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넝쿨째 굴러온 돈다발(3)
지환이가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했으니 예약은 할 필요도 없었다. 어르신들이 가장 바쁜 날인 오일장과 주말 목욕탕에 가시는 날만 제외하면 출석률은 100%. 버스는 철진이와 상진이가 준비하기로 했다.
“이제 이장님께 말씀드려서 방송만 하면 되네?”
“이렇게 쉽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 갈걸.”
“원래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제일 지키기 어려운 거야.”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괜히 민망해진 탓에 볼을 긁적였다. 두 형제도 조동욱 회장과 그리 끈끈한 부성애가 없었지만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자식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나이가 들고 사회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서울에서 1시간 거리도 안 되는 이 문방구에 할아버지를 뵈러 왔던 날은 열 손가락에 꼽았다. 나도 지키지 못한 말을 짐짓 어른스러운 흉내를 내며 내뱉은 셈이다.
“참, 너희들 오늘 달력에 안 적었다.”
“맞다, 달력!”
나는 어색한 공기를 흩으려 화제를 돌렸다.
“어? 형, 마이너스도 됐었어?”
“푸하하! 쟤 빚쟁이였어. 공기놀이로 내기했다가 다 털렸거든.”
아버지가 있는지 확인하느라 뒤늦게 달력에 금액을 갱신하던 상진이 지난 일자를 넘겨보다 철진이의 화려한 이력을 발견했다.
지금은 눈물 나는 참을성으로 다시 플러스로 전환되긴 했지만, 그간 나와 지환이가 하는 게임과 먹던 과자를 바라만 보는 애처로운 상황이 펼쳐졌었다.
“공기놀이?”
“어. 우리끼리 하다가 누렁이 병원에 가서 수의사분이랑도 한 판 했었어. 엄청 예쁘시다?”
“무슨 소리야? 누렁이 병원까지 가서 왜 공기놀이를 해? 누렁이가 병원은 왜 갔고?”
아무래도 사우디까지 출장을 다니다 보니 상진이가 중간에 잃어버린 시간은 제법 길었다. 철진이가 앞뒤를 다 잘라먹고 하는 이야기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할 말이 많스므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면…….”
지환이가 스무고개를 하는 두 형제를 보고 가슴이 답답했는지 그날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푸드코트로 넘어갈 무렵 나는 번뜩 잊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맞다! 전파상 아저씨도 불러야 하는데 내일 사무실에 가서 말씀드려야겠다. 설란이도 같이 오라고 해야겠네. 저번엔 우리가 얻어먹었으니까.”
이왕 쓰기로 한 돈이다. 전파상 아저씨도 이사를 가셨지만, 여전히 동네 어르신들과 왕래하셨고 저번 미니카 롤러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번 식사 대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셨다.
남은 사람은 이제 설란이뿐이었다.
“수의사분은 따로 먹스무니다! 따로!”
“야, 먹는 김에 같이 먹지 뭘 따로 먹어. 어차피 밥 먹기로 약속한 건데 버스 한 대로 가면 편하잖아.”
사실 약속은 아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수준의 인사말이었다. 그러나 오빠가 되어서 눈치 없이 얻어먹기만 하고 입을 닦으면 안 된다. 아직 우리나라는 나이 어린 동생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동방예의지국이니까.
나는 일전에 따로 받은 설란이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지금 통화 가능해?”
(당연하지! 무슨 일이야?)
“다른 게 아니고 다음 주 월요일에 루데타워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이나 먹을까 하고. 병원 쉬는 날이지? 혹시 그날 안 되면…….”
(돼! 그날 돼!)
“아, 잘됐네. 그럼 그날 연락하고 데리러 갈게. 참, 간호사분도 같이 와. 그때 밥도 못 먹었잖아.”
(어? 으응. 물어보고 되면 같이 갈게!)
“그래. 월요일에 보자.”
나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어쩌다 보니 날짜까지 설란이가 쉬는 날로 정해져 버렸다. 한창 바빠질 즈음이라 밥을 먹고 다시 출근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봐도 월요일이 가장 적기다. 주말 장사를 해야 하는 지환이의 레스토랑에도 부담이 적고 주말에 목욕탕이나 읍내에 나들이를 가시는 어르신들의 일정에도 방해가 안 되는 요일이니까 말이다.
“민호 형은 평생 혼자 살 팔자이므니다.”
“뭐야, 인마? 왜 갑자기 저주를 해. 지들도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여기로 출근 도장 찍는 주제에.”
“왜 우리까지 때려!”
서른 살 언저리의 시꺼먼 남자 넷이 시골 문방구에 모여 논 지가 벌써 반년이 되어 간다. 사실상 우리 넷은 그 누구보다 연애와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가 누굴 놀릴 처지가 아니다. 물론 이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내가 제일 비참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 * *
“어머! 미쳤나 봐! 루데타워 레스토랑이래!”
“선생님, 진정하세요. 밖에까지 다 들리겠어요.”
전화를 끊은 설란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어! 오빠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그냥 밥집도 아니고, 레스토랑이다. 그것도 고급스럽기로 유명한 루데타워에서. 그냥 동네 아는 동생에게 아무런 감정 없이 사주는 밥이라 여기기엔 지나치게 분위기가 있었다.
공깃돌을 선물 받고, 저녁내기를 할 때만 해도 단둘이 오붓하게 밥을 먹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딸려 온 식구가 둘, 거기에 소미까지 더해서 자그마치 다섯이었다. 어디 동호회 모임을 해도 다섯이 넘기 힘든데 어렵게 얻은 데이트 기회에 굳이 그 많은 인원을 데리고 가자 함은 사심이 1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물론 소미와 일행 한 명은 알아서 빠져줬지만, 문제는 곰 같은 덩치의 남자였다.
재벌 2세라 그런지 눈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밥을 먹겠다 고집을 피워 같이 밥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막상 밥을 먹을 때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재벌들에 대한 궁금증을 푸느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뺏긴 사실은 변함없었다.
소미가 그만 미련을 버리고 소개팅이나 알아보자 속을 긁어대는 나날이 계속되다 오늘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기적처럼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다.
“그래도 정말 잘됐어요! 이번엔 진짜 데이트다운 데이트네요!”
소미 역시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그간 억지로 붙잡혀 국밥집에서 들었던 하소연만 해도 족히 하루치는 될 양이었다. 이왕 신세 한탄을 들을 거면 좀 맛있는 집에 가서 먹자는 제안도 통하지 않았다.
‘안 돼. 오빠랑 저번처럼 여기서 마주칠지도 몰라.’
이미 선례(?)가 있는 상황이라 이렇다 할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매번 돼지국밥을 먹다 보니 이젠 사장님이 단품으로 만 원이 넘는 순대까지 서비스로 주실 지경이었다.
그 고통의 나날이 오늘 끊어졌으니 당장 뛸 듯이 기뻐해야 할 사람은 설란보다 소미일지도 몰랐다.
“옷을 사야겠어! 아니, 오늘부터 다이어트야!”
“오늘 점심은 샐러드로 할까요?”
“나는 반 개만 먹을래!”
그간 돼지국밥으로 단련된 군살들이 다음 주 월요일까지 빠질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왜 말리지 않았냐며 억지가 가득 담긴 원망을 쏟아내는 대상 역시 소미 자신이 될 것임을 아직 알지 못했다.
* * *
포커, 훌라, 블랙잭, 고스톱, 섰다.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카드게임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력과 운, 그리고 피 말리는 심리전까지. 그야말로 칼과 창 대신 패를 든 전장과도 같았다.
짝.
“오메. 이번에도 나브렀으야. 스톱! 자, 6점이니께 60원슥!”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 했던가? 그 말은 최소한 이 화투판에서만큼은 통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수십 년의 노하우가 집약된 윗집 할머니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은 도무지 패배를 몰랐다.
착착착.
패가 다시 돌아가고 전투가 다시 시작된다.
‘도대체 왜 진단 말이고? 이래 작전까지 세았는데!’
비록 시골 마을회관에서 점당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는 신세였으나 내로라하는 기업의 총수직은 가진 핏줄로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조동욱 회장은 빚만 가득한 회사를 물려받았고 정진수 회장 역시 암투를 거듭한 끝에 상처만 남은 회사를 겨우 쟁취하고 다시 정상급으로 올려놓은 신화적인 인물이다. 수신호 몇 가지가 헷갈려 판세를 놓치는 실수 따위는 없었다.
“킁.”
‘콧소리는 광을 두 개 이상 들고 있다는 기제? 오냐. 받아라.’
탁.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빛 바랜 군용 모포 위로 탐스럽게 익은 솔이 떨어졌다.
‘자, 저 할마시가 홍단을 먹었으니 니는 솔광을 들었을 끼라. 먹고 비상 걸어뿌라!’
“…….”
‘뭐 하노! 빨리!’
짝.
“어?”
솔광을 내야 할 정진수 회장의 손에서 나온 패는 홍싸리띠였다. 딴에는 굶지 않고 띠 3점이라도 노려보겠다는 심산으로 던진 패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뒤집은 패 역시 튼실한 멧돼지가 떡하니 박힌 홍싸리였다.
‘설마?’
“하이고메, 묵을 께 너무 많아서 이거 손이 바쁘구먼.”
짝. 짝.
겹친홍싸리의 주인은 윗집 할머니였다. 심지어 조동욱 회장이 눈물을 머금고 냈던 솔까지 뒤집은 패에서 나와버렸다.
“자, 원고.”
이제 세 바퀴가 막 돈 상황이다. 지금 고를 했다간 최소 포고까지 나올 대형사고가 난 것이다.
‘망해뿟네. 이 문디 자슥이!’
조동욱 회장은 이 사달의 주인공을 노려봤다.
‘비광을 달라고 했지 누가 솔을 내래!’
억울하기는 정진수 회장도 마찬가지. 역고가 아닌 이상 모두가 피해자였다.
두 명이 덤비니 첫 승을 따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거기에 욕심을 더해 이번에는 돈을 따겠다는 각오로 마을회관의 문을 열었다. 그 문이 지옥문이 될 줄 알았던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작은 것을 탐하면 큰 것을 놓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수신호를 들키지 않고 주고받는 데 열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 수신호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앉은 윗집 할머니에게 가장 잘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세 자릿수의 거한 점수로 총알이 바닥난 두 사람이 쓸쓸하게 자리를 일어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고는 깨평이니께 저짝 편의점 가서 음료수라도 사 드셔. 요새 깨평 안 주믄 이장이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나가 아주 골치구먼. 자, 그럼 또 보드라고.”
윗집 할머니는 허리춤에 찬 전대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한 장씩 쥐여줬다.
돈을 잃을 것도 서러운데 자존심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말까지 작별인사로 듣게 되었다.
“또 봅시더…….”
드르륵.
문을 열고 나온 두 회장은 한동안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속도 타는데 음료수라도 한잔 마시러 가지.”
“그라자.”
차를 타고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정처 없이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편의점까지는 차가 없으면 상당히 먼 거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늦봄의 무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겨우 도착한 뒤였다.
“자네가 다녀와! 처음부터 난 안 한다고 그랬는데 억지로 끌고 왔지 않나!”
“이봐라! 니가 올케 했으믄 잃지도 않았다! 카고 만날 골프로 건강 관리하는 니가 댕기와야지! 내는 몬 간다!”
음료수로 목을 축인 두 사람이 다시 왔던 길을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서로 차를 가져오라며 옥신각신하는 사이 하찮은 노인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는 붉은 노을이 피어났다.
사기 도박을 치고도 빈털터리가 된 하찮은 두 노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과 미세먼지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노을은 너무나 대비되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