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07화 (107/151)

#107. 구슬치기(4)

탈탈탈탈.

퇴근길에 마주친 경운기는 좁은 시골길에선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 내 경차는 차선 밖에 바퀴를 걸치다시피 하면 굳이 후진하지 않고서도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경운기는 가던 길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은 일찍 오는 겨?”

“네. 손님이 오기로 해서요. 이장님은 어디 가세요?”

“이이. 논에 피 뽑으러 가제. 요새 유기농인지 뭐신지 한다고 아주 일거리가 배로 늘은 겨. 약 한 번 뿌리면 싹 없어질 걸 자식놈들 맥인다고 우렁이랑 오리만 하니께. 할마시들 그렇다고 땡볕에 나와서 잡초 뽑으라 할 수도 없고 말여.”

경운기 엔진 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이장님의 말은 너무나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적적할 때마다 하시는 마을 방송으로 단련된 스피킹은 실로 엄청난 발성이셨다.

“참 옛날에는 이맘때쯤 되면 학생들이 놀러 와서 일손도 돕고 그랬는데 말여. 요샌 통 그러질 않어.”

“어휴, 요즘은 하기 힘들죠.”

농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따금 무더운 여름이나 가을이 되면 엠티 삼아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오곤 했다.

운동권의 잔재니 현대사회에서 일당도 없이 그런 봉사가 있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도 잘 모르는 일이다.

그냥 그 시절은 그러했다.

학생들이 오면 마을에서 가장 잘 먹인 돼지를 잡아 일주일 내내 잔치를 열고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과일, 채소 한 아름과 용돈을 쥐여주는 게 1년에 두 번 있는 큰 마을 행사였다.

“저번엔 말여, 한 놈이 새참 막걸리에 거하게 취해가지고, 아 글쎄 피 대신 멀쩡한 벼를 다 뽑아논겨. 그때 얼매나 웃겼던지 아, 봉식이 할배는 웃다가 틀니도 논에 빠트려서 잃어버리고 말여.”

수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마치 작년에 일어난 일처럼 말하는 이장님의 표정에는 웃음꽃이 가득해 차마 이제 가봐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나도 어느새 이장님의 말에 취했는지 큰 기타를 매고 학교로 찾아와 노래와 춤을 알려주는 형과 누나들을 무던히도 졸졸 따라다니다 헤어질 때가 되면 마을버스를 따라 달리며 펑펑 울었던 추억이 해묵은 기억 속에서 비죽 튀어나왔다.

“아이고, 왜 멀쩡한 길을 막고 그랴!”

내 차 뒤에서 호미를 휘휘 저으며 이장님을 다그치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윗집 할머니셨다. 해가 뜨기 전 무더위를 피해 밭일을 다녀오셨는지 바지와 앞치마에 흙이 가득하셨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그랴. 이장, 또 우리 호야 잡고 못살게 굴제?”

“아, 만나서 인사한 겨, 인사! 그럼 조심해서 가드라고!”

경운기가 다시 움직이고 길 한쪽에 도랑을 두고 아슬아슬하게 피해 있던 내 차도 비로소 도로로 다시 올라올 수 있었다.

“할머니, 타세요!”

“이이? 아녀아녀. 저짝 코앞인데 차 더러워지면 우짤라고.”

“이미 더러워서 괜찮아요! 빨리 타세요!”

실제로도 그랬다.

깨진 유리창 효과인지 키로 수에 맞춰 꼬박꼬박 정비는 받지만 1년에 세차는 명절 두 번이 끝이다. 이미 명절을 한참 지난 내 차는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라믄 우리 호야 차 타고 편하게 가볼까?”

기껏해야 5분도 안 걸릴 거리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느린 걸음으로는 마을까지 이어진 완만한 경사가 천 리 길처럼 멀게 느껴짐을 모르지 않았다.

“하이고, 덕분에 편하게 왔네. 자!”

“아니에요. 요 앞인데요, 뭘.”

“나는 갈 테니께 난중에 찬 떨어지면 야기혀.”

할머니는 소쿠리에서 튼실한 칡뿌리 한 개를 꺼내 내미셨다. 아마 꾸덕하게 말려 담배를 대신할 모양이셨으리라. 할머니가 캔 칡이래 봤자 개수가 뻔하기에 한사코 거절했지만 끝내 할머니는 칡을 차에 두고 내리셨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늘은 예약 손님이 있다. 예상이 맞다면 아마 홀로 오시진 않으실 터. 문방구에서 계속 장사하고 있다 여기실 것이기에 따로 연락도 없이 오실 가능성이 컸다.

나름의 맞춤형 손님맞이가 필요한 순간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을 홀리는 요물인 오락기를 창고에 넣어두고 미니카 트랙도 분리해서 상자에 넣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구슬치기여야 하니까.

한창 그렇게 정리를 하고 방에서 에어컨을 쐬며 땀을 식힐 무렵이었다.

“구단주 있나?”

정진수 회장님의 목소리가 문방구 밖에서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내 손주들일세.”

“안녕.”

“안녕하세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법한 작은 아이 셋이 오밀조밀 모여 뻣뻣한 인사를 했다.

“그 유리구슬을 좀 더 샀으면 하는데 말이야.”

“이쪽에 있습니다. 더우신데 잠깐 들어와서 쉬다가 가시죠. 아이들도 구경하게 하고요.”

“그럼 실례하겠네. 자, 들어가자.”

내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작은 방에서 자리를 못 잡고 뻘쭘하게 서성이다 이내 한 명씩 티비 앞에 앉았다.

티비에는 내가 틀어 놓은 애니메이션이 한창 재생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구슬용사.

가슴에 있는 구슬을 발사하며 적을 무찌르는 로봇물로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다.

굳이 이 구슬용사를 티비에 켜 놓고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두 형제가 미니카에 관심을 두게 만들었던 방법이니까 말이다.

당시 역사와 전통을 깨고 혜성처럼 등장한 구슬용사는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다지 익숙한 로봇디자인이 아니었고 머리는 이상하리만치 크고 캐릭터도 낯설었다.

그러나 매일 방영되는 만화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 어린이들의 의무이자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재미가 없다며 휙휙 넘겨 다음 너튜브 영상을 찾아보는 복에 겨운 행동은 비디오대여점 아들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했다.

숙제는 다 하고 보느냐? 눈 나빠지니까 멀리 떨어져서 보거라. 혹은 오늘은 중요한 스포츠 경기가 있으니 내일 보라는 등의 난관을 이겨내며 사수한 구슬용사는 하루하루 눈에 익어갔다. 그러다 뒤늦게 만화가 다 끝난 다음 드디어 할아버지 문방구에 구슬용사 장난감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 장난감을 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자, 먹으면서 봐.”

나는 적당히 녹아 떠먹기 편하게 만든 빠빠우를 아이들에게 건넸다.

“허허. 이렇게 안 해줘도 되는데 고맙구먼.”

달달한 아이스크림과 만화영화. 극상의 조합이다. 조금 민망하게도 나와 두 형제, 그리고 지환이도 빠빠우를 먹으며 철 지난 만화를 보는 걸 가장 좋아하니 그 효과는 확실히 검증된 셈이다.

“참, 요 앞에 구슬치기를 할 만한 곳이 있는데 조금 있다 가시겠어요?”

“그런 곳이 있나?”

“그늘이 있어서 시원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는 못 가세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이거 다 보고 가면 안 돼요?”

“저도 보고 싶어요.”

“허허. 재미있나 보구나.”

“한 시간이면 끝나니까 잠깐 찬 바람 좀 쐬면서 쉬다가 가시면 됩니다.”

“이거 너무 민폐가 아닌가 싶어서 그러지.”

그저 손자들과 구슬을 핑계 삼아 장난감 구경이나 하실 요량이셨을 텐데 이렇게 안방까지 차지하니 미안한 마음이 드신 모양이다.

“아닙니다. 손님도 거의 안 오는걸요. 저도 마침 심심했고요.”

민폐일 리가 없다.

MM 프로팀의 대주주이자 돈줄을 쥐고 있는 분이다. 접대라면 접대라 여길 수 있지만 그런 속물 같은 마음으로 정진수 회장님을 대하고 싶진 않았다.

인연이 닿았고 도움을 받았다.

그뿐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실로 고약해서 내 바람과 예상대로 이어지는 법이 없었다.

이 시골 문방구에 찾아온 두 형제와 지환이가 그러했고 조동욱 회장님과 정진수 회장님이 그러했다.

이해관계로 묶였다면 결코 접점이 없을 사람들이다. 지금 나에게 정진수 회장님은 그저 고마운 이웃 할아버지처럼 격 없이 지낼 인연 중 한 명이었다.

“1시간 정도 되니까 같이 보고 계세요. 나중에 손자분들이랑 할 이야기는 있으셔야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이 녹는 줄도 모르고 화면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어른들에게는 특히 회장님의 나이에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 만화다. 그렇다고 아이들끼리 보라 하고 밖으로 나와 그저 시골 경치나 바라보며 옛이야기를 하시게 둘 순 없었다. 공감대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회장님과 아이들을 두고 밖으로 나와 장난감이 가득 쌓인 선반을 어슬렁거리며 상자를 하나씩 집어냈다.

모두 구슬용사 로봇들이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이 로봇들이 모두 비슷한 장난감으로 보였는지 다른 장난감들과 구분되지 않고 섞여 있었다.

그렇게 골라낸 구슬용사 로봇은 7개. 다행히 인원수로 치면 여유가 맞는 개수다.

“오호.”

그리고 구슬용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조차 탄성을 낼 만한 작은 보너스가 있었다.

“다 끝났나 보네요.”

여기저기 장난감을 챙기는 김에 빠진 재고를 조사하다 보니 어느덧 방에는 마지막 엔딩곡이 흘러나왔다.

“응? 그건 뭔가?”

“방금 보셨던 구슬용사 장난감들입니다. 여기에 구슬을 넣고 쏘면 아이들이 좋아할 겁니다.”

“가지고 싶으냐?”

“네…….”

“허허. 그러자꾸나. 전부 다 챙겨주게.”

아직 낯섦이 가시지 않아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할아버지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지갑을 꺼내셨다.

방금까지 정신이 팔려 봤던 만화의 주인공들이다.

지금 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의 강한 유혹. 그러나 그냥은 안 된다.

“인당 하나씩이야. 신중하게 골라야 해. 알겠지?”

이렇게 시골 문방구에 앉아 있으니 잘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벌가에서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들이다. 평생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음이 분명했다.

부족함과 아쉬움의 대상은 그만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지금 이 작은 아이들은 낡은 장난감 상자를 두고 아마 난생처음 겪는 고민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얘가 주인공인데…….”

“그런데 파워는 이 검은색이 더 세잖아.”

“그럼 내가 이거 할래!”

“나도 그거 할래!”

“저, 구단주. 혹시 같은 장난감이 더 있나?”

“없습니다. 일단 지켜보시죠.”

모처럼 손자들에게 장난감을 사줄 할아버지는 행여나 손자들이 실망할까 두려워 나에게 다급히 물었지만, 당연히 이 작은 문방구에 같은 종류의 장난감이 여분으로 있을 리 만무했고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내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주인공 할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아이들의 다툼이 격해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아이들을 달래려 회장님이 몇 번이나 나서려 했으나 나는 그런 회장님을 번번이 막아섰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지금 막으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렇게 팽팽한 대립 구도에서 아이들이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한 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흰색 주인공 로봇이 든 상자를 한 쪽씩 손에 쥐고 서로를 노려보던 두 아이 사이로 작은 손이 삐져나와 다른 상자 하나를 집었다.

“내가 이거 할게.”

조용히 다툼을 지켜보던 아이가 이내 가장 인기가 없던 초록색 로봇을 골랐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볼품없고 작은 로봇이다. 심지어 3편 분량밖에 보지 않았던 만화에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두 아이의 눈에는 잠시 망설임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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