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06화 (106/151)

#106. 구슬치기(3)

“아버지야?”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철진이가 되려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정진수 회장님.”

“그분이 왜요?”

많은 뜻을 함축한 질문이다. 왜 나에게 연락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연락했으며 나는 왜 당황해서 여러 번 되물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구슬을 좀 더 사고 싶으신데 재고가 있냐고 물으셨어.”

“뭐? 그럼 우리는!”

“요즘은 주문 넣으면 바로바로 들어오니까 괜찮아.”

살 수 있는 개수가 한정적인 시골 문방구다. 회장님이 따로 발주를 받아주시기 전에 처참했던 재고 상황을 한번 겪었던 철진이가 깜짝 놀란 것도 이해가 된다.

“편은 어떻게 하므니까?”

“하. 건방지게 편은 무슨. 나랑 다른 편 되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무조건 개인전이야.”

구슬치기는 대부분 개인전이다. 많게는 1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곤 했다. 필드에 깔린 구슬만 10개. 각자 차례를 기다려 들어갔던 홀을 세는 것도 헷갈리는 판국에, 무언가 팀플레이를 할 만한 경기가 아니다.

“나부터 하겠스므니다.”

딱.

“오! 알바트로스라도 노리는 거야?”

지환이는 과감하게 첫 번째 홀 근처로 구슬을 밀어 넣어 다음 타에 점수를 낼 기회를 얻었다. 골프에서는 2타로 롱홀에 넣는 알바트로스는 기념 트로피를 받을 경사지만 좁은 경기장을 쓰는 구슬치기에서는 중, 고수에게 기본적인 점수다.

손가락을 튕겨 구슬을 쳐내는 지극히 단순한 놀이. 힘 조절이 가장 중요했다. 출발선부터 홀까지의 거리는 고작 3m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슬의 무게와 땅의 마찰, 그리고 경사까지 고려하면 의외로 실력에 더해 운도 상당히 크게 작용하곤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듯이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조금만 실수를 한다면 허무하게 점수 격차가 벌어진다.

지환이의 첫 번째 타격은 나조차도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깔끔했다.

툭.

뒤이은 상진이와 철진이의 구슬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구슬치기. 잘못 쳤다간 홀에서 얼마나 멀어질지 장담할 수 없기에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안전한 방법을 추구할 작정이겠지. 이 역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홀은 9개나 있고 뒤이은 홀들은 그 간격이 짧아 미리 감을 잡아두는 게 오히려 후반을 도모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다르다.

딱.

내 구슬은 직선거리에 있는 지환이의 구슬을 저 멀리 튕겨내고는 그 자리를 차지했다.

“뭐 하는 짓이므니까!”

“하! 바닥에 엎드려서 하는 경기가 그럼 신사적인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다.

지금이야 연습 경기 삼아 빠빠우를 걸고 하지만 원래는 경기에 나온 구슬을 걸고 하는 게임이다. 순위권에 들거나 혹은 1등이 모든 구슬을 가져가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경기에서 상대방 구슬을 피해 코스를 노리는 매너 따위를 바란다면 이 험난한 야생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아니, 빠빠우를 걸었다 해도 4명분의 빠빠우는 구슬을 한 개씩 건 것보다 훨씬 비싼 대가다. 적어도 꼴찌만은 면해야 한다.

“좋스므니다. 어떻게 하는지 알겠스므니다.”

내가 구슬로 밀어내 꽤 멀리 떨어진 지환이가 적절한 힘 조절로 다시 코스에 돌아왔다.

“어? 왜 형 구슬 안 때려?”

“지환이가 똑똑한 거야.”

분노는 시야를 어둡게 한다. 만약 지환이가 분에 겨워 내 구슬을 노린다면 결국 자신도 순위에서 멀어지게 된다. 내 구슬을 치는 데 소중한 한 타수를 낭비하게 되니까 말이다. 철진이와 상진이가 무난하게 1, 2위로 안착하고 나와 1:1 대결을 펼치는 참사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러네. 이게 무턱대고 남의 구슬을 쳐낸다고 다가 아니네요.”

지환이의 첫 번째 수는 결과적으로 악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내가 가는 코스에 남의 구슬이 있다면 당연히 맛있는 먹잇감이 된다. 굳이 가까운 코스를 멀리 돌아가고 확실한 기회가 아니면 살짝 건드리기만 해서 다음 수를 관망하는 고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피지컬 게임이 내 밀어내기 한 번에 치열한 심리전에 되어버린 것이다.

“일단 저 멀리 튕겨내면 돌아오는 데 엄청 오래 걸릴 거 아냐?”

“뭐?”

철진이의 말은 상식을 뒤엎는 수준이었다.

분명 철진이의 저 두꺼운 손가락으로 구슬을 때린다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질 터였다.

“당구처럼 하면 되잖아. 너랑 형, 두 개 전부 운동장까지 날려버리지 뭐.”

공교롭게도 철진이의 구슬 앞에는 상진이와 내 구슬이 있었다. 두 개가 연달아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최소한 철진이 구슬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상진이의 구슬은 운명이 이미 정해진 듯 보였다.

“친다!”

“자, 잠깐만!”

“승부의 세계에 잠깐이 어디 있어! 흐압!”

상진이의 다급한 만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팔까지 걷어붙인 철진이는 두꺼운 팔뚝 위에 힘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따악.

맑고 청명한 소리와 함께 구슬이 쏘아져 나갔다. 손톱이 부러지진 않았을까 싶은 엄청난 타격음.

하지만 철진이의 구슬은 아쉽게도 상진이의 구슬에 닿지 못했다. 너무 강하게 때린 탓에 높게 떠 상진이의 구슬 위를 지나쳐 날았다. 그리고 그 구슬은 영 좋지 못한 곳을 때렸다.

퍽.

“악!”

지환이는 단말마와 함께 중요 부위를 감싸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푸하하!”

“웃을 일이 아니므니다! 으으… 진짜 아프므니다! 철진 상이 다른 구슬을 맞췄으므니다!”

나는 쓰러진 지환이의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박장대소하는 철진이처럼 웃기에는 지환이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그래도 두 개를 맞추긴 했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므니까!”

어릴 땐 그저 재미있는 놀이였지만 나이가 들고 하려니 이런 익스트림 스포츠가 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로우블로로 부상이 일어났기에 국제 규격에 따라 경기는 무효화되었다. 지환이는 계속할 수 있다 했지만, 부상 부위가 부위인 만큼 병원에서의 검사는 불가피했다.

아쉽지만 오늘 구슬치기는 여기까지다.

우장춘 박사님, 보고 계시죠? 여기 머리 대신 구슬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들 뻔한 후손이 있습니다.

* * *

“아니, 갑자기 애들은 왜 또 아버님 댁으로 보내라는 거예요?”

이제 막 집에 돌아와 모처럼 쉬어보려는 찰나 불편한 소식을 접한 여인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노인네 아프고 나니까 손자들 애교 좀 더 보고 싶은 거지 뭐. 적당히 비위 맞춰 드리자고.”

“애들 내일 과외랑 학원도 있는데.”

“그러게 아까 폰 뺏고 노인네랑 같이 놀라 그랬으면 됐잖아.”

“아버님이 괜찮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떡해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막말로 그때 도윤이만 놔두고 둘 다 할아버지 따라갔어 봐! 아찔하다, 진짜.”

남자는 아버지 집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 다시 떠올라 짜증이 솟구쳤다.

이미 공공연하게 회사를 이을 다음 후계자가 자신이라 알려진 상황이었다. 둘째와 셋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버지가 물러나면 적당한 생색내기용 계열사만 떼어주고 입을 닦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아슬아슬하게 경영권을 방어할 지분만 넘겨주고 계셨다.

살얼음판.

이 미세한 균형이 깨지면 둘째와 셋째가 이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 가지고 계신 지분과 아버지를 따르는 다른 주주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회장 자리에 앉기도 전에 쫓겨날 판국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카들이 점수를 딸 뻔했다는 사실이 남자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잔말 말고 내일 애들 오전 수업 끝나면 바로 노인네 집으로 보내! 그리고 젠장맞을 그 폰은 쥐여줄 생각도 하지 마!”

* * *

“어휴, 애들 바쁠 텐데 뭐 하러 또 오라고 해요.”

“우리가 그렇게 감싸고 도니까 애들이 저렇게 커버린 거야.”

수수한 개량한복을 입고서 한창 뜨개질에 열중하던 아내의 나지막한 핀잔에 정진수 회장은 답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리 역정을 내셔요. 다 장성해서 이렇게 아버지 아프다고 찾아오는 게 얼마나 기특해요.”

“거 참. 사람 속 편한 소리! 저놈들 허우대만 멀쩡하지 하는 짓은 꼭 우리 어릴 때랑 똑같다니까.”

“씨도둑은 못 속인다고 그럼 잘 큰 게 맞네요.”

“우리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애들 멱살 잡고 싸우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게 형제분들이랑 잘 지내지 그러셨어요.”

“아, 이 사람아. 그거야…….”

말을 잇지 못한 정진수 회장은 냉수를 찾아 주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했던가? 정진수 회장이 딱 그 꼴이었다.

형제들과 피 튀기는 혈전 끝에 회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시고 후계 구도가 잡히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기엔 그 타격이 너무나 컸었다. 형제들과는 연을 끊은 지 오래고 그렇게 찢어진 회사를 다시 일으키는 데 청춘을 다 바쳤다.

그러나 아내의 말대로 씨도둑은 못 속이는지 아들놈들이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세 아들 중 특출난 능력을 보이는 녀석도 없었고 그저 욕심만 그득해 서로를 잡아먹으려 안달이었다.

‘회사를 좀 찢어먹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자식놈들 길거리에 나앉는 꼴을 보고 싶진 않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 회사와 재물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남은 자식들이 모두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어느 부모와 같았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말은 옛말이다. 무리하게 경영권을 따내려 여기저기서 총알을 긁어모으다 실패하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는다.

그래도 같은 핏줄이라 먹고살 길을 열어주면 다행이다. 하지만 자신은 끝내 형과 동생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용역 깡패까지 동원해 마음이 여린 아내를 겁박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똑 닮은 자식들이 그리 자랑스럽지 못함은 지난날의 과오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라.

“또 몸에 안 좋게 찬물 드신다. 조금만 계셔요. 차 내올 테니.”

정수기에 한참 냉수를 받던 컵을 뺏어 든 아내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속앓이를 무던히도 많이 했을 아내다. 정진수 회장은 그런 아내에게 차마 자식을 잘못 키웠으니 또 그런 꼴을 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손자들 말이야.”

“네, 말씀하셔요.”

“좋은 선생이 있어서 말이지. 내일 좀 데려가 볼까 해.”

“하이고. 뭐 애들은 그런 선생 못 구한대요? 다 서울대에 외국 출신 선생들이더구먼요.”

“아니, 그런 선생이 아니고… 아, 하여간 있어!”

한 해 자식 농사가 망했다 해서 그 땅에 곡식이 다시 자라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정진수 회장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손자들에게 희망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확인을 시켜줄 사람은 삼정그룹의 두 젊은 사자를 단시간에 키워낸 민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손자들이 그런 민호에게 조금이라도 배워가는 것이 있다면 자신과 자식들과는 다른 길을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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