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84화 (84/151)

#84. 될 일과 되지 않을 일(1)

“이건 저희 MM 프로팀에서 극비리에 추진하는 완구사업입니다.”

「MM 미니카 판매 사업계획서」

민호가 이 PPT 자료를 구단 내에서 발표한 지 불과 일주일이 조금 지났지만, 자료의 양은 세 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처음 작성된 목차 내에서 굵직한 항목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그 아래로 붙은 세부 항목들과 타당성 검토자료들은 민호의 계획서가 틀리지 않았음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19명이 달라붙어 면밀하게 검토했으나 단 한 항목도 수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존대하면서도 미묘하게 속을 긁어대는 말을 계속해대는 탓에 하시모토 부장의 질문에도 날이 섰다.

“아직 첫 장도 펼치지 않으셨습니다. 표지만 보고 결정될 사안이었다면 굳이 얼굴 보고 만날 시간 낭비는 없었습니다.”

‘고작 대회에 우승 한 번 한 것 가지고 완구사업을 하겠다고? 민호 선수의 독단인가?’

더러 보아왔다.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이루고 과한 자신감으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젊은 사업가들을 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았다.

촤륵.

읽어보라 권했으니 읽는 척이라도 해주는 것이 비지니스매너다. 답이 정해져 있더라도 면전에 대고 사람을 무시하는 처사는 적어도 일본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시모토 부장은 족히 200장은 넘어 보이는 두꺼운 파일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교묘하군. 독자 규격으로 후에 있을 저작권 분쟁까지 염두에 두겠다는 심산인가? 오호, 앞바퀴를 움직인다고? 그렇지. 블루투스 연결이라면 따로 조이스틱 없이 스마트폰으로 조작이 가능하니까. 크게 가격이 올라가지 않으면서 재미를 잡아낸다. 시장성은?’

“흥미가 생기시나 봅니다?”

“아, 제가 너무 집중해서 봤군요.”

그 두꺼웠던 사업계획서는 어느덧 절반 가까이 넘겨져 있었다. 대충 보는 척이나 하려고 뒤적거리다 저도 모르게 다시 첫 장으로 돌아와 앞에 손님이 앉아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집중해서 읽어버렸다.

“외부인에게 보여주는 건 처음입니다. 참, 이제 우리 회사로 오실 예정이시니 외부인이라고 하기도 어렵겠군요.”

“무릅니다. 제가 이 계획서대로 당장 내일부터 개발에 돌입한다면 아마 그쪽보다 더 빨리 출시가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극비자료라 하셨으니 아직 특허신청도 안 되어 있을 테고, 이건 먼저 잡는 쪽이 임자 아닙니까?”

호록.

우위에 섰다 판단한 하시모토 부장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안일했다.

고작 몇 푼 더 쥐여주는 조건으로 회사를 옮기리라 오판한 상대는 되려 경쟁사에게 아이디어를 아무 대가 없이 상납한 꼴이 되었다.

‘의욕이 앞선 신생회사가 일으키는 흔한 실수지. 그래도 뒷배가 삼정과 대현인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줄이야.’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차재훈 부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듣고도 너무나 느긋한 모습이었다. 마치 자신이 했던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이.

“부서가 바뀌었더군요.”

“네?”

“제가 알기로는 미니4WD부서셨는데 지금 받은 명함에는 유통지원부서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미야의 조직도로 볼 때 한직 중의 한직 아닙니까? 세계대회까지 성공리에 마무리했지만 돌아오는 건 보복성 인사조치라……. 하핫. 이거 위에 단단히 밉보였나 봅니다.”

“뒷조사까지 하셨습니까?”

“저희는 그쪽 회사처럼 뒤가 구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저희 구단주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요. 대회를 총괄하시고서 부서가 바뀌어 넘겨짚었을 뿐입니다. 정답인가 보군요.”

뿌득.

하시모토 부장의 입안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치부를 뒤집어 곪은 상처를 후벼팠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당장에라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는 다미야에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고작 그런 일로 회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차재훈 부장께서는 예의라는 것을 조금 갖추셔야 할 듯합니다. 스카우트 제의를 하러 오셨다면서 이리 경우 없는 말씀을 내뱉으시면 차라리 이메일을 주고받는 편이 더 결과가 좋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이리 척을 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지요.”

“저희 구단주님께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뜻한 바를 이루지 않았던 법이 없으셨습니다. 그쪽은 반드시 제가 가져온 계약서에 사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 뜻하는 바가 오늘 깨지겠군요. 민호 선수가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나, 이리 일 처리 방식이 막무가내 일 줄은 몰랐습니다.”

“김민호 구단주님입니다. 그쪽이 하대하면서 부를 직책이 아니십니다.”

‘허. 이토록 오만하고 늑대 같은 자가 민호 선수의 말만 나오면 무슨 광신도처럼 돌변하는군.’

짧은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서로 얼굴에 침만 뱉지 않았을 뿐, 이보다 더 최악의 공적인 미팅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는 냉랭하다 못해 얼어붙은 자리였다.

더 이상 서로 주고받을 말이 없다는 걸 인지한 두 사람은 각자 짐을 챙겨 일어났다.

“식사라도 같이 한 끼 하고 싶은데 제가 요즘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아니면 영 입에 맞질 않아서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참, 한국에서 왔는데 커피 한 잔 정도는 대접해 주시겠죠? 아,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출장비는 넉넉히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직원들과 함께 먹을 과자를 좀 사다 보니 과하게 써서 그렇습니다.”

차재훈 부장은 손에 든 과자 봉투를 흔들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두 번째 계약 제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거라고요. 그럼 한국에 오실 때 연락 주세요. 커피도 대접받았으니 다음엔 제가 사겠습니다.”

딸랑.

“도대체 뭐 하는 작자야?”

그렇게 사라진 차재훈 부장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계산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한잔 더 부탁드립니다. 아이스로요.”

하시모토 부장은 넥타이를 아래로 거칠게 당겨 경직되어 있던 목을 이리저리 풀고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빈 커피잔 두 개와 계약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 * *

용이 승천한 호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함을 되찾았다.

“그럼 내가 졌네? 오늘 밥은 내가 살게. 뭐 먹으러 갈까?”

“아니야. 그냥 재미로 한 건데 뭘. 우린 갈게.”

왕좌를 지켰다. 트로피는 애초에 필요치 않은 전투였기에 설란이 제안했던 내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밖에 있는 간호사분까지 합한다면 입이 무려 다섯.

요즘 같은 물가에 밥 한 끼를 먹으려면 두당 만 원이 훌쩍 넘는다. 거기에 두 녀석은 눈치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얻어먹는 주제에 비싼 메뉴를 양껏 시켜 계산서에 예상치를 아득히 뛰어넘는 가격이 찍혀 나올 게 불 보듯 뻔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동생에게 그런 부담을 안길 순 없다.

“밥 먹스므니다! 밥! 배고프므니다!”

“나도 배가 좀 고픈데?”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두 녀석이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과한 어필을 해댔다. 내가 당황하여 말려봤지만 이미 뱃가죽을 쥐고 앓는 소리를 하는 두 녀석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그래. 같이 가! 내가 산다니까?”

거절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 여기 푸드코트에서 간단하게 먹고 가자. 됐지?”

“아니, 그래도…….”

“아니면 그냥 갈 거야.”

나는 설란이에게 일언반구도 허용하지 않았다.

최선이 아닌 차악의 선택. 여기서 차를 타고 나간다면 부담 없는 곳이래 봤자 분식집이나 국밥집이 전부였다. 두 곳 모두 부담 없이 밥 한 끼를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곳도 방심할 수 없다. 바로 철진이와 지환이, 두 녀석의 존재 때문이다.

특히 철진이의 저 곰 같은 덩치는 그냥 유지하는 게 아니었다. 무슨 음식을 먹더라도 3~4인분이 기본. 행여나 입맛에 맞는 요리가 나오면 그 이상도 가능한 위장을 탑재하고 있다.

지환이라고 해서 상황이 별반 나아지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악질에 가까웠다. 호화로운 생활이 몸에 밴 탓인지 매번 음식을 시키면 다 먹지도 못할 양으로 골랐다. 다행히 철진이가 잔반처리를 해주긴 했지만, 머릿수를 아득히 뛰어넘는 가격이 나오는 건 변함없다.

밥을 대접한다 하고 분식집에 가는 건 설란이도 내키지 않을 테니 유일한 대안은 국밥집이다.

차를 타고 10분이면 가는 국밥집은 물론 저렴하다. 그러나 두 녀석이 수육과 순대, 그리고 음료수까지 시켜댄다면 어느 고급 음식점과 비슷한 금액이 나올 터.

나는 차악으로 이곳 푸드코트를 선택했다. 키오스크로 주문하니 인당 메뉴는 하나로 지정될 수밖에 없는 푸드코트야말로 눈치 없는 두 녀석을 어느 정도 봉인할 수 있는 곳이다.

“누렁이도 갑갑할 테니까 얼른 먹고 가자.”

그렇게 우리는 병원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이른 저녁 시간, 이제 막 퇴근해 장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줄지어 우리를 지나쳐 올라갔다.

“그런데 오빠는 공기놀이를 왜 그렇게 잘해? 우리 동네 남자들은 공기놀이 안 했잖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천천히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의 정적이 싫었는지 설란이 내 어깨를 톡톡 치고는 껄끄러운 질문을 던졌다.

차라리 졌음이 옳았을까?

승부욕에 불타올라 이기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뒤가 문제였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차마 방에 숨어서 몰래 연습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할아버지 문방구를 물려받고 혼자 적적해서 가끔 했어.”

“으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다행히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차라리 이 거짓말이 나았다. 서른이 넘은 남자가 홀로 방구석에서 공기놀이나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구질구질하고 처량해 보였지만, 어린 시절의 내 프라이드를 상처 낼 순 없었다.

“아, 저 갑자기 친구랑 약속이 생겼어요.”

“어머?”

“친구가 이 근처로 왔대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1층에 도착해 막 푸드코트에 들어설 무렵, 공교롭게도 간호사분께서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

“아! 저도 가봐야 하므니다.”

“뭐야, 너도? 그렇게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더니.”

“문방구에 중요한 서류를 두고 왔스므니다!”

“그러게 내가 문방구 나올 때 항상 빠진 거 있는지 확인해 보랬잖아. 너희들은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덜렁거리냐? 문방구라 다행이지 어디 카페에 두고 왔어 봐.”

“일단 가보겠스므니다!”

지환이는 내 말도 다 듣지 않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철진 상, 빨리 가므니다.”

“뭐? 나도? 싫어. 배고파 죽겠는데. 혼자 가. 난 이거. 패밀리스페셜돈까스세트랑 짜장면. 형, 뭐 먹을 거야?”

그래도 혼자 가기 불안했는지 철진이를 데려가려 했으나 먹음직스러운 음식 모형 앞에 정신이 팔린 철진이는 너무나 단호했다.

“그럼 철진이는 우리랑 같이 밥 먹고 지환이는 얼른 가. 서류 중요한 거라며?”

“아, 알겠스므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