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98화 (98/151)

#98. 걸스 패닉(4)

「민호: 배신자들아!

철진: 아, 우린 원래 가려고 했어.

상진: 좀 그렇잖아요. ㅋㅋㅋ」

나는 애꿎은 먼지떨이를 이리저리 두드리며 울분을 담은 케톡을 보냈다.

사실 다섯 명의 행동은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민망한 상황을 벗어남과 동시에 성준이 형과 무릅 형은 정말 오락기 수리를 위해 방문한 사람처럼 여기게 했으니까 말이다. 오락기 수리가 끝났다는데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 어설픈 변명이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알아차려도 모른 척해 주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오락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청소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혹시나 있을 설란이의 질문에 대답할 또 다른 변명을 생각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일본판을 못 구한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일본판에는 정말 뒤가 없는 수위로 나오니 말이다.

그러나 설란이는 의외로 꽤 오랫동안 오락기 앞에 앉아 있었다. 동전을 그리 많이 가져오진 않았을 텐데…….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며시 밖으로 나와 빗질을 하며 설란이 쪽으로 다가갔다.

“잘돼 가?”

“응. 재미있네. 이거 나 중학교 다닐 때 진짜 열심히 했었는데.”

“피시방에 안 가고?”

“거긴 담배도 엄청 피우고 그래서 여자애들은 잘 안 갔어. 우린 오락실을 더 많이 갔지. 동전노래방도 붙어 있었으니까.”

설란이가 중학교 시절이라 함은 디디엘과 팜프의 시대가 저물고 피시방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다. 남자아이들이야 당연히 피시방에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지만, 그때를 떠올려보니 여자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남자아이들은 축구와 농구, 피시방을 다니며 오락실은 그저 친구들이 모이기 전 시간 때우기로 들르는 정도였다.

그곳에 여자아이들이 자주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 깼다!”

“뭐? 진짜?”

슬그머니 이야기를 던지며 다가가 곁눈질로 게임을 구경할까 했던 내 계획은 박살 나버렸다.

황급히 달려와 화면을 보니 이미 설란이는 랭킹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기고 있었다.

B.S.L.

오락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꺾을 수 없는 경지.

게임이 끝나면 10명 남짓한 사람만 남길 수 있는 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남기는 자는 극소수였다. 운이 좋아 10위 안에 들 만한 고득점을 얻었다 해도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1위를 하지 못하는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아니, 그것은 치욕이었다.

닿지 못한 절대자의 밑이라도 머리를 숙여 들어가 이름을 남겨보겠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하루치 용돈을 들고 모인 전사들에게 타협은 곧 패배다.

그리고 패배자는 간혹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1위에게 받는 훈수가 그것이다.

1위로 이름을 남긴 고수는 바로 그 자리를 뜨지 않는다. 하이에나처럼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게임기에 누군가 앉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먹잇감이 자신보다 낮은 점수로 이름을 남긴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오빠도 이 게임 해봤어? 이거 2인용으로 같이하면 재미있는데.”

설란. 너는 더욱 잔인하구나. 하이에나처럼 모욕을 고수의 너그러운 가르침으로 포장해 상대방을 찍어누르려는 그 작태를 서슴없이 저지르다니.

고수들의 대결에서 진 상대방이 아닌 이제 막 검을 든 초보를 옆에 앉혀 놓고 마치 대단한 무공의 구결을 알려주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꼴은 지금껏 오락실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다.

‘타이밍에 맞게.’

‘잘 피해서.’

‘이 패턴을 조심해야 한다.’

따위의 국·영·수를 중심으로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라는 정도의, 도움도 되지 않을 두루뭉술한 팁들을 알려주면서 오락실 만천하에 널리 공표하는 것이다.

‘이자는 나보다 아래다.’라고.

원숭이 우리에서 자신의 입지를 가장 쉽고 빠르게 다지려면 만만한 원숭이를 찾아 싸워 이기면 된다. 야만적이지만 지극히 효율적이고 실패 확률이 낮다.

그 야만적인 행위를 설란은 이 작은 문방구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려 했다.

하나 나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니. 난 킨오파나 철건 했지.”

간단한 회피다.

무림인은 무림인이 아닌 자에게 검을 휘두를 수 없다. 무림의 법도가 그러했다. 강해지기 위해 금지된 무공도 서슴없이 익히는 사파(邪派)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때문에 대결로 승패가 갈림은 같은 게임을 하는 자에게 국한된다. ‘안 하는 게임이다.’라고 하면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은 비록 햇병아리에 불과하나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수 없다.

설란. 자만하지 마라. 밤낮으로 수련해 반드시 그 이니셜 위에 내 이름을 새겨줄 것이다. 오늘은 그날을 위해 잠시 발톱을 숨기는…….

“그래? 그럼 내가 알려줄게! 여기 앉아봐!”

“어?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너 한 판 더 해.”

“빨리 와! 나 동전 두 개 넣었어!”

설란이는 목욕탕 의자를 옆으로 끌어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는 빨리 와 앉으라 다급하게 손짓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게임을 모른다는 사람에게 굳이 동전까지 넣어주며 같이하자 할 줄이야!

설란. 너는 어찌 검을 수련한 자가 인륜까지 저버린단 말이냐? 정녕 부녀자와 아이에게까지 서슴없이 검을 휘두르는 잔악무도한 마두였던 것이더냐?

기어코 비무를 가장한 생사결에 나를 앉힐 작정이라면 너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빼앗은 왕관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고결함, 권위, 명예, 그 어느 것도.

그저 화려한 쇳덩어리에 불과한 왕관을 쓰고서 홀로 지존이라 칭한다 한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네가 그 공허한 황무지에 홀로 남아 왕을 자처할 각오가 되었다면 오냐. 나 역시 말리지 않겠다.

나는 그렇게 설란이의 손길에 이끌려 오락기 앞에 앉았다.

몸이 가까워지자 코끝에 이름 모를 향수의 향기가 살짝 스치고 조도가 낮은 브라운관 화면에는 이미 다 자라버린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정오를 막 지난 따가운 햇빛이 어쩐지 더 강하게 느껴지는 탓에 자꾸만 얼굴이 붉어졌다.

* * *

같은 시각,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도 마치 한여름 땡볕에 서 있는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사람이 또 있었다.

“오카타 상, 예술병이라도 도진 겁니까? 기존 계약을 파기하고 한국업체와 계약하자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직접 감독직을 맡겠다고요?”

“압니다. 제가 맡았던 작품들이 그리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 제 요청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도요.”

“그런데 왜 이런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까?”

경영진들은 오카타 총괄이사가 하는 말이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영업부 총괄이사 자리에 앉힌 오카타는 무난한 사람이었다. 그럭저럭 이쪽 업계에 잔뼈가 굵어 전반적인 업무를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그런저런 성적에 다른 용자물의 모방이었으나 감독이라는 이름까지 박은 작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카다의 마지막 날갯짓이었다. 특별한 작품성이 보이지 않는 24화짜리 애니메이션 시리즈 하나를 만든 감독. 그 이상의 평가는 없었다.

급변하는 시장은 늘 독창적이고 새로운 작품을 원했고 CG를 사용한 기술력도 나날이 발전했다.

아무런 트로피도 없는 어중간한 감독에게 작품을 맡길 팔자 좋은 회사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너무 낮은 정점을 찍은 감독에게 영업부 총괄이사의 자리는 오히려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무난한 작품을 만든 무난한 사람. 오카타에게 그 타이틀은 소위 예술병에 걸린 벽창호 같은 다른 감독들의 최후보다 오히려 낫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오카타 총괄이사가 정년퇴직까지 높은 급여로 보장된 자리는 내려놓고 갑자기 감독을 맡고 싶다는 말을 꺼냈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이름 없는 작은 작업실에 무작정 배우게만 해달라 하고 찾아가 사정해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실무에서 오랫동안 손을 뗀 제게 남은 기회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희가 거절할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총괄이사는 지금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해주고 계십니다.”

이젠 펜이 아닌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시대다. 옛 방식을 고집하는 회사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렇게 해도 천문학적인 수익을 벌어들이는 곳의 사정이었다. 공장처럼 단가가 맞춰져 찍어내는 반스는 적당히 컴퓨터 기술로 제작 단가를 줄이며 단가와 작품을 타협하는 무난한 감독이 필요했다. 그 옛날 오카타처럼 말이다.

“며칠 전. MM의 구단주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업계 평균을 웃도는 돈을 줄 테니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보라면서요.”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계약서도 봤고요. 설사 그 계약을 진행한다 해도 감독은 이미 다미야에서 진행하던 작품의 감독이면 됩니다. 오, 오카타 총괄이사!”

당혹스러운 외침이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오카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억지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급여도 원하지 않습니다. 부족하다면 제가 가진 돈을 모두 제작비를 보태겠습니다. 그렇게라도 다시 한번 제 손으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

그간 쌓아온 인맥과 경험을 대가로 얻은 직책, 돈, 사내의 자존심까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빠듯하게 계산기를 두들겨 실익을 따지는 저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바로 어제까지 저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결과가 초라할지도 몰랐다. 또 이전과 같은 별 볼 일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초라한 성적으로 끝날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꿈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좋은 차, 좋은 집, 넉넉한 저금으로 노후까지 보장된 길을 스스로 걷어찬 머저리라 불러도 좋다.

‘나에게도 아직 남아 있다. 꿈틀거리는 열정과 무한한 상상력이.’

이미 작품을 구상하느라 매일 밤을 연습장과 씨름하는 오카타의 간절함은 눈물과 한이 담긴 울음이 섞였다.

그때였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카타…….”

“네, 회장님.”

“어디… 마음대로 해보게. 나도 자네와 같은 꿈을 꾸고 싶구먼…….”

“회장님! 그냥 제작비만 받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만약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회사 이미지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습니다!”

“다미야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른 완구회사와의 계약도 걱정입니다.”

당황한 경영진들의 만류가 이어졌다. 분명 득보다 실이 많은 선택이었기에 회사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처사였다.

“우리는 오카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만화를 그리는 회사였어……. 그 옛날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걸 잊고 있었으니 이렇게 인력사무소 같은 곳으로 변해버린 게야. 나도 이 일에 책임을 지겠네. 그러니 이번 건은 내 말에 따라주게.”

“회, 회장님!”

회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회장님의 자리도 오카타의 꿈 타령에 같이 묶여버렸다.

그렇게 반스의 사활을 건 프로젝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의 부축을 받고 걸어 나가던 회장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참, MM이라고 했나? 따로 연락해서 만날 자리를 마련했으면 하는데. 그래도 이 늙은이의 목을 걸었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하지 않겠나? 담이 작은 오카타 이사를 이리 들쑤신 걸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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