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넝쿨째 굴러온 돈다발(1)
“그라이까니 문방구가 장난감을 만들어 팔 끼다 이기가?”
“네.”
“돈도 마이 들어가고 마진도 안 좋을 낀데…….”
한 다리 건너서 들은 정보이기에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장남의 입을 통해서 들은 민호의 계획은 가시밭길이 훤히 보였다.
“고마 얼굴 팔린 김에 쇼핑몰 같은 기나 하지 만나고 그 고생을 한다 이 말이고?”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건은 얼마든지 대줄 수 있었다. 이미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직접 라인을 돌리는 공장만 수십이었으니까. 만약 온라인 판매를 한다면 적은 인력으로 제법 쏠쏠한 매출을 올릴 수 있으리라.
‘내가 눈이 어두워진 기가. 아니믄 문방구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기가.’
예상은 했었다.
지독히도 자기 사람을 아끼는 민호가 3년을 보장받았다 해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쉽게 유추가 되는 시나리오였다.
그 뒤는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 생각인지가 궁금했다.
주어진 패는 아무것도 없었다. 빚만 한가득 물려받았던 자신보다야 훨씬 나은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시작하기에 좋은 조건이라 볼 순 없었다.
식구만 열아홉.
월급은 당연히 본사에서 나왔지만, 운영비는 따로 청구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들어오는 광고나 협찬으로 만회를 하는 모양이었다.
삼정자동차에 안겨준 광고 효과만 하더라도 수백억 단위. 게다가 내년에 있을 한국대회와 세계대회도 남아 있다. 만약 미니카의 인기가 시들어진다 해도 명맥을 잇게 해줄 가치는 충분했다.
당장에라도 돈다발을 들고 가 궁상 그만 떨고 쉬엄쉬엄 대회 준비나 하면서 이따금 밥이나 차려달라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사업가로서 민호를 바라보는 기대감이 그 욕망을 막아섰다.
그런데 완구 제작이라니?
“설마 직접 만들진 않을 끼고. 오다 맡길 공장은 있다드나? 단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아직 기획 단계에 있다고만 들었습니다.”
“그래 못 죽어서 안달인 것매키로 따라댕기면서 뭐 아는 게 읍노!”
‘결국, 문방구한테 직접 들어야 칸다 이 말이제?’
조동욱 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문방구에 갈 구실이 생긴 것이다.
“내 간다. 나중에 보자.”
“네? 아, 안녕히 가세요.”
도저히 부자지간이라고 볼 수 없는, 마치 쌍팔년도 공중전화에서나 들을 법한, 용건만 간단히 한 대화가 오간 뒤 조동욱 회장은 홀연히 사무실을 떠났다.
“어, 내다. 니 오늘 시간 되나? 뭐? 골프? 다 늙어빠지가 공이 날아는 가드나! 취소하고 내랑 문방구한테 좀 가자. 참, 동전 있으모 좀 챙기온나. 아니, 고마 자루째 들고 온나. 10원짜리여야 한데이.”
손이 바빠졌다. 막무가내로 할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고는 구형 폴더폰에서 더듬더듬 문방구라는 단어를 찾았다.
“어, 내다. 문방구 니 오늘 시간 되나?”
* * *
“네? 지금요?”
(와 바쁘나?)
“아닙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너무 급작스러워서요.”
(카모 조금 있다가 진수랑 문방구로 갈 끼다. 그리 알고 있그라.)
도대체 그 조금이 언제입니까?
하마터면 되물을 뻔했다.
아니, 그보다 정진수 회장도?
“그런데 정진수 회장님도 같이 오신…….”
뚜. 뚜. 뚜.
원하는 답만 들으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할 일이 딱히 많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제 막 하시모토 부장이 들어와 서로 손발을 맞춰가는 와중이었다. 오전 근무만 하겠다는 원칙은 계속 고수하고 있었지만, 차재훈 부장과 하시모토 부장이 들고 오는 회의 안건들은 내 결정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뭐, 두 분께 언제고 보고는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다니 오히려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낼 기회라 여기기로 했다.
똑똑.
“구단주님, 일본 업체들이 보낸 샘플 디자인과 견적서가 도착했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아, 국내 업체들과 같이 비교해 보겠습니다. 국내 업체들은 아직이죠?”
“네, 아무래도 직접 방문하면서 확인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일본 쪽이야 하시모토 부장이 기존에 거래하던 곳들이기에 검증이 됐다지만 국내는 다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하게 확인해 주세요.”
“그런데 벌써 가십니까?”
“아, 농땡이가 아닙니다. 하핫. 손님들이 오십니다. 이곳으로 오셔도 되는데 굳이 문방구로 오시겠다네요.”
이제 출근한 지 한 시간이 막 지났다. 곧장 갈 채비를 하는 내 모습에 차재훈 부장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고 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문방구에 가서도 노트북으로 일을 한다지만 그 역시 팀원들이 보기엔 팔자 좋은 사람으로 보일 터였다.
멋쩍은 인사와 함께 서둘러 차에 오른 나는 마트에 들러 계란 한 줄을 고른 뒤 문방구로 향했다.
조동욱 회장님의 성격상 지금 당장 문방구로 향하고 계실지도 몰랐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도착하신다면 점심시간이다.
오늘은 그래도 두 분이 오시니 메인메뉴가 하나 더 추가된다.
달걀프라이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이 달걀프라이는 혼자 자취를 하는 사람에게는 의외로 하기 힘든 요리다.
일단 설거지에 기름기가 추가된다는 것만으로도 귀찮음의 단계가 높아졌다. 게다가 아무리 조심해도 가스레인지에 사방으로 기름이 튀기에 여기까지 닦아야 했다. 때문에 달걀은 어쩌다 라면에나 들어가는 재료였으나 오늘만큼은 귀한 손님이 오는 만큼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기로 했다.
“야옹!”
“알았어. 기다려봐.”
누렁이는 손에 무언가 들려 있으면 마치 세관원처럼 끈덕지게 달라붙어 냄새 맡았다. 그러곤 자신이 먹을 만한 물건이 나오면 이렇게 시위를 한다.
그렇게 밥을 차리기도 전에 달걀 하나가 삶아졌다.
“그래. 달걀은 다이어트식이니까 많이 먹어라. 그나저나 이 짓도 여러 번 하니까 손에 익네.”
달걀 하나를 삶는 동안 꽤 많은 일을 했다. 윗집 할머니께 아직 돌려드리지 못한 가마솥에 쌀을 씻어 올리고 장작불을 붙인 다음 남은 채소와 냉이, 달래, 조미료를 가득 때려 넣고 된장찌개까지 끓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점심 준비는 내가 생각해도 꽤 능숙했다.
“문방구 안에 있나!”
“네, 들어오세요!”
“가마솥 밥 하고 있데? 냄새가 기가 막히드마.”
“방금 올려놔서 조금 기다려야 합니다. 잠시 앉아 계세요.”
“니도 여 와서 앉아봐라. 그래, 장사한다고?”
자리에 앉아 익숙한 자세로 누렁이를 품에 안은 회장님은 커피를 가져올 여유조차 주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셨다.
“네, 그렇습니다.”
“하! 니 물건 찍어 파는 기 어데 그리 쉬운 줄 아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만한 자금을 어데서 구할라고?”
“이 친구 말이 맞네. 자네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규모에 맞는 사업을 해야 해. 실패하면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돌아가는 사업이네. 엄청난 재고까지 떠안아야 한단 말일세.”
“저도 걱정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싸게 배웠다 치고 딴 걸로 알아봐라. 이 최첨단시대에 돈 벌끼 천진 기라.”
“아닙니다. 너무 많은 투자를 받을까 봐 걱정입니다.”
“뭐라꼬?”
“미니카 애니메이션도 제작할 작정입니다. 완구 홍보는 애니메이션으로 해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라모 돈이 따블로 들 낀데 누가 투자를 한단 말이고?”
“저희가 미니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기사를 언론에 뿌리면 이번 미니카 대회가 끝나고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의 판매 실적을 똑똑히 확인한 다른 자동차 업체들이 줄지어 돈다발을 들고 올 겁니다. 들고 온 금액에 맞게 컨셉카를 애니메이션에 넣어줄 겁니다. 제품 디자인도 알아서 뽑아올 테니 일석이조지요.”
“허허.”
“기발하군. 게다가 위험성도 거의 없다시피 한 사업이야.”
본디 사업은 내 돈이 아닌 남의 돈으로 하는 것이라 했던가?
도의를 생각지 않는다면 정진수 회장님의 말이 맞았다. 최대한 많은 돈을 투자받아 놓는다면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리 MM 프로팀의 돈이 아니다.
위험성은 극히 적고 잘만 된다면 보장된 시장을 고스란히 먹을 수 있는 사업이다.
“그 돈.”
“네?”
“내가 다 주꾸마. 실때없이 다른 아들 차 홍보해 주기 싫다. 얼마건 간에 삼정에서 다 댈 테니까 뿌릴라던 기사 다 취소시키라.”
“어허! 내 지분도 절반이 들어갔는데 자네 혼자만 먹으려고? 똑같이 절반으로 하고 우리 차까지 같이 넣는 걸로 하세.”
작전은 성공이다.
물론 여러 업체에서 투자를 받는 것이 좋지만 절차가 복잡해진다. 가뜩이나 바쁜 팀원들이 그런 골치 아픈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둘 순 없다. 가장 깔끔한 건 역시 모기업으로 되어 있는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에서 자금을 지원받는 것이었다. 절차상으로나 추후 수익 배분적으로도 훨씬 간편하다.
하지만 역시 받는 모양새가 중요하다. 아쉬운 소리를 하면 아쉬운 사람이 된다. 당연히 돈을 주는 쪽이 갑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갑과 을이 바뀌기도 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두 분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정확한 비용이 산정되는 대로 자금요청서를 보내겠습니다.”
“어? 어어…….”
“밥이 다 됐겠네요. 금방 차려오겠습니다.”
나는 보일 듯 말 듯 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우리가 당한 것 같지?”
“시끄럽다, 고마. 밥값 한번 비싸게 내게 생기뿟네.”
민호가 식사 준비를 위해 나간 방에서 두 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나눴다.
‘이게 아인데…….’
특히 어려운 살림에 도움을 좀 주면서 생색이나 내보려 했던 조동욱 회장은 도리어 자신이 아쉬운 소리를 한 초유의 사태에 뒷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짐짓 든든한 후원자 행세를 하려고 했으나 돈 자루를 가져가 달라 매달린 꼴이 되었다.
“뭐 그래도 대들보가 알아서 잘하겠지. 설마 돈이나 까먹을까?”
“하! 느그 대현자동차 미니카로 홍보한 신형 모델, 지금 계약하면 반년 기다려야 한다믄서? 양심도 없는 기라. 그래 팔아재끼는데 본전 찾을 생각을 다 하나? 없는 돈이다 카고 줘도 모자라겠고만!”
“아, 그러면 자네 삼정자동차는? 그날 오른 주식이 몇 프로야, 도대체! 그리고 오늘 골프 취소한 비용 그쪽에 달아둘 테니까 나중에 가서 내게.”
“쫌생이매키로 굴기는. 허리도 안 돌아갈 나이에 뭔 골프고? 같이 쳐줄 사람도 없으면서. 고마 저 가서 게이트볼이나 하지.”
“나이 먹었다고 광고라도 하라고? 예끼, 이 사람아!”
“오늘 여 밥 먹고 갈 때는 골프보다 훨씬 재미있을 기라. 니 동전 가 왔제?”
“어? 자네가 말해서 가져는 왔는데, 어딘데 그래?”
정진수 회장은 가방을 열어 아직 뜯지도 않은 10원짜리 동전 뭉치들을 꺼냈다.
“든든하이 가 왔네! 일단 가 보믄 안다. 바로 요 밑이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시킨 일을 썩 잘 준비해온 학생(?)이 흡족했는지 그새 기분이 풀려 다시 호탕한 목소리를 되찾았다.
“참, 니 가기 전에 내캉 합을 좀 맞차야 하니까 얼른 묵고 차로 가자.”
“합?”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드는 늦봄의 오후, 낡은 골방에서 재계 서열 1, 2위를 차지하는 그룹의 회장 두 명은 너무나 하찮은 비밀 회동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