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먼저 먹는 놈이 임자(1)
어르신들과 고급레스토랑에 다녀온 뒤, 예상대로 업무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금을 확보한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덩달아 나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오늘은 출장 업무까지 잡혀 있었다.
“どんな用件で訪れましたか?(무슨 용건으로 방문하셨습니까?)”
“업무 미팅입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용건을 물은 경비원에게 나는 다급히 번역 앱을 켜고 대답을 보여주었다.
그랬다.
내가 뙤약볕 밑에서 손바닥으로 만든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는 곳은 도쿄의 중심지다.
업무 대부분은 차재훈 부장과 하시모토 부장에게 전적으로 일임했으나 내가 나서야 하는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오늘처럼 내가 반드시 가야 하는 회의도 점점 많아졌다.
무슨 일을 진행하더라도 결국 돈이다. 두 회장님께 약속받은 돈이 들어온 뒤부터는 다방면으로 진행되던 업무가 본격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미니카 샘플은 벌써 시범 테스트에 들어갔고 각종 허가서와 해외 판매 루트까지 자잘한 문제는 있었지만, 모두가 모여 심각하게 논의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은 다행히 나오지 않았다.
오늘만 잘 넘긴다면 더 이상 사업의 틀을 좌지우지하는 큰 변수는 없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 볼까?
더위에 짜증 섞인 몸부림을 치는 사이 하시모토 부장과 사전에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 * *
“저희가 입장이 곤란합니다.”
“아직 계약서도 받지 않고 사전 협의 중인데 왜 곤란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계약 부분은 하시모토 부장께서 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이미 제작진과 콘티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 일정은 빠듯하게 주고 사사건건 스토리 변경을 요청해대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
하시모토 부장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는 정곡을 찔려 순간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듯 보였다.
‘이 바닥의 생리는 내가 잘 알고 있지. 얼마 전까지 나도 그런 요구를 하던 입장이었으니까.’
불편한 자리에 앉은 상황임은 하시모토 부장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얼굴이 두꺼운 쪽이었다. 윗선의 지시였을 뿐 자신은 원치 않았다고는 하나, 계약을 질질 끌며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갑과 을.
그 속에서 앓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사정을 뻔히 알면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도, 모두 원치 않는 일이다.
“계약이 너무 지체되어 불가피하게 다른 곳과 계약하기로 했다고 한다면 뒷말이 나올 리도 없을 텐데요?”
“이번 건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 계약이 제작사의 일방적인 파기로 끝난다면 고객사 하나를 잃는 셈이다. 좁은 이쪽 업계에 돈줄 하나를 잃어버리면서까지 무리한 모험을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었군.’
이미 내부 회의로 결론을 내린 뒤 만나는 미팅이었음을 하시모토 부장은 단번에 간파했다. 난감한 얼굴로 연신 식은땀을 닦는 척하는 모습도 모두 자신이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배려에 불과했다.
“죄송하지만 이번 건은…….”
똑똑.
“이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일행분이라고 하십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MM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스 영업부 총괄이사 오카다 마사키입니다. 이쪽에 앉으시지요.”
* * *
타이밍이 좋았다. 하시모토 부장의 조금 어두운 표정을 보니 역시나 간 보기는 실패한 듯 보였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직원분이 가져다주신 아이스티를 단번에 들이켰다.
일본의 초여름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가장 얇은 여름 양복을 입고서도 빌딩 입구에 잠시 서 있는 찰나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의도했으나 그렇다고 찝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야기가 잘 안 풀렸나 보군요.”
내 말은 하시모토 부장님을 통해서 번역되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하셔도 어렵습니다.”
“어렵습니다, 라는 말씀은 아주 불가능하다는 건 아닌가 보군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소문이 빠른 업계라 들었습니다. 저희가 미니카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미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굳이 소문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기존에 미니카사업부에 있던 하시모토 부장이 스카우트 된 기업이 다름 아닌 미니카 프로구단이었으니까.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하시모토 부장이 대외적으로 MM 프로팀의 이름을 달고 나온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희 모기업이 어딘지도 아시겠군요. 편당 2억도 안 하는 이깟 만화에 신경 쓸 기업이 아니지요.”
“구, 구단주님!”
“번역해 주세요. 그대로.”
과한 꺼드럭댐이다. 초면에 하는 비즈니스 대화치고는 예의에서 한참 벗어난 말이었다.
하시모토 부장의 입을 통해서 내 말이 전해지자 총괄이사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런 모기업을 둬서 다행이지 뭡니까?”
“네?”
“저희가 그 돈을 받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테니까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오카다 마사키 감독님의 ‘오성용사’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만화라곤 못 하지만 그래도 꽤 순위권이지요. 특히 용자물답지 않게 처절하게 싸우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오성용사.
당시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애니메이션으로 주인공과 경찰차가 메인으로 나오는 전형적인 용자물이었다. 아류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따라다녔으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총괄이사가 마지막으로 감독을 맡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과하지 않은 칭찬이었다. 아니, 칭찬이라기보다는 정직한 고백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그 시절 봤던 무수히 많은 만화영화 중에 지금껏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그 뒤에 감독직에서 물러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화에 담긴 철학보다는 원작이 중요한 시대니까요.”
애니메이션에서 철학을 담는 곳은 드물다. 작품으로 칭송받으며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감독이 내는 애니메이션은 소수였으니.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제작은 한정된 인력으로 얼마나 원작을 충실히 지키느냐가 중요했다. 각본까지 짜야 하는 애니메이션은 지금처럼 완구 사업의 홍보수단으로 쓰였을 때뿐이다. 그마저도 완구회사의 입김에 사소한 컷 하나하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저희는 요구하시는 제작비만 드리고 스토리에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 딱 하나! 저희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의 콘셉트카 디자인이 있습니다. 그 두 디자인의 테마가 녹아든 미니카가 나왔으면 합니다. 그 디자인에 맞춰서 저희도 미니카 제작에 들어가겠습니다. 제작비도 시청률에 따라 추가로 지급하도록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가져온 히든카드였다. 어느새 불편한 기색을 지우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총괄이사에게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망해도 그만인 사업입니다. 일단 모기업에서 돈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는 사업이지 그 결과는 저희랑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재미있는 애니메이션 하나는 보고 싶군요.”
눈먼 돈이라는 뜻이다.
받은 돈은 일단 써야 한다. 이 당연한 진리를 모르는 부서는 없다. 비품비가 남는다면 다음 분기 비품비는 그 남은 금액만큼 차감되어 나온다. 싸구려 볼펜 대신 만년필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받은 돈은 남김없이 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눈먼 돈을 가지고 있다, 라고 시위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런 돈이 아니다. 당장에야 쓴 돈을 토해내라 하진 않겠으나 이자를 더해 갚아야 할 빚임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허풍이 필요할 때다. 이런 허풍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가 중요하다. 당연히 하시모토 부장보다는 구단의 대표인 내가 하는 것이 훨씬 파급력이 있었다.
“내부적으로 논의를 거쳐야 할 사안일 듯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슥슥.
나는 품에서 펜을 꺼내 계약서에 사인을 남겼다.
낙장불입.
제시한 조건에서 조금도 더하지 않겠다는 시위였다.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이제 순전히 눈앞에 깊은 침음을 삼키며 계약서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몫이다.
용건은 끝났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조한 악수를 끝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구단주님, 정말 통할까요?”
“통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남의 떡을 뺏어 먹기가 어디 쉽답니까? 하하.”
“제가 도움이 못 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하려 했던 말은 모두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확답을 받지 않았으니 하시모토 부장의 걱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쓸 수 있는 패는 모조리 썼다. 하시모토 부장이 없었더라면 저 회의는 성사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애니메이션 방영 일자까지 맞춰서 제작에 들어가려면 기존에 다미야가 진행하던 제작사를 뺏어 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실패한다면 우리 계획은 최소 계절 단위로 미뤄지는 참사가 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총괄이사로 있던 오카타라는 분은 아직 꿈을 놓지 않은 눈이었으니까요. 다미야에서 질질 끌며 계약하지 않은 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계약하면 그만이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니까.
“참, 저는 오늘 갈 데가 있습니다. 부장님께서는 오랜만에 집에 오셨으니 얼른 집으로 가보세요. 사무실에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출근은 월요일부터 하면 됩니다. 필요한 전화만 받아주세요.”
“네? 혹시 오늘 숙소가 없으시면 저희 집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상사는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늘 갈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
나는 내일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 차마 하시모토 부장에게는 말할 수 없는.
* * *
‘어쩐다? 이걸 믿으라고?’
오카다 총괄이사는 깍지를 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MM 프로팀이라는 곳에서 제시한 조건은 파격적이라고까지 볼 순 없었다. 계약서대로 이행만 된다면 그저 공수 오차가 조금 줄어들고 마찰이 적겠다 싶은 건이었다. 그러나 계약서에 적힌 한 줄의 간단한 문장이 문제였다.
「MM 프로팀(이하 갑)에서는 본즈(이하 을)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제작비 지원과 미니카 초기 디자인(2개)을 제외한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는다.」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도 된단 말이지?’
오리지널 각본을 도맡아 제작하는 상황에서 돈줄이 갑질을 하지 않겠다 선언함은 영업부 총괄이사가 아닌 감독의 입장으로 본다면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주인공은 누구로 하지? 팀으로 할까? 아니면 성인도 괜찮으려나? 뭐 어때! 스토리에서 손을 떼겠다는데!’
“나 참,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구단주의 말대로 아직 내부 논의도 거치지 않은 사안이다.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이미 결정된 거절 의사를 정중하게 밝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혹평을 들으며 등 떠밀리듯 감독직에서 물러나 인맥을 통해 겨우겨우 이 바닥에 붙어 있는 몸이다.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손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애니메이션을 다시 한번 만들 수 있다면.
벌떡.
의자가 뒤로 밀려나 벽에 부딪칠 정도로 강하게 일어난 오카다 총괄이사는 회의실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어쩐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천진난만해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