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90화 (90/151)

#90. 비닐 봉지(1)

루데타워의 꼭대기 층, 라운지 레스토랑. 가장 비싼 호텔 레스토랑이라고 할 순 없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레스토랑임은 분명했다. 서울 어느 도심에서도 이 루데타워만큼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런 높은 곳에 있는 레스토랑 역시 명성이 드높았다.

“만전을 기해야 하므니다. 귀빈분들이무니다.”

지환은 곧 들이닥칠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오길래 저러신대?”

“우리도 몰라요. 23명이 온다는데. 멤버쉽룸까지 전부 비워서 오늘 점심은 예약도 못 받았어요.”

“아니, 월요일이라 괜찮긴 한데 우리도 캐비어랑 트러플 아끼지 말고 다 쓰라고 하시는 바람에 전부 다시 주문 넣었다니까. 정치인이라도 오나?”

“요즘 정치인들 3만 원 이상 못 받잖아요. 이거 시크릿 오더까지 포함하면 인당 30만 원이에요.”

“허, 참. 평소엔 신경도 안 쓰시더니…….”

지환의 눈을 피해 잡담을 나누는 직원들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도대체 누가 방문하길래 이렇게

루데타워의 운영을 총괄하는 이지환 전무는 평소 전형적인 재벌 3세의 행실을 그대로 따르는 상사였다. 저녁 늦게 사무실이 아닌 라운지 바로 출근해 술이나 마시다 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레스토랑으로 내려와 멤버십룸을 통째로 예약하시더니 레스토랑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최고급 요리들로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으나 상사의 명령은 직장인에게 절대적이었다.

“아랍 왕자가 아닐까요?”

“아니야. 내 생각에는 어디 기업 총수들의 비밀회동 같아.”

“에이. 비밀회동을 이렇게 오픈된 곳에서 해요?”

“그러면 아랍 왕자는 뉴스 기사도 안 나고 온대?”

누가 손님으로 오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직원들의 궁금증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저 게으른 황태자가 이리도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 분명 엄청난 VIP임은 분명했다.

“요리는 한 번에 다 내야 하니까 여기 꽃병은 반으로 줄이무니다! 그리고 따로 마련한 2인석은 코스 그대로 나가고 바닥에 장미꽃잎도 뿌려야 하므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군대고 있던 직원들이 지환의 지시에 다시 바삐 움직였다.

「지환: 언제 옵니까?

철진: 우리 이제 거의 도착했어.

민호: 어르신들도 마을회관 앞에 전부 모여계시니까 도착하려면 한, 한 시간 반 걸리겠네.

지환: 알겠습니다.」

“한 시간 반 뒤에 도착하므니다! 나는 로비에 가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므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직 한참 남은 시간이지만 지환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연신 시계를 확인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홀로 오른 지환은 지갑을 열어 지폐들을 반쯤 꺼내 한 장 한 장 확인했다.

꾸깃꾸깃하고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닳아 있는 만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 지폐는 도저히 명품지갑 속에 들어 있을 모양새가 아니었다. 바에서 즐겨 마시던 칵테일 한 잔도 못 할 푼돈. 게다가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조차 찝찝할 정도로 낡고 지저분했다.

평소 같았으면 주머니에도 넣지 않고 대시보드 위에 던져놨다가 발렛파킹을 하는 직원의 팁으로 쓰일뻔한 돈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곱게 정리되어 지갑 한구석에 끼워진 그 지폐들을 지환은 소중한 편지처럼 다뤘다.

‘드디어 보답할 때가 왔스므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대가 없는 호의를 받은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더라도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고 제 손자인 양 세뱃돈을 쥐여주는 어르신들께 보답하지 못함이 늘 마음의 짐처럼 무거웠다.

그래서였을까?

어르신들이 탄 버스가 오는 길을 바라보는 지환의 모습은 마치 통닭을 사 오신다던 아버지를 기다리는 여느 집 아이 같았다.

* * *

“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은 이번 여행은 우리 호야랑 복지관 얼라들이 준비한 거니께 꼭 고맙다고 말하드라고. 그라고 이 서울은 우리 동네랑 가까우면서도 정서가 참 다르니께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겨. 호옥시나 짝꿍을 놓치고 그라믄 또 그 복잡한 서울 바닥에서 찾았다 못 찾았다 난리가 나니께 꼭 서로 붙어다녀야 하는 겨. 나가 소싯적에 서울로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디…….”

“이장님,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이? 아아, 나가 주의사항을 말하느라 또 정신이 팔렸구먼. 자자. 조심해서 타드라고!”

이장님의 일장연설은 무려 버스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시작되었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뜨신 이장님은 어디서 깃발까지 구해와 관광 가이드를 자처하기까지 하셨으니 유독 말이 기셨던 것도 이해가 됐다.

“형, 다 오신 거야?”

“어. 마을회관에서 탈 사람들은 다 탔고 이제 가는 길에 전파상 아저씨랑 설란이만 태워 가면 돼. 얼른 출발하자. 늦었다.”

“하이고, 우리 호야랑 복지관 아들 덕분에 우리가 호강하는구먼.”

어르신들도 모두 오랜만의 외출에 저마다 평소 어디 결혼식에나 입던 고운 한복과 양복을 차려입고 나오셨다. 기껏해야 하루에 6대가 오는 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물이나 팔러 가시던 어르신들이다. 이리 곱게 차려입으신 모습을 보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았다.

“흐미. 이 버스는 무슨 소파가 이렇게 있디야?”

“어디 가서 촌티 내지 말어! 이게 그 고급 버스아니여! 그… 그…….”

“리무진 버스입니다.”

“맞다! 리무진!”

“리무진? 그거 전에 신 씨 할매 죽었을 때 관 실어가던 거 아녀?”

“아 그 리무진이랑 다르지!”

“뭐 여기 오늘내일하는 노인네들 많은데 비슷하구먼.”

“하하하…….”

어르신들의 뒤가 없는 농담은 도무지 맞장구를 칠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나도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하려던 찰나 할머니 한 분이 일어나셨다.

“아, 버스 출발하는데 왜 갑자기 일어난댜. 위험하게. 진짜 신 씨 할매 따라 리무진 타고 싶은 겨?”

“이거 좀 나눠줄라 그라제.”

할머니께서 내민 까만 비닐봉지에는 겨우내 잘 말려두었던 곶감이 가득했다.

“제가 나눠 드릴게요.”

“호야! 이것도 같이 나눠줄 수 있는가? 이거 고구마말랭인디.”

“여 삶은 계란이랑 떡도 있으야!”

일이 커졌다.

다들 가방 안에 한 봉지씩 싸 오신 음식들을 모아보니 한 짐 가득 되었다. 떡, 계란, 과일, 부침개까지. 좁은 버스 안에 발 디딜 틈 없이 놓인 까만 비닐봉지들 안에는 갖가지 주전부리가 마치 사전에 정하기라도 한 듯이 종류도 겹치지 않고 다양하게 들어 있었다.

“어쩌죠? 식사하시러 가야 하는데.”

“우리가 다 먹을까?”

“뭘 다 먹어, 인마! 일단 놔두면 상하는 것만 드리고 나머지는 잠깐 차에 두자. 돌아올 때 드리면 되니까. 여기 냉장고 있지?”

배가 불러 밥을 못 먹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의외로 시골 어르신들의 식사량은 장정 못지않다.

때가 되면 나물을 캐고 땡볕에 밭을 일구며 부지런하게 사시는 분들이다. 먹성 또한 그에 걸맞게 남달라서 아무리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분들이라도 고봉밥 한 공기를 거뜬하게 비우시기에 이깟 주전부리는 큰 문제가 아니다.

“체하실지 모르니까 최대한 천천히 가주세요.”

“네, 조심해서 운행하겠습니다.”

“이거 많이 늦겠는데. 아저씨한테 말씀드려야겠다.”

* * *

“나 괜찮아?”

“어휴, 가면을 썼네, 가면을 썼어. 집에 웬 다른 여자가 있나 했다. 그러고 다니면 넌 줄 알아보는 사람은 있디?”

이른 아침부터 화장대에 앉아 걸작(?)을 그리던 딸이 마침내 일어나서 감상평을 묻자 아버지는 부모 된 도리로서 정직한 평가를 내렸다.

“얇게 바른 거야!”

“뭘 얇게 발라! 내 딸인지도 몰라보겠구먼! 너 그러고 소개팅 나가면 상대방한테 죄 짓는 거야, 죄!”

“우씨. 아빠는 오늘 안 나가?”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한 설란은 출근 시간이 훌쩍 넘어서도 티비만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괜한 트집을 잡았다.

“오늘 마을 사람들이랑 점심 먹기로 해서 월차 냈어. 버스가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조금 늦는다네.”

“으흠~ 그럼 공주는 먼저 간다!”

“그래. 사기죄로 잡혀가면 오늘 바쁘니까 아빠한테 전화할 생각 하지 마라.”

“뿡이다!”

쾅.

모처럼 풀메이크업을 한 얼굴에 혹평을 남긴 아버지에게 감정을 가득 담아 현관문을 닫은 설란은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보고 마지막 점검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허벅지까지 오는 미니스커트에 단아한 정장과 하이힐. 오전에 헤어샵까지 예약해 머리도 새로 했다.

‘좋았어! 이 정도면 오빠도 그냥 동생으로 대하지 못할걸?’

매번 급작스럽게 만나거나 혹은 추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번 데이트는 설란도 사활을 건 기회였다.

그러나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소곳하게 서서 민호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란의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아까 말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네. 전화해 볼까? 아니야. 운전 중일 텐데 방해될 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지.’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민호의 경차가 보일 생각을 하지 않자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 때문에 슬며시 다리가 아파 왔다.

그때였다.

취익.

커다란 버스 한 대가 밥솥에서나 날 법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앞에 멈춰섰다.

‘아이 참, 이러면 오빠 차가 안 보이는데.’

덜컥.

민호의 차가 들어오는 도로에서 잘 보이는 장소로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버스 문이 열리며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내렸다.

“오빠?”

“미안, 조금 늦었지? 오래 기다렸어?”

“아, 아니야. 얼마 안 기다렸어.”

‘버스를 몰고 온 거야? 왜?’

사람은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상황에 닥치면 패닉에 빠지게 된다. 손발이 얼어붙고 입이 잘 열리지 않는다. 지금 설란이 그러했다.

“빨리 가자.”

설란은 커다란 버스와 민호를 연달아 바라봤다. 물어볼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호는 너무나 당연한 표정으로 설란에게 어서 올라타라 손짓했다.

“하이고, 우리 공주 왔나!”

“전파상집 딸도 가는 겨?”

“아, 박씨가 가는데 딸도 가야제. 여 근처에 사는 얼라들이 공주 말고 누가 있다고.”

“설란이 오늘 서울 간다고 예쁘게도 입고 왔네!”

얼떨결에 그렇게 올라탄 버스는 더한 충격을 선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니, 어르신들이 왜 여기 계시는 거야!’

상황 파악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일단 어르신들을 만났으니 인사는 해야 했다. 설란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어르신들께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참, 아저씨는?”

“어? 아빠는 왜?”

“아저씨가 말씀 안 해 주셨어? 조금 늦는다고 했는데? 아, 저기 오시네!”

‘설마?’

멀리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남자는 결코 이번 데이트에 같이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설란은 그제야 이 사달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렸다.

‘데이트가 아니야. 동네잔치에 같이 가자는 뜻이었어…….’

설란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통화가 빠르게 재생되었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그 대화에는 단둘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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