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85화 (85/151)

#85. 될 일과 되지 않을 일(2)

푸드코트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막 퇴근 시간이 되어 쇼핑 전에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통에 우리 세 사람은 식권을 뽑은 뒤에도 한참 서성이다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 자리는 있었네. 서서 먹어야 하나 했는데.”

“그러게. 잘 먹을게. 괜히 돈 쓰게 만들었네.”

“아니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 정도는 내가 살 수 있지!”

아무리 내기에 이겼다 해도 동생에게 얻어먹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계산대에서도 한사코 내가 사겠다는 걸 설란이가 억지로 카드를 키오스크에 밀어 넣었다.

“참, 넌 푸드코트 처음이지 않냐?”

“어. 그러네.”

연신 두리번거리며 처음 온 티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철진이의 모습에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푸드코트가 처음이라고요? 재벌들은 역시 다르구나.”

“딱히 곱게 자라진 않았는데 의외로 이런 건 또 재벌집 아들내미 같다니까. 쟤 우리 집에 와서 달고나도 해 먹고 된장찌개도 먹고 다 해.”

“그거는요? 멸치볶음! 그거 진짜 안 먹어 봤어요?”

“야, 무슨 00년도 드라마 이야기를 하고 있어.”

“안 먹어 봤어요. 생각해 보니까…….”

“그것 봐! 재벌들은 멸치볶음 같은 거 안 먹을 줄 알았어! 그럼 번데기는요?”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철진이의 먹방 경험담이 되었다. 어릴 적 추억이 쌓인 세월만큼 하고픈 말이 산처럼 있었으나 철진이는 우리와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설란이의 질문에는 단순히 재벌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소외되지 않았으면 하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우우웅.

“밥 나왔다. 얼른 가지고 오자.”

우리가 받은 진동벨은 거의 동시에 울려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겼다.

나는 제육볶음 정식, 그리고 설란이가 고른 산채비빔밥도 푸드코트의 넉넉한 인심으로 푸짐한 양이었는데, 족히 3인분은 될 법한 돈가스와 짜장면까지 시킨 철진이 덕분에 식탁은 빈틈이 없었다.

“이걸 진짜 다 먹어요?”

“또 이상한 오해 하지 마. 재벌 2세들이 다 이렇게 먹는 게 아니고 얘만 이런 거야.”

“잘 먹을게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는 철진이를 시작으로 우리도 허기진 배를 채웠다.

“오늘 잘 먹었어. 다음엔 내가 살게.”

“그래! 다음엔 오빠가 사!”

“오늘 못 먹은 간호사분이랑 지환이도 같이 해서 다음엔 다섯이 같이 먹자. 우리끼리만 먹으니까 미안하네.”

“응? 응…….”

“그럼 조심해서 가!”

주차장에서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나와 철진이, 그리고 누렁이는 차에 올랐다.

즐거운 만남이었다. 누렁이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듣자 무거운 걱정을 벗어 던지고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되었다.

다음번에는 설란이와 괜찮은 삼겹살집이라도 가야겠다. 같이 먹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던 다섯이 함께.

* * *

“좋은 아침입니다. 어? 차재훈 부장님, 벌써 오셨습니까? 내일까지 출장이신데.”

“네. 마침 비행기가 있어서 어제 바로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없어야 할 사람이 떡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에 놀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다들 회의실에 모여 처음 보는 과자로 다과회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잘 진행되셨습니까?”

나는 테이블에 놓인 과자 하나를 집어 먹으며 차재훈 과장에게 물었다.

“말씀대로 욕이 나오기 직전까지 속을 긁어놓긴 했습니다.”

“네, 그거면 됩니다. 연기하느라 어려우셨을 텐데 수고하셨습니다.”

차재훈 부장은 제 몫을 다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그 모난 성격은 사람을 긁어내는 데 아주 특출 난 재능이었다. 매사 무덤덤한 철진이 녀석도 밥맛없는 자식이라는 걸출한 평을 내렸으니 말이다. 물론 당사자에게 이런 칭찬(?)을 할 순 없기에 수고했다는 말만 해줬으나 아마 연기가 아니었음을 본인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그냥 잘 구슬려서 설득하는 편이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하시모토 부장이 없으면 최소한 반년 이상 일정이 늦춰지고 그 결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만큼 위험한 행동도 없습니다.”

간절하다.

하시모토 부장이 다미야에서 미니카 사업을 진행해오면서 축적한 노하우와 인맥들이 꼭 필요했다. 적어도 홍보에 꼭 필요한 애니메이션 제작 루트는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

만약 하시모토 부장을 빼 오는 데 실패한다면 사업을 접어야 할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부터 하시모토 부장의 영입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기획서니까.

하지만 비즈니스는 정직함이나 간절함 따위로 진행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숨긴다면 당연히 의심할 것이고 다 드러내 놓고 오라 한다면 취할 것만 취해 멀쩡한 사업만 뺏기는 꼴이 된다.

“궁금하게 해야 합니다.”

“궁금하게요?”

“네. 도대체 극비리로 진행하는 사업을 그대로 보여주고선 이렇게 무례한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증 말이지요. 아마 하시모토 부장은 그날 이후로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사업을 모두 알려주는 건 너무 큰 모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시모토 부장도 당장 그 아이디어를 본사에 제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미 신념까지 저버리고 충성했던 회사에 배신당한 몸입니다. 두 번 당할 머리였으면 그 자리까지 가지도 못했습니다.”

하시모토 부장은 유능했다. 굳이 따지자면 차재훈 부장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인재. 그러나 그 씨앗이 돋아난 곳은 안타깝게도 더러운 시궁창이었다. 노력해도 빛을 보지 못함은 어쩐지 예전 나와 닮아 있었다.

같이 다리가 비틀거릴 정도로 술을 마셨던 하시모토 부장은 인사불성이 된 와중에도 미니카에 대한 고루한 역사를 몇 번이고 읊어댔다.

꿈을 잃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직 그 꿈을 좇고 있다면, 반드시 연락이 올 것이다.

그때였다.

삐리리리.

내 주머니에서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렸다.

[하시모토 부장]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타이밍이 예상보다 빨랐다. 아니, 나에게 대회에 참가해 달라 부탁했을 정도로 추진력이 빨랐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네. MM 프로팀 김민호 구단주입니다.”

(하시모토입니다. 지금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렇게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로 일정은 없으실 테니 지금 공항으로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하시모토 부장입니까?”

우리 회사의 명운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전화를 끊자, 직원들이 몰려들어 그 대답을 기다렸다. 전화 내용을 유추해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확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네. 예상보다 훨씬 일찍 반응이 왔습니다. 차재훈 부장이 좀 모셔 와 주세요. 아, 여기로 말고 문방구로요. 저는 문방구에 가 있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사람 하나를 구워삶는 데 들이는 공으로 과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은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사람이다. 지금은 모자람보다는 차라리 과함이 더 나은 선택이다.

* * *

“최대한 달린다고 달려왔는데 그래도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급작스럽게 방문해서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그럼 차에 오르시죠.”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구나.’

사람을 보낸다 했을 때 하시모토 부장은 그 설마 했던 사람에게 연락이 오자 아찔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첫 만남을 선사해 주었던 당사자다. 사람이 되어서 어찌 초면에 이렇게 무례한가? 라는 질문을 속으로 얼마나 던졌는지 그 횟수도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깍듯하게 자신을 대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기서 한 시간 정도 가야 합니다. 그래도 차가 안 밀리는 시간이라 다행입니다.”

‘본인의 차다. 의전 할 회사 차도 없는 규모면서 그런 사업을 하겠다고?’

차에 오른 하시모토 부장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차재훈 부장의 사진이 백미러에 달려 흔들거리는 걸 보곤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다.

세계적인 기업인 삼정과 대현이 밀어주는 팀이다. 소문에는 삼정기업의 후계자들과도 막역한 사이라 했다. 그만한 투자금이 있기에 사업을 벌인다 넘겨짚었건만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규모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제가 계약서에 사인할 것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셨습니까?”

어찌 되었든 자신은 급하게 휴가까지 써가며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자의 말대로 된 것이다.

“제가 확신하게 아닙니다. 구단주님이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구단주님의 능력이 출중하신가 봅니다?”

아직 그날의 무례함을 씻어내지 못한 하시모토 부장의 비아냥이 조금 섞인 질문이었다.

“저희 팀에 사무 업무를 보는 직원은 10명입니다.”

“오호. 미니카프로팀치고는 꽤 규모가 있군요. 일본에도 그 정도 규모가 되는 팀은 없습니다.”

놀람은 진심이었다. 각종 아마추어와 준프로리그가 있는 일본에서조차 정식 스폰서를 받는 팀은 드물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꽤 큰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팀조차 사무실에 경리 업무나 보는 직원이 한둘 있을까였으니.

“절반은 삼정그룹에서 내년에 정년퇴직을 앞둔 부장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대현자동차의 굳이 없어도 되는 부서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입니다.”

“아.”

차재훈 부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시모토 부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직서 접수처로 쓰일 작정이었구나.’

지금이야 김민호 구단주 덕분에 미니카의 인기가 반짝했다지만 한 번 분 인기는 언제고 쉽게 사그라든다. 열 명이나 되는 사원을 고작 그런 미니카 프로팀에 밀어 넣는다는 자체가 그다지 좋은 의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원을 온 직원들의 상황을 듣고 있자니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다미야에도 그런 부서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속한 유통지원부서가 그러했으니까.

“우리는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힘들게 버텨온 직장에서 내쫓길 순 없었습니다. 그 최소한의 조건이 이번 대회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래도 홍보 효과를 입증한다면 당장 3년 사이에 지원금이 끊기진 않을 테니까요.”

“…….”

핸들을 돌리며 태연하게 말하는 차재훈 부장과는 반대로 하시모토 부장의 표정은 너무나 어두웠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저들이 왜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는지.’

단순히 상금과 명예가 걸린 대회가 아니었다. 열 사람의 직장이 걸린 경기였던 셈이다. 그런 대회에서 추잡한 짓을 저질렀으니 그 죄는 더욱이 무겁게 다가왔다.

“구단주님의 뜻이었습니다.”

“네?”

“대회에 우승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처절하게 준비한 것도, 그렇게 우승해서 직원들의 직장을 지켜준 것도 모두 구단주님의 결단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월급이 받으면 되는 자리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막무가내로 한국에 넘어온 나에게도 그리 대해주셨지. 분명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텐데.’

차재훈 부장과의 대화로 불안함과 실망감은 어느덧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가슴속에 다시 자리 잡은 감정은 작은 질투심과 부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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