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비닐 봉지(2)
“이것 좀 묵으라. 아가 빼짝 말라가꼬 뼈밖에 없구마잉.”
“자 믕게습다.”
철진이는 쉬지 않고 들어오는 간식거리 덕분에 양쪽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이사한 뒤에 자주 방문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시골 동네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을 보살핀 어르신들이다. 이분들 눈에는 우리 모두 가슴으로 낳은 자식과 손자다. 기저귀를 차고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보아왔던 아이가 나이가 서른이 넘고 어른처럼 차려입었다 하여 달리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 어르신들이 똥강아지가 잘 먹는다며 연신 엉덩이를 두들겨 주시는데 감히 주신 음식을 남길 수 없었다.
버스 바닥에 가득 쌓인 비닐봉지를 보고 다 먹어버리면 된다며 호기롭게 말하던 대장부는 더 이상 없었다.
철진이는 밀려오는 음식 공세에 마치 공성전이라도 하듯 힘겹게 막아내는 지친 노병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 철진이 배 터지겠어요. 그만 주세요.”
나는 보다 못해 철진이 옆에 앉은 할머니를 말렸다.
“이이? 아, 얼마나 먹었다고……. 옴마, 야가 볼이 와 이란디야!”
옆자리에 앉아서 계속 음식을 주시던 할머니는 그제야 복어 같은 얼굴로 힘겹게 음식을 씹고 있는 철진이를 확인하시고 입에 넣어주려 손에 쥐고 있던 떡을 내려놓으셨다.
“아가 체하것소! 여 식혜랑 수정과 좀 팻트로다가 가져오쇼잉!”
“너도 미련하게 그걸 다 먹고 있어. 배부르다고 해야지.”
“아니, 배부르다고 말씀드렸는데 자꾸 그럼 이것만 먹고 그만 먹으라고 하셔서…….”
천하의 철진이 입에서 그만 먹겠다는 말이 나왔다 하니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해 왔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철진이는 어르신들 사이에 앉아서 유독 심하게 당했을 뿐, 우리도 무릎 위에 여기저기서 받은 음식이 가득했다.
우리 중에서 그나마 상태가 나은 사람은 내가 유일한 듯 보였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일을 적잖이 겪다 보니 ‘먹고 있어요.’, ‘조금 있다가 먹을게요.’ 같은 말로 큰 공격을 막아낸 덕분이었다.
가장 걱정은 옆에 앉은 설란이였다.
“너도 억지로 먹지 마. 나중에 냉장고에 넣어놨다 올 때 먹으면 되니까.”
“으, 응.”
같은 동네에 살아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라며 미처 챙기지 못한 탓이었을까? 설란이도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음식을 많이 얻어먹었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자, 소화제.”
“아냐, 괜찮아.”
“지금 먹어놔. 이제 다 왔으니까.”
우리가 탄 버스는 어느덧 도심 속으로 들어와 루데타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10분 안에 도착할 게 분명했다. 모처럼 비싼 밥을 먹는데 배가 차서 다 먹지 못하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물론 철진이와 상진이 녀석은 자주 먹었을 테니 논외지만 말이다.
“형, 나도 줘.”
“안 돼. 도착해서 어르신들 속 안 좋으시면 드려야지.”
“내가 지금 안 좋다고.”
“네 한계를 단정 짓지 마. 넌 아직 더 먹을 수 있어.”
“아니, 그게 무슨…….”
나는 철진이의 엄살을 가볍게 무시하고 오랜만에 와보는 서울의 빌딩 숲을 눈에 담았다.
“다들 바쁘게 사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지 뭐.”
“아니야. 저 사람들 봐봐. 걸음이 달라.”
“어? 정말이네?”
걸음이 다르다.
어른, 아이, 지팡이를 쥔 노인까지. 저들의 걸음은 너무나 빨랐다. 빡빡한 일정 속에 걸음을 재촉해야 함은 빠듯한 서울 생활의 숙명이다.
나도 저들 사이에서 같이 부대끼며 살았을 땐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다. 지하철을 타려면 당연히 달려야 했다. 환승역까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10분 남짓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지금의 나라면 그깟 10분, 잠시 서서 노래를 듣거나 혹은 폰으로 소설이나 웹툰을 보며 때우면 그만인 시간인데 굳이 저렇게 달리듯 걷지는 않았으리라.
차로 고작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서울의 시간은 이토록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잠시 서울 구경에 빠진 사이 버스는 어느덧 루데 타워 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많이 늦었지?”
“아니므니다. 세팅도 이제 막 끝났스므니다.”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나 늦었다. 당연히 세팅이 지금 끝났을 리는 없었고 레스토랑에는 꽤 오랜 시간 준비를 마친 상태로 우리를 기다렸을 터였다. 미안함을 덜어주려는 지환이의 배려가 담긴 대답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루데타워의 라운지 층으로 향했다.
“하이고메, 이래 높은 건물을 우째 지었을랑가 몰러.”
“저짝 아래는 보이지도 않는구먼!”
어르신들은 처음 보는 풍경이 신기하셨는지 모두 창문에 붙어 어색한 동작으로 더듬더듬 폰을 열어 사진을 찍기 바쁘셨다.
“테이블은 이쪽이므니다.”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마워. 참, 계산은 이걸로 할 거니까 너도 앉아서 얼른 먹자.”
“아니므니다. 돈은 필요 없으므니다.”
“형도 꽤 괜찮게 벌어, 인마! 계산 먼저 해주세요.”
나는 만류하는 지환이를 밀쳐내고 입구에 있던 직원분에게 카드를 건넸다.
족히 몇백은 넘게 나올 가격대의 고급 레스토랑이다. 처음에는 넷이 나눠서 내자 말했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돈을 떠나 소중한 동생들과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어르신들이다. 철진이와 상진이는 버스를 직접 가져왔고 지환이도 우리의 편의를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감수했을 터였다.
남은 식사 비용은 내 몫이다.
띠링.
직원분에게 막무가내로 건넨 카드가 긁히고 안내문자가 온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쪽에 앉으면 되무니다.”
지환이가 안내한 곳에는 긴 테이블 하나가 중앙에 놓여 있었다. 모두가 앉아도 널널한 길이로 겹쳐진 테이블 위에는 고급스러운 초와 꽃들이 과하지 않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 그리고 민호 형과…….”
지환이는 나에게 무언가 더 말하려 하다가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여가 상석인가 보구먼!”
“나도 덩치가 커서 여기 앉아야겠네.”
지환이가 바라본 곳에는 2인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장미꽃잎이 가득하고 커튼까지 달려 있어 마치 작은 방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왜 그래?”
“아, 아니. 저길 그러니까…….”
그때였다.
“아, 이장, 노망났소? 싸게 일로 안 오고 뭐 하요!”
“저래 눈치가 없어가 무슨 마을 일을 한다고. 참말로.”
“이이? 아니, 나는 여가 상석이니께…….”
“형도 빨리 일어나.”
“왜? 난 덩치가 있어서 저기 앉으면 양쪽으로 좁아.”
“그래도 일어나. 남의 혼삿길 막지 말고.”
어르신들과 상진이가 2인석에 앉은 이장님과 철진이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는 기어코 나와 설란이가 앉게 되었다.
“우린 아무 곳이나 앉아도 되는데. 그냥 이장님이랑 철진이 앉으라고 말씀드려.”
“안 되므니다! 우리 레스토랑은 지정석이 원칙이므니다!”
“나 참. 야야, 커튼은 왜 내려!”
커튼으로 가려진 방에서 이렇게 마주 보고 설란이와 앉으니 분위기가 사뭇 어색했다.
“애들이 놀리려고 그러나 보다.”
난감한 사람은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설란이도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전채요리와 식전주입니다.”
다행히 직원분이 양손 가득 접시를 가져오시면서 어색한 침묵은 금방 깨졌다.
“자, 먹자. 엄청 조금 나오네. 철진이 두 번 못 시키게 감시하라고 말해놔야겠다.”
“푸흡!”
“쟨 진짜 두 번 달라고 한다니까?”
“오빠, 그만 웃겨요!”
분위기를 풀어보려 던진 실없는 농담에 설란이가 와인을 뿜었다. 하지만 힘들게 풀어낸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다시 돌아왔다.
“쟈들은 언제 식 올린디야?”
“아, 님을 봐야 뽕을 따지라. 아직 일도 없던 것 같구먼.”
“호야 아부지야 나랏일 하고 있고 여짝 전파상이야 우리 마을 척척박사 아녀. 집안 내력만 보더라도 천생연분인 겨!”
2인석에 앉아 있는 우리가 어르신들의 표적(?)이 된 탓이다. 심지어 테이블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 그런 게 아니라 무어라 변명도 하지 못하는 상황.
이렇게 계속 앉아 있다간 식사가 끝날 때쯤이 되면 신혼집과 자녀 계획까지 멋대로 세워질 판이었다.
“난 잠깐 지환이한테 좀 다녀올게. 애가 밥도 못 먹고 자꾸 돌아다니네.”
민망한 마음에 괜히 자리를 뜰 구실을 만든 나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지환이를 챙길 겸 커튼을 걷고 밖으로 잠시 나왔다.
그리고 무심결에 스치듯 바라본 테이블 한 구석에서 수저를 뜨지 않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왜 안 드세요?”
“아, 아녀. 나가 입맛이 없어. 난중에 아들이랑 손주 오면 줄까 해서리…….”
생각지도 못한 어르신의 대답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순옥이 할머니의 외동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니, 모두들 그냥 그렇게 여기고 있다. 진짜 이민을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명절, 제사, 심지어 지난겨울 심한 독감으로 병원 신세를 지셨을 때도 아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들었다.
이렇게 아픈데 자식은 어디 있냐는 원망 섞인 어르신들의 타박에 궁색한 변명으로 찾은 것이 성공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거짓말이었으리라. 비행기 타고 먼 길을 오기가 힘들어서 올해도 오지 못했다며 미국에서 큰 회사에 다니는 아들 자랑을 해야 했던 순옥이 할머니의 마음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부모는 무릇 그런 존재다.
자신을 버린 자식이 혹시나 욕먹을까 싶어 서투른 거짓말을 지어낸다.
그리고 언제고 손자와 같이 찾아올지 모르는 아들을 위해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도 참도록 만들었다.
나는 민망함에 갈 곳을 잃은 할머니의 손을 꼭 쥐였다.
버스에서 떡이나 과일 따위를 담아왔던 쭈글쭈글하고 지저분한 검은색 비닐봉지에 들어간 음식들은 넓게 퍼져 있었다.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딴에는 섞이지 않게 하려 노력하신 흔적이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
“할머니, 다 드시고 나갈 때 이 음식 그대로 다 포장해서 드리니까 맛이라도 보세요. 소화제도 챙겨왔으니까 더부룩하시면 말씀하세요.”
“여기! 지금까지 나온 요리 다시 가져다 주시므다.”
비닐봉지에 다 섞여버린 요리들을 다시 접시에 부어내니 도저히 먹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지환이가 눈치 빠르게 직원을 불러주었다.
“그려, 이따 또 포장해 준다니께 일단 드셔. 을매나 부드러운지 나가 틀니를 꼈는지도 잊어먹을 뻔했다는 거 아녀. 또 나가 소싯적에…….”
“아, 그놈의 소싯적은 무장공비도 잡고 러시아 가서 호랭이도 잡고 하여간 허풍은 이장이 아니라 대통령깜이여. 저래 지껴싸믄 입은 안 아픈가 몰러.”
순옥이 할머니의 민망함을 지우는 이장님의 허풍에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순옥이 할머니의 곁에는 어느덧 나와 세 녀석, 그리고 설란이도 자리를 옮겨 앉았다.
“할머니, 이것 좀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이? 이이.”
“이것도요!”
이날은 우리가 할머니의 아들, 딸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할머니의 비닐 봉지에 담긴 그 음식들만큼 그리움이 지워지는 날이었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