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93화 (93/151)

#93. 먼저 먹는 놈이 임자(2)

「민호: 이거 꼭 사야 해?

철진: 당연하지.

상진: 형, 거기 가면 무조건 있다잖아요. 한국에서는 구하지도 못한대요.

민호: 후… 일단 가보긴 할게.

지환: 역시 민호 형!

민호: 야, 근데 지환이 넌 일본 자주 오잖아. 네가 사면 되겠구먼.

민호: 쟤 또 읽씹하고 있지?

철진: 아 케톡하는 사이 다녀왔겠다.」

이것들이 진짜.

나는 케톡을 닫고 지도 앱을 열어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없는 밋밋한 가요가 흘러나오는 이곳은 도쿄의 중심지 아키하바라.

빠듯한 출장 일정을 쪼개 여기까지 오게 된 사건의 발단은 지난주에 짬을 내 오랜만에 문방구에 놀러 온 무릅 형과 성준이 형이었다.

* * *

“형, 허리 안 아프세요?”

나는 아침부터 목욕탕 의자에 앉아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는 성준이 형과 무릅 형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거 하고 있으면 아픈 줄도 몰라.”

“우리는 슬슬 질리던데.”

퀸오파98은 지금까지도 명작이라 마니아들에게 칭송받는 게임이지만 하루 용돈의 대부분을 이 게임에 투자하는 세 녀석도 슬슬 질려가는 참이었다.

“형! 우리 이거 다른 팩 좀 구해달라고 하자.”

“야, 그냥 해. 너 아직 끝판왕도 못 깨잖아. 하루 2천 원 버는 게임기에 또 무슨 팩을 사래.”

“사고 싶어도 이거 기종이 진짜 오래되어서 이제 팩도 거의 안 보여.”

“정말요?”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성준이 형이 설명했다.

“여기저기 쑤셔보면 그래도 몇 개 나오긴 할 텐데, 이게 조금만 상태가 안 좋으면 쇼트가 나서 게임기가 망가질 수도 있거든. 여기 들어간 퀸오파 98도 내가 혹시나 해서 따로 보관하던 거야.”

절대 안 될 말이다. 우리 문방구 재산 1호인 게임기가 망가질 수도 있다니!

이 게임기를 복원하는 데만 적지 않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갔다. 여기저기 전화하고 전파상 아저씨께 부탁해가며 어렵게 만든 녀석이 또 다시 고장 난다고 하면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형이 없다고 하면 한국에선 못 찾겠네요.”

성준이 형은 사업도 형수님께 맡기다시피 한 채, 중고 게임기 카페를 더 열성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성준이 형이 찾지 못한다 하면 발품을 파는 것조차 헛된 노력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럼 일본은요?”

“일본?”

“네, 민호 형 다음 주에 일본으로 출장 가거든요!”

“일본엔 또 내가 자주 거래하던 곳이 있지. 거긴 그래도 매물이 좀 있을걸? 한번 물어봐 줄까?”

한창 조이스틱을 바쁘게 놀리던 성준이 형 특유의 ‘내가 다 해결해 줄게.’식 허세가 또 나왔다.

“아뇨, 괜찮… 읍!”

“네!”

철진이가 내 입을 막고 상진이가 대신 대답을 했다. 이럴 때는 친형제가 맞나 보다.

“아, 모시모시? 스즈카 상?”

유창한 일본어로 한참을 통화하던 성준이 형은 급하게 무릅 형의 전화기를 뺏어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하이하이. 아리가또.”

“있대요!?”

“어디 보자……. 킨오바99, 철건테그, 던전드래곤, 삼국지전기, 그리고 걸스패닉. 이렇게 있다네.”

이번만큼은 허세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품 게임들로만 엄선된 목록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전부 사고 싶을 정도의 라인업이다.

그런데 걸스패닉이라고?

“형. 걸스패닉이라고 했어요, 방금?”

“그러게, 걸스패닉……. 잠깐만!”

내 질문에 무언가 깨달은 성준이 형은 다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하이! 하이! 모시아케 아리마셍!”

“버전은요?”

특히 걸스패닉이 무슨 게임인지 아는 나와 무릅 형은 마른침을 삼키며 성준이 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걸스패닉.

그 시절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준 게임 중 하나다.

기본적인 게임은 단순한 땅따먹기에 불과했다. 적의 공격을 피해 조금씩 전진해서 땅을 늘려가다 80% 이상 땅을 차지하면 클리어가 되는 방식.

하지만 이 단순한 게임에 우리가 열광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수위다.

근본 있는 오락실이라면 이 걸스패닉은 오락실의 가장 구석진 곳에 비치되어 있었다. 그건 이 걸스패닉이 당시 그 엄격한 심의를 어떻게 뚫었는지 모를 정도로 수위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땅을 늘려갈 때마다 배경의 야릇한 그림은 점점 그 실체를 드러내고 그렇게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은 한 명이었으나 모두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그야말로 대화합의 장이 바로 걸스패닉이 설치된 오락기였다.

하루가 멀다고 의자가 날아다니는 거친 야생의 땅. 이곳에서 걸스패닉은 유일한 중립지역이자 심심치 않게 아이들의 돈을 갈취하던 불량배들도 클리어를 앞두고 죽은 사람에게 백 원을 건네게 만드는 기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중요 부위가 나오지도 않는 그깟 그래픽 한 장이 무슨 대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그 시절을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이리라!

그리고 이 걸스패닉에는 그 옛날부터 내려오던 도시 전설이 있었다.

‘일본판은 더 야하다.’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직접 보았다 했지만 전부 건너 들은 풍운에 불과했다. 그렇게 소문은 소문을 낳았다.

‘그래도 모자이크가 되어 있다.’

‘아니다. 전부 나온다.’

‘남자 버전도 있다.’

‘사실은 한국 버전도 있는데 특정 조건을 클리어해야지만 볼 수 있다.’

등등.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걷잡을 수 없는 소문의 끝은 끝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그 전설의 실체를 마주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일본판, 한국판. 둘 다 있대.”

“세상에!”

“잠깐만요. 그런데 그걸 여기서 하겠다고요? 안 됩니다!”

흥분이 가라앉고 갑자기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 게임은 도저히 문방구 앞에서 할 만한 게임이 아니었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인트로 화면만 나온다면야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문방구는 마을 회관과 붙어 있다. 어르신들이 오가시며 인사를 하고 날도 더운데 뭘 그리 열심히 하고 있냐며 슬며시 평상에 앉아 구경도 하시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공연하게 문방구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기에 구단의 직원들이나 혹은 어르신들의 가족들도 가끔 들러 장난감을 사 간다.

도저히 그런 농도 짙은 고수위 게임을 밖에 내놓고 할 만한 곳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게임인데 그래?”

“이거네. 걸스패닉.”

당연히 이 게임을 알 리가 없는 두 형제는 뒤늦게 너튜브에 걸스패닉을 검색해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억지는 내가 감내해야 할 업보였다.

“집 안에서 하면 되잖아.”

“할 때마다 그걸 방 안으로 들고 오려고? 아서라.”

“아니면 큰 봉고차를 가져와서 그 안에서 하는 건 어떻스므니까?”

“그게 제일 수상해. 신고당한다, 그러다.”

“그냥 다 가리고 하면 안 돼? 이렇게 다섯이 몰려 있으면 뒤에서 안 보일 것 같은데?”

“그러네! 잠깐 이렇게 둘러서 봐! 형! 어때? 안 보이지?”

끝나지 않을 창과 방패의 싸움.

나는 혼자지만 저들은 간만에 온 성준이 형과 무릅 형까지 무려 다섯이었다. 그러나 되지 않을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쌓아온 평판에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민호야, 이거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물어본 사람이 있어서 늦으면 재고가 없을 수도 있대. 예약제는 아니니까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데?”

성준이 형의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그럭저럭 단호하게 막아내던 내 눈빛의 흔들림을 간파당한 것이었을까?

다섯 명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내내 틈만 나면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싸움의 패배자는 내가 되었다.

“휴. 알았어. 일단 가보기는 할게. 이제 됐지?”

“사 오라고요!”

“사 오라고!”

* * *

그렇게 나는 팔자에도 없는 이곳 아키하바라에 오게 되었다.

뭐 어차피 당일 비행기로 출발할 생각은 없었다. 미팅이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데 덜컥 저녁 비행기를 예약할 순 없었으니까.

일이 잘 풀린다면 그날 곧장 술자리를 가질 수도 있다는 김칫국을 마신 게 독이 되었다. 일정이 바빠 들르지 못했다는 핑계도 대지 못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곳은 정말 별천지다. 사방에 애니메이션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호객꾼들과 메이드가 넘쳐났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했다. 방긋방긋 웃으며 내미는 전단지와 몇 개 들어 있지도 않는 구색만 갖춘 티슈를 벌써 양손 가득 받아버렸다. 이게 다가 아니다. 게임팩을 넣을 가방에도 벌써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지도 앱을 켜보니 앞으로 남은 거리는 다섯 블록. 찌는 듯한 더위에 부채질할 손도 없이 그렇게 나는 힘겨운 여정을 계속 이어갔다.

한참을 땀범벅이 되어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지도 앱에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팝업창이 나왔다.

“키… 아노… 스케.”

여기다.

성준이 형이 보내준 가게 명칭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건물을 찾았다. 하지만 이곳은 중고 게임팩 매장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형, 도착은 했는데 여기 게임팩 파는 곳이 아닌데요? 메이드 카페 같은데…….”

(어, 거기 사장이 메이드 카페랑 같이 하고 있어. 들어가서 게임팩 사러 왔다고 하면 안내해 줄 거야. )

“네. 일단 들어가 볼게요.”

한 명이 겨우 어깨를 돌려 들어갈 법한 일본 특유의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에는 레이스가 과하게 달린 커튼이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휴우…….”

정말 들어가기 싫은 문이다.

“아! 곤니찌와 요코조!”

슬며시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던 나를 발견한 메이드분들이 양손을 반갑게 흔들며 달려오셨다.

“저, 사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한국분이시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사장님을…….”

“메뉴는 여기 있습니다! 어떤 음식으로 주문하시겠어요?”

“아니, 사장님을…….”

“추가 요금을 내시면 주인님만을 위한 특별 공연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이 여자.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두꺼운 화장 속 관록이 엿보였다. 어눌한 일본어가 약점인 나를 이용해 매출을 올리려는 얄팍한 심산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빠르고 유창한 일본어로 내 혼을 빼놓으려 했다.

가소롭기 그지없다.

사회생활 경력만 9년 차. 온갖 더러운 꼴을 다 겪고 구를 대로 굴렀다. 그뿐이랴? 세계적인 기업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의 회장님 앞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펴고 거래했던 나다.

이제 막 사회에 나와 채 1년이나 했을 법한 어색한 접객은 제 딴엔 아무리 관록이 쌓였다 해도 나에겐 햇병아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사장님을 찾아왔다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가볍게 끝나는 승부.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게임이다.

미안하지만 이런 유치한 호객행위에 어울려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나는 메뉴판을 덮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스페셜 러브 모에 오므라이스와 나만의 아이돌 콘서트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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