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88화 (88/151)

#88. 넝쿨째 굴러온 돈다발(2)

“식사하세요.”

나는 개다리소반에 가득 차려진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반찬은 소박하다. 윗집 할머니께서 주신 젓갈향 가득한 김치, 달래와 냉이를 넣은 된장찌개, 그리고 오늘의 메인으로 달걀후라이.

세 명이 먹기엔 개다리소반이 좁아 물컵과 밥그릇은 들고 식사를 해야 한다. 그래도 이렇게 작은 밥상이라 소박한 구색에도 가득 차 보이는 기분이 들어 다행일지도 몰랐다.

“고맙다. 니도 앉아서 언능 묵으라.”

“잘 먹겠네.”

후릅.

“문방구 니 요리 배았나?”

한 숟갈 가득 된장찌개를 퍼 입안에 넣던 조 회장님이 물었다.

“따로 배우진 않았습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이 친구 빈말인 줄 알았더니 정말 맛있군!”

두 회장님의 칭찬에 살짝 민망한 기분도 들었으나 이곳에 이사 와 지금껏 부엌에서 요리한 횟수만 해도 족히 세 자릿수는 넘었다.

자취를 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부족한 주머니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요리해야 하는 사람과 사 먹어도 그럭저럭 버틸 만한 재정적 여유를 가진 사람.

나는 명백히 후자에 속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나 썩 괜찮은 국밥집과 백반집도 몇 개 찾아두었기에 조금씩 로테이션을 돌리며 간다면 질리지 않고 저녁을 때울 수 있었다.

그러나 시골 인심은 나에게 저녁뿐만 아니라 점심까지 집밥을 해 먹도록 강요했다.

혼자 사는 내가 밥이나 굶을까 염려되셨는지 어르신들께서 하루가 멀다고 찬거리를 가져다주셨다. 고추 무침, 콩잎 무침, 콩자반 등등……. 그마저도 뜸하다 싶으면 손두부나 생선 같이 요리해야 할 재료들도 곧잘 문에 걸어 두셨다.

어르신들이 나를 생각해서 주신 음식을 버릴 순 없었다. 어떻게든 다 먹어야 했고 그 덕분에 나는 원치 않게 너튜브로 요리법을 찾아가며 웰빙식을 즐기는 상황이다. 그 예로 지금 올라간 된장찌개는 강된장이라 칭해도 될 만큼 재료가 가득 들어가 있었다. 시골인심처럼 넉넉하게 넣은 조미료와 함께.

“밥도 맛나네. 밥 한 그릇 더 도고.”

“나도 부탁하네.”

“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밥값은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 한 그릇이 아니라 솥째 드신대도 전혀 아깝지 않다.

그렇게 먹성 좋으신 회장님이 혹시나 밥이 부족하실까 싶어 한 솥 가득 지은 쌀밥은 오늘도 깔끔하게 비워지고 후식으로 누룽지까지 드시고서야 길었던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 * *

“씁. 씁.”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배가 불룩한 두 회장은 도저히 문방구에서 나온 사람이라 볼 수 없는 자세로 이를 쑤시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니도 입맛에 맞는 갑제? 천상 비싼 거만 묵고 댕기니까 입에도 안 댈 줄 알았디마.”

“오랜만에 과식했네그려. 내가 자네만큼 먹을 줄이야. 허허.”

조동욱 회장과는 반대로 어릴 적부터 유복하게 살아왔던 정진수 회장은 민망한 듯 고개를 슬며시 돌려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매번 같이 밥을 먹을 때마다 미련하게 억지로 다 먹지 말고 그냥 남기라는 타박을 했었는데 오늘은 그 타박을 본인이 들어야 할 정도로 깔끔하게 밥상을 비워냈다.

“밥값 비싸게 치랐으믄 맛있게 배라도 가득 채아야지. 절마 저거 가마솥 설렁탕도 기가 막힌다. 얼매나 푹 고았는지 국물이 무슨 고기 같다 카이.”

레토르트 제품을 그냥 데워 조미료만 더 넣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조동욱 회장의 믿지 못할 경험담은 이미 한번 그 맛을 본 정진수 회장에게 상당히 신뢰도가 높은 발언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10원짜리는 왜 들고 오라고 한 겐가? 합을 맞추는 건 또 뭐고?”

차에 올라 부쩍 더워진 날씨에 에어컨을 켠 정진수 회장이 물었다.

“화투를 칠끼라. 저 아래 마을회관에서 마을 할마시들이랑.”

“아니, 고작 그런 걸 하려고 돈까지 챙겨오라고 했나? 나 참.”

“어어? 쉽게 볼 게 아이다. 지금 내가 털린 돈만 해도 족히 만 원은 넘는다니까!”

“아니, 이 사람아. 시골 노인들이랑 화투를 치는데 뭘 합까지 맞추냔 말일세. 난 또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찮은 계획의 실체를 비로소 듣게 된 정진수 회장은 책망하는 어투로 조동욱 회장을 나무랐다.

사람은 무릇 나이가 들면 체면이 전부라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하던 정진수 회장이었다. 늘 그랬듯이 억지에 못 이겨 화투를 치러 가긴 하겠지만 합을 맞추자는 건 결국 사기를 치자는 말이었다.

한 기업의 총수가, 그것도 시골 마을회관에서 10원짜리로 화투를 치는 것도 웃음거리가 될 일인데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일단 들으봐라. 내 저서 화투 치기 시작한 지가 언 세 달째다. 그란데 한 판도 몬 이긴 기 이게 말이 되나 이 말이다.”

“자네가 한 판도 못 이겼다고?”

“그라이 미치고 환장하는 기라!”

‘천하의 조동욱이가 한 판도 못 이긴 화투판이라니?’

젊은 시절부터 인간 주판이라 불리던 조동욱 회장이다. 귀신같은 눈썰미에 셈도 빠르니 담판을 지어야 하는 거래에서 자신도 매번 아쉬운 결과를 가져갔기에 더욱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잘 봐래이. 내가 이렇게 코를 만지면 바닥에 묵을 패가 없다는 거니까 니가 안 나온 패 중에 하나를 던지라. 카고 이렇게…….”

딴에는 꽤 오랫동안 구상을 한 작전이었다. 들키지 않을 범위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몸짓을 한참 설명한 조동욱 회장은 간단한 시험까지 치고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자, 가자. 이번에 따모 그깟 골프? 내가 연간 회원권도 끈어 주꾸마!”

“자네 정말인가? 연습장이 아니고?”

“허! 내가 어데 이런 걸로 사기 치는 사람으로 비드나!”

‘지금 치려고 하지 않나…….’

정진수 회장은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연간 회원권이 걸린 큰 경기를 앞두고 주최자의 가슴을 후벼 파,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휴우.”

드르륵.

다짐이 섞인 깊은 심호흡을 내뱉은 조동욱 회장의 손이 마침내 마을회관의 문을 열었다.

“잘들 계셨소? 여 두 사람 자리 있는교?”

“아이고. 또 왔구먼? 네 명이 번갈아가믄서 광 팔면 되지! 여짝으로 오셔. 그래, 식사는 하셨고?”

“마, 단디 묵었으니까 오늘은 오래 칠 낍니더.”

“그거야 돈 떨어지면 아쉬워도 일어나야제! 저번처럼 또 달력에 지저분하게 받을 돈 계산해서 계좌로 준다 어짠다 하믄 나 머리 아파서 그만할라니까.”

“오늘은 그런 일 없소.”

척.

조동욱 회장이 가방에서 10원짜리 묶음을 한 주먹 꺼내자 엉겁결에 정진수 회장도 바닥에 같이 동전 묶음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윗집 할머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렇게 큰 판은 저번 옥자 할매 장례식 이후로 처음이구먼.’

고스톱은 시골 노인들의 몇 안 되는 여가생활이었다. 남자들이야 바둑이나 장기를 둔다지만 할머니들의 정서에는 화투가 제일이었다.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매일 만나는 멤버들끼리 화투를 쳐봐야 아무런 재미가 없었다. 이미 눈빛만 봐도 무슨 패를 들었는지 얼추 파악될 지경인데 무슨 열정이 생기겠는가?

그저 적적하고 손을 놀리기 싫었기에 이렇게 마을회관에 모여 보지도 않을 티비를 켜 정적을 지우고 습관적으로 화투를 치던 날이 일주일에 7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호구가 또 다른 호구까지 물고 넝쿨째 굴러들어 왔으니 버선발로 나와 맞이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빳빳한 종이에 싸여 곱게 세워둔 두 회장의 동전들은 이미 주인이 정해진 듯했다.

“패 돌리소.”

착착착.

능숙한 솜씨로 패를 섞는 소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의 노곤한 오후를 깨웠다.

* * *

돈이 생겼다. 상식선에서만 써낸다면 곧장 손에 쥘 수 있는 백지수표로 말이다.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야 할 곳은 당연히 사무실이었다. 나는 다 먹은 밥상도 그대로 두고 곧장 전화를 걸었다.

(네. 구단주님. 차재훈입니다.)

“아, 차재훈 부장? 지금까지 산정한 금액들 모두 취합해서 메일로 보내주세요.”

(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금액도 같이 취합할까요?)

“네, 다 취합해 주세요. 돈이 생겼습니다. 아니, 이제 생길 예정입니다.”

(정말입니까?)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에서 지원받기로 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회사에서 합시다.”

다들 내색은 안 하고 있었지만, 뻔히 우리 구단의 재정 상태를 알고 있는데 덜컥 큰 사업을 하겠다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굳이 두 회장님이 주지 않으시더라도 돈이 나올 구석은 있었다. 그러나 돈이 생긴다고 막연하게 짐작하는 것과 직접 확답을 들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될 시간이다.

“형, 우리 왔어!”

“왔스므니다.”

“어서 와. 오늘은 상진이도 왔네? 안 바빠?”

“잠깐 여유가 있어요. 다음 주부터는 또 출장이에요. 밖에 아버지 차 있던데 여기 안 계시죠?”

“어, 방금 식사하시고 마을회관에 가셨어. 아마 거기서 바로 집으로 가실 거야.”

“것 봐. 와도 된다니깐.”

녀석들이 왜 밖에서 쭈뼛거리며 문방구로 들어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아챘다. 혹시나 아버지가 계실까 봐 마치 허락받지 않고 놀러 온 친구 집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내 대답을 들은 세 녀석은 비로소 경계를 풀고 방 안으로 들어와 비디오를 틀고 나름의 지정석에 앉았다.

“그런데 이건 뭐야?”

“어? 평상에 올려져 있던데?”

설거지하던 싱크대에 철진이가 단단한 무 두 덩이를 올려놨다.

“어르신이 주셨는데 내가 못 보고 들어갔나 보네.”

또 먹거리가 늘었다.

“왜 그래? 있는 그대로 들고 온 거야. 어디 부러졌어?”

내가 설거지하던 손도 멈추고 멍하니 봄무를 바라보고 있자 철진이 또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런 거 아니야, 인마. 너무 많이 얻어먹어서 그래.”

혼자 사는데 냉장고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음식이 가득 찼다. 어쩌다 한두 번 얻어먹는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으나 매번 이렇게 챙겨주시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야, 너희들 좀 큰 식당 아는 데 없어? 고급스러운 곳으로.”

“아는 곳은 있지. 그런데 뭐 하게?”

“어르신들 모시고 한번 가게.”

구실은 많았다. 매번 얻어먹는 나물과 반찬들도 그렇고 지난번 차재훈 부장이 조난했을 때도 어르신들께서 모두 손전등을 들고 온 산을 찾아다녀 주셨다. 버스 한 대를 빌려 식사 대접을 하기에 충분한 구실이었다.

“역시 운프간이지!”

“아니야. 한식을 더 좋아하실걸? 해금옥이 딱 맞겠네.”

“쥐똥만큼 나오는 거 먹고 있으면 성질만 버린다니까. 차라리 큼지막한 스테이크가 낫지!”

“어르신들은 형처럼 못 먹어. 해금옥이 정갈하고 운치 있지!”

“야,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 나도 조금 있으면 바빠지니까 얼른 예약해야 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어물쩍 뭉갰다간 또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룰 게 분명했다. 바빠지기 전에 어르신들을 모시고 갈 식당을 알려달라 했더니 두 녀석은 한참을 다투며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정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왜 다른 식당을 알아보므니까? 내가 루데타워에서 레스토랑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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