐야? 민호 오빠는 중간에 서울로 갔으니까 내가 진짜 토박이지! 지숙이도 바로 이 근처 옷가게에서 일했는데 재작년에 쇼핑몰 한다면서 부산으로 내려간 뒤에는 통 연락이 없네? 참, 오빠, 지숙이 알지?”
“알지. 고추밭 크게 하던 집이잖아.”
“저번에 재개발 이야기 나오면서 땅값 한창 오를 때 팔고 아저씨랑 아줌마는 저 아래 아파트 살아. 그리고…….”
뜻밖의 소식과 옛이야기가 뒤섞인 대화들이 중구난방으로 튀었다. 25년 가까이 지난 세월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는 두 녀석의 눈이 또 게슴츠레하게 변하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그간 쌓였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설란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몰랐던, 그리고 설란이가 알려주고 싶었던 마을의 편린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런데 오늘 왜 온 거야? 누렁이 어디 아파?”
설란이는 그렇게 한참 지난 이야기를 하다 이동장에서 들리는 코를 고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는지 한참 만에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다른 게 아니라 누렁이가 갑자기 살이 너무 쪄서. 혹시나 해서 왔어.”
“원래 길냥이들은 집에 오면 조금 살이 붙긴 해.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니, 그래도 너무 쪄서…….”
누렁이의 실체를 보여줘야 할 타이밍이다. 이동장에 꽉 끼여 나오지 않는 누렁이를 철진이와 지환이까지 세 명이 온 힘을 다해 씨름한 뒤 힘겹게 꺼내 진료대 위에 올릴 수 있었다.
“야옹!”
갑자기 낯선 곳에 꺼내진 누렁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원래 성격이 느긋한 것인지 다행히 다른 고양이들처럼 발톱을 내거나 하악질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료대 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익숙한 얼굴들을 확인하고는 다시 철퍼덕 누워버렸다.
“누렁이 맞아? 새로 들인 애가 아니고?”
설란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누렁이를 이리저리 만졌다.
“밥양을 잘못 조절해서 이렇게 쪘어.”
“아무리 그래도…….”
“식이요법을 하긴 하는데 자꾸 식탐이 강해져서 쉽지 않네.”
나는 철진이를 흘겨봤다. 이놈이 원흉이다. 도대체 사료를 어떻게 먹인 건지 한 번 밥을 주면 원하는 양이 그릇에 부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 투쟁에 못 이겨 밥을 주고 나면 또 살이 찌는 악순환을 시작한 놈이 바로 철진이었다.
“이렇게 빨리 살찌면 고양이한테는 안 좋아. 일단 사료는 조금씩 줄이고 저칼로리 사료로 바꿔야 해. 내가 추천하는 건 이거. 마트에도 파니까 오늘 사가. 그래도 딱히 아픈 곳은 없어 보이네.”
눈과 입, 그리고 여기저기 만져보고 냄새까지 맡아보던 설란이의 진단 결과는 다행히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고마워. 이건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어머! 공깃돌이네!”
종이로 된 옷 갈아입히기는 서둘러 탄 철진이와 지환이가 깔고 앉는 바람에 꾸깃꾸깃해져 차마 들고 오지 못했다. 아쉽지만 공깃돌이 들어 있는 작은 보석함 두 개가 오늘 선물의 전부였다.
“나 이거 진짜 잘했는데.”
촤륵.
감회가 새로웠는지 보석함을 열어 공깃돌을 진료대에 뿌린 설란이는 그대로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가볍게 던져진 공깃돌의 움직임은 우리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이건!”
“네? 무슨 문제라도?”
철진이 놀라 일어서며 외치는 바람에 설란이 공기를 멈추고 물었다.
“방금 그건 어떻게 하는 거므니까?”
“공기놀이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으시면…….”
“천재공기야.”
“천재공기?”
공기놀이는 총 3단계가 있다.
입문자가 하는 바보 공기, 어느 정도 손에 익게 되면 하는 그냥 공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상급 선수들이 하는 천재공기다.
천재공기.
기존에 하나의 돌을 던져 바닥에 놓인 공깃돌을 잡는 개수를 늘려가는 일반 공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나가 아닌 손에 쥔 모든 공깃돌을 하늘로 던진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공깃돌을 집고 떨어지는 돌까지 모두 잡아내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천재공기는 감히 아무나 흉내 내지 못했다. 점수를 내는 마지막 단계까지 변수가 너무나 많았고 특히 손이 작은 아이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예였다.
이른바 신의 영역.
우리는 지금 그 영역에 들어선 고수를 만난 것이다.
꼼수(?)를 사용한다면 어설프게 흉내를 내는 아이가 더러 있었다. 돌을 던질 때 눈높이까지 던지지 않고 낮게 던지면 돌이 하늘에서 미처 퍼지기 전에 잡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꼼수에 불과했다.
공식 경기에서는 철저하게 눈높이 이상 돌을 띄워야만 심판의 반칙 선언을 면할 수 있었다. 단언컨대 우리 마을에서 천재공기를 할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또래 중 가장 공기놀이를 잘했던 예린이도 공식 경기중에 천재공기를 성공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늘 조용히 언니들을 따라다니던 공주가 수십 년 만에 쥔 공깃돌로 천재공기를 눈앞에서 선보였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나는 등에 식은땀이 한줄기 흘렀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그 자랑의 대상은 늘 자신과 연관되어야 했다. 유치한 자랑 배틀이 싸움으로 번진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남자아이들에게 미니카와 딱지가 그러하듯 여자아이들에게 공기놀이는 곧 신분의 격차를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였다.
공기놀이를 잘하는 아이는 나이와 관계없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런 아이들에게 짐짓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노하우를 알려주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행복이었으리라.
그러나 공주는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예리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주위에 자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검을 갈았던 것이다.
“이러면 민호 형보다 더 잘하는 거 아니야?”
“어? 오빠도 공기놀이 할 줄 알아요?”
“민호 형이 우리 중에 가장 잘하므니다.”
“야, 무슨. 그냥 잠깐 해 본거지.”
부끄러웠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이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 해도 수십 년 만에 잡은 공깃돌로 천재공기를 펼치는 고수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맞아! 오빠는 못 하는 게 없었어! 어때? 한 판 해서 진 쪽이 밥 사기! 마침 우리도 퇴근 시간이야.”
“좋아요!”
진료실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간호사까지 동조하자 갑자기 내기 공기를 해야 할 분위기가 되었다.
“그래도 누렁이가 있는데.”
“여기서 20분 거리라 금방 놓고 오면 되므니다!”
사면초가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생사결을 펼치게 되었다. 그것도 재야의 은둔 고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