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86화 (86/151)

#86. 와룡봉추(臥龍鳳雛)

(치직. 치지칙. 56분 교통 정보입니다. 올림픽대로, 강변북로 모두 소통이 원활합니다. 내부 순환로는…….)

낡은 라디오 스피커에서 들리는 교통캐스터의 또박또박한 발음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폰으로 매번 크게 틀어놓고 듣던 너튜브는 노래 한 곡이 끝나면 매번 노래보다 더 긴 5분짜리 광고가 계속 나오는 터라 짜증이 솟구쳐 충동적으로 켠 라디오였다.

몇 달 전, 미니카 상자를 찾기 위해 찬장을 뒤적거리다 이 낡은 휴대용 라디오를 발견했었다. 나는 어디 동대문 앞 노점상에서나 팔 법한 얄궂은 모습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라디오가 할아버지 딴에는 귀한 가전제품이었음을 짐작했다. 이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찬장 한 구석에 비닐까지 싸서 곱게 넣어두셨으니 말이다.

워낙 꼼꼼하게 포장이 되어 있어, 그냥 비닐봉지를 뭉쳐둔 것이라 여기고 넘긴 탓에 49재를 용케 피해 간 이 녀석도 나름의 운명이겠거니 하고 태울까 하는 생각을 접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문방구 문을 활짝 열어두고 운치 있게 노래를 들을 목적으로 건전지를 채워두었던 라디오는 의외로 목적에 맞지 않아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중이다.

“읏샤.”

나는 오래된 시골 가게의 정취를 타고 제법 잘 어울리는 노랫소리를 들려주는 라디오를 따라 흥얼거리며 윗집 할머니께 빌려온 가마솥을 드럼통 위에 올렸다.

밥을 지으려 한다.

이제 막 모내기가 끝난 참이다. 마을 어르신께 받은 쌀은 시골의 느긋한 일정 때문에 늦은 도정으로 아직 쌀 냄새가 진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모처럼 손님 대접을 하는데 이 정도 수고는 약과였다. 모처럼 나도 가마솥 밥과 누룽지가 먹고 싶었고 말이다.

끼익.

한참 장작불과 씨름을 하던 중에 차재훈 부장의 차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내가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모습이 꽤 신기했는지 인사도 잊고 차에서 내린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또 봅니다.”

“아,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방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아직 식사 준비가 멀었으니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시죠. 아니다. 날씨가 좋은데 밖에서 먹을까요?”

“저는 좋습니다.”

모처럼 장작불을 피웠는데 밥 짓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건 여간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트랙을 조금 밀면 평상 위에 사람 서넛은 앉을 자리가 충분했다.

“저는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아, 부장님, 운전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눈치 빠른 차재훈 부장이 자리를 비워줬다.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것이다.

“여기 잠깐 앉아 계세요. 저는 들어가서 커피 좀 가져오겠습니다.”

작고 투박한 쇠 쟁반에 커피믹스 두 잔과 아풀러, 쫀두기를 담겼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면 그래도 집에 손님이 자주 찾아오는데 괜찮은 고급 커피라도 한 통 사야 하나 싶다가도 막상 그런 고급 원두커피는 문방구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길 여러 차례였다. 그 때문에 누가 오더라도 이 문방구의 손님은 커피믹스를 대접받는다.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의 회장님조차도.

“대접이 변변찮습니다.”

“아닙니다. 잘 먹겠습니다.”

타닥. 타닥.

따끈한 커피가 조심스럽게 삼켜지는 짧은 정적 속에 장작이 타는 소리와 가마솥의 수증기가 이따금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쳤다.

“정말 운치 있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저는 이제 별로 큰 감흥이 없더군요. 할아버지의 문방구를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추억에 잠겨 살았는데 금방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사업을 하실 작정입니까?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닐 텐데요?”

“어떻게든 될 겁니다.”

“네?”

“저도 사실 궁금했습니다. 진짜 될 사업인지 아닌지 말이죠.”

“그게 무슨……?”

확신을 두고 추진해도 모자랄 사업이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하는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과 인력,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사업을 하겠다는 내 입에서 도리어 궁금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당혹스러움에 말을 잊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시모토 부장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계속 그런 불안감을 안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아직 확답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완구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부장님이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셨으니까요.”

“아.”

그렇다.

차재훈 부장이 보여준 사업계획서가 처음부터 되지 않을 허무맹랑한 내용이었다면 이렇게 급히 비행기를 타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은 없다.

“다미야가 먼저 시작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저분한 개싸움이 특기는 아니지만,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적당히 하시모토 부장님께서 옷을 벗으면 끝날 정도까지만요. 그리고 다른 사업을 찾아야겠죠. 답변이 되었습니까?”

다미야를 상대로 싸우진 못해도 하시모토 부장 한 명을 상대로 싸우는 건 너무나 쉬웠다. 특히 한직으로 내몰린 별 볼 일 없는 직원 한 명과 맞바꿔 멈출 싸움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조금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저는 이 사업으로 다미야를 넘볼 생각은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지금껏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는 기업이니까요. 다만 그 파이를 넓힐 생각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니카 시장을 뺏어올 구상이었습니다.”

“뺏어올 시장이 있을 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지금은 반짝하고 인기가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저와 MM 프로팀의 공입니다. 다미야는 미니카 시장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래 지나버린 세월 탓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냉정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미 수명이 다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애니메이션이 처참한 성적을 거두면서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던 다미야 역시 큰 손해를 보았고 기대했던 미니카 시장 역시 되살아나지 못했다. 불타 없어진 집 옆에 새집을 짓는다 하여 도의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는 이 작은 문방구에서 미니카를 달렸습니다. 바로 이 트랙에서요. 때로는 딱지치기도 하고 구슬치기, 술래잡기도 하며 그렇게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랬습니다. 지금 길을 걷다가 제 또래 남자를 붙잡고 미니카를 가지고 놀았었냐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레트로 감성 같은 싸구려 유행을 따라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겁니다. 확실히 보장된 재미를 토대로 말이죠.”

나는 가진 패를 모두 꺼내 보였다. 이제 하시모토 부장의 결단이 필요할 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하시모토 부장은 마침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서명란에는 이미 사인이 되어 있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미야에서 정리가 끝나는 대로 오시면 됩니다! 세부적인 계약 조건은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 참, 밥이 다 되어 갑니다. 조금만 앉아 계세요. 아니, 정 심심하시면 문방구 안을 둘러보셔도 됩니다.”

이 문방구로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시모토 부장의 마음은 이미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 확답을 직접 듣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문제였다. 이런저런 세부적인 업무 계획과 필요한 업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이상의 진행은 실무 경험자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다.

와룡봉추(臥龍鳳雛).

두 사람 중 하나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 MM 프로팀에는 그 와룡과 봉추가 모두 둥지를 틀었다.

이제 내게 남은 숙제는 하나다.

밥, 아니, 돈이다. 이 사업을 추진할 자금이 남았다.

* * *

‘도대체 여기가 한국이 맞긴 한 건가?’

하시모토 부장은 차에서 내릴 때까지도 이곳에 MM 프로팀의 구단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임대료가 비싸 저렴한 곳에 건물을 올렸겠거니 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는 외딴 시골에 자신의 이름을 딴 오래된 문방구가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정말 문방구구나. 이젠 일본에도 점점 사라져가는 곳인데…….’

건너편에 보이는 학교는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았는지 멀쩡한 창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교 앞 문방구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대기업 스폰서가 붙은 프로팀의 구단주가 말이다.

당장에 하고 싶은 질문이 한가득 생겼으나 아쉽게도 구단주는 차를 만드느라 바빠 보였다.

‘허락도 받았으니 구경이라도 해볼까?’

장난감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부족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당시 일본의 어느 가정집이 그러하듯 저축과 절약을 미덕으로 살았기에 장난감이래 봤자 천 엔도 안 하는 것들뿐, 그마저도 크리스마스나 생일이 되어서야 겨우 살 수 있었다.

그때의 한이었을까? 하시모토 부장은 나이가 들어서도 옛날 피규어와 변신 로봇을 사 모으는 취미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직장 또한 완구회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하시모토 부장에게 민호의 문방구는 그 시절의 낭만을 그대로 간직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허, 이 트랙이 아직 남아 있었구나.’

하시모토 부장은 자리에 앉기 위해 구석으로 밀어둔 트랙에 먼저 시선이 갔다. 여기저기 이가 나가고 벌어진 틈은 테이프로 겹겹이 발라둔 오래된 트랙은 공교롭게도 하시모토 부장이 신입 시절 전국의 각 지점을 돌며 직접 설치하고 다녔던 모델이었다.

설계도면을 보고 조립할 수 있는 직원이 없어 홀로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작은 트럭을 타고 그렇게 몇 달을 내달린 추억이 담긴 트랙이 이 바다 건너에 작은 시골 문방구에 남아 있을 줄이야.

‘그래. 다시 시작하자. 나도, 이 트랙도 낡고 색이 바랬지만 아직 쓰임이 필요한 곳이 있으니.’

하시모토 부장은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안도했다. 작은 시골 문방구의 주인은 오래된 미니카 트랙을 지켜온 것처럼 곁에 둔 직원들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었기에.

* * *

“전무님, 이번 달 월간 보고서입니다.”

“임 차장, 만약에 말이야.”

결재판을 건네주고 돌아가려는 임 차장을 철진이 붙잡았다.

“그 만약에 좀 안 하시면 안 됩니까? 또 무슨 일을 꾸미시려고요?”

“아직 듣지도 않았으면서 뭘 그렇게 정색을 해!”

“벌써 다른 사업팀 돈까지 다 끌어다가 미니카 프로팀에 들어갔고 저희도 조상진 상무 사우디 사업 건으로 싹 다 지원 가 있습니다. 이젠 돈도 사람도 없습니다!”

“아니, MM 프로팀에서 수익이 나면 몇 배로 돌아올 건데!”

“그것 보십쇼! 그 미니카 사업에 들어갈 자금은 먹고 죽으려 해도 없습니다.”

“아니, 민호 형이 하는 일인데 무조건 성공한다니까!”

“잘못되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돈이 없다니까요?”

말투는 막무가내였으나 최소한 사업적인 측면에서 철진의 직감은 가히 동물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단 질러놓으면 그 아래에 우수한 직원들이 타당성을 검증했다.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높은 확률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들이었고 그렇게 지금껏 철진의 팀은 좌천당한 와중에도 믿을 수 없는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 철진의 말이니 검토해볼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으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끌어올 자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느그 아 말이 맞다. 일 한번 똑 뿌러지게 잘하는 구마.”

“아버지.”

부서를 나누는 별다른 파티션도 없는 넓은 사무실에서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울려 퍼졌는지 불쑥 찾아온 조동욱 회장이 복도에서부터 들은 모양이다.

“박 상무한테 듣고 오는 길이다. 다 털어 놓그라. 문방구가 무슨 장사를 할라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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