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구슬치기(5)
아이들은 맑고 순수하며 때로는 영악하다. 양립할 수 없는 이 단어들이 조합된 표현이 과연 맞느냐고 묻는다면 본디 사람이 그러하다, 라고 말하고 싶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사람을 나눌 수 있다면 인간군상이 재미있고 복잡하다 해서 울고 웃을 리가 없으니.
이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가 만난 아이들은 그러했다. 생각이 짧은 어린아이라 치부해 버리면 그 아이의 단면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격이다.
“나도 그럼 이거 할래. 형이 흰색으로 해.”
“아니야. 나도 다른 거 할래.”
방금까지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던 두 아이는 흰색 로봇을 내려놓고 서로 가지라 권했다.
갑자기 잘못을 깨닫고 착해진 것이 아니다. 이대로 대립하는 사이에 상자를 뜯어 로봇을 조립하는 다른 아이의 모습을 보고 빨리 자신도 로봇을 조립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하지만 그렇게 양보받은 로봇을 덥석 가지기에도 자존심이 상하니 이렇게 양보를 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가지고 싶다면 차라리 아무도 가지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 과정은 어른들의 합리적인 방식과 사뭇 닮아 있었다.
“회장님도 하나 골라주세요.”
“응? 나도 말인가?”
“손자분들이랑 같이 구슬치기 하셔야죠.”
“할아버지, 이거 주인공 골라요!”
아무도 가질 수 없는 로봇이지만 그 실물을 보고 싶은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선택권을 뺏어갔다.
“그럼, 이제 만들어야지?”
그렇게 마지못해 가장 큰 상자를 든 정진수 회장님까지 네 명은 본격적으로 조립에 들어갔다.
상자 안에 든 구슬용사는 미조립 상태다. 부품 가짓수는 적지만 런너를 뜯어 하나하나 조립하고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디테일을 살릴 필요도 없기에 니퍼로 자르거나 사포로 문지를 필요도 없다. 대충 위아래로 휘휘 꼬아 뜯어내고 끼우면 된다.
물론 그렇다고 조립이 빨리 끝나는 것은 아니다. 티비에는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만화가 계속 틀어져 있으니.
“할아버지, 그거 그렇게 붙이는 거 아니에요. 다리 안쪽부터 연결해야 해요.”
“응? 어이쿠. 이 할애비는 통 모르겠구나.”
장난감은 아이들의 영역이다. 아무리 어른이라지만 어린 시절 이런 로봇과는 거리가 멀었을 게 분명한 회장님보다 손자들의 손이 훨씬 빨랐다.
조립은 그렇게 또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마무리되었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가 길게 내려와 땅거미를 만들기엔 이르고 낮이라기엔 늦어버린 시간.
할아버지와 세 명의 손자는 처음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쭈뼛거리며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거리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영락없는 명절날 시골집처럼 시끌시끌하다. 다만 그 대화는 어느 집과는 조금 달랐다.
“할아버지는 누가 제일 좋아요?”
“할애비는 그 검은 로봇이 좋더구나. 진중하고 행동이 빠른 것이 말이야.”
“에이. 흰색이 대장이잖아요.”
“아니야 검은 애는 연발 사격도 되잖아.”
올해 나이가 몇이더냐? 학교에서 몇 등을 하느냐? 따위의 아무도 궁금하지 않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은 대화가 아니었다.
같은 만화영화를 보고 같은 장난감을 만들었다. 네 사람의 구슬용사 이야기는 해가 지고 차에 오르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구슬치기는 다음에 하셔야겠네요.”
혹시나 사용할까 싶어 철진이에게 학교 열쇠까지 받아두었건만 정작 회장님이 하고 싶으셨던 구슬치기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괜히 쉬어야 하는데,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구먼.”
“아닙니다. 시간 나시면 또 와주세요. 참, 연락은 주셔야 합니다.”
“그리하겠네. 오늘 고마웠네.”
안방을 내어드리고 마냥 나도 불편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묵은 빨래와 청소, 오락기에 정신이 팔려 잘 나가지 않아 미뤄두었던 재고 조사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는 손에 구슬용사 로봇을 하나씩 든 네 사람을 배웅하고 노곤한 몸을 평상에 눕혔다. 오후 내내 달궈진 오래된 평상에서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진다.
“조금만 잘까? 참, 문자!”
* * *
대현그룹의 총수와 그 귀한 손자들이 탄 대형세단은 조용히 시골 마을을 빠져나왔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이들을 데려가면 눈치가 빠른 구단주가 삼정그룹의 두 후계자처럼 어련히 알아서 교육하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MM 프로팀의 최대 주주고 그런 자신의 과한 부탁을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얄팍한 계산도 담겼다.
‘내가 어리석었어. 정작 깨달아야 하는 사람은 나였는데 말이야.’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형제들 간의 다툼으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주제에 자식들에게는 우애와 회사의 보전을 바랐다. 그리고 종국에는 멋대로 실망하고 그 손자들에게까지 자신의 잣대를 세워버렸다.
사람 다루는 일이 어디 그리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자식이기에, 손자이기에, 대현그룹의 총수를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여느 평범한 집처럼 살을 부대끼고 때로는 고마움을, 때로는 서운함도 그대로 내비쳐야 한다.
구단주는 자신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 장난감을 직접 만들라 상자를 내밀 이유가 없었을 테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과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앉아 이야기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 같이 밥을 먹는 자리가 있어도 저번처럼 단답형 대답이 오갔을 뿐이다. 무심했던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같이 만화영화를 보고 장난감을 만든 것만으로도 이리 품에 안겨 재잘대는 손자들인데 말이다.
그저 손자들이 장난감을 만드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 요량이었다. 구단주가 장난감을 만들라 상자를 내밀 때만 해도 사실 내키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을 것이다.
자신이 다니는, 그것도 지분이 20%가 넘게 들어간 회사의 대주주가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면 응당 꼬리를 내리고 경솔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 사죄함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대하는 구단주의 눈빛은 한없이 담담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신조차 무심결에 따르게 만드는 눈빛이다.
떠밀리듯 손에 든 장난감이 손주에게 쌓여 있던 마음의 벽을 허물 열쇠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난감도, 티비에 틀어놨던 만화영화도 모두 처음부터 내가 손주들과 오리란 걸 알고 준비했겠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조동욱 회장에게 번번이 물을 먹을 때는 그나마 대등한 경쟁에서 진 것이다. 잔머리가 빠삭한 그 여우에게 사소한 부분을 놓친 탓에 최근까지도 돈 먹는 하마처럼 변한 MM 프로팀의 뒤를 봐줘야 했다.
그러나 구단주는 달랐다.
부처님의 손바닥.
그 짧은 전화 한 통에 이런 준비를 했다는 자체가 이미 몇 수 앞을 훤히 내다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놈은 말년에 무슨 복인지 이런 친구를 다 얻고 말이야.’
차라리 구단주가 삼정그룹의 직원이었다면 이리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인재가 가고 싶은 회사라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천하의 대현그룹의 회장을 손바닥에 올려둔 장본인은 어이없게도 이 촌구석 문방구의 주인이었다. 시골 문방구 주인과 재계 서열 1위 기업의 후계자, 도무지 그 접점을 짐작할 수 없는 관계는 곱씹을수록 배가 아팠다.
“할아버지!”
“응? 잠깐 딴생각을 했구나.”
“전화요! 전화!”
손자들이 손에 쥔 폰을 가리켰다.
“여보세요.”
(어, 내다. 니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대나? 고스톱 한판 치러 가야지. 내 이번엔 확실하게 이길 방법이 있는기라!)
“아, 난 주말에 손자들이랑 놀아야 해서 바쁘지.”
(아니, 이번엔 이긴다 카이! )
“다음 주에 가세, 다음 주에. 거 사람 그 나이 먹도록 친구도 하나 없나 그래! 끊겠네.”
‘흥. 괘씸하기는!’
저 속 깊은 구단주와 꽤 긴 인연이 있었으면서 자신은 쏙 빼놓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불쑥 심술이 삐져나왔다.
삼정그룹의 두 후계자는 이미 구단주의 사람이었다. 그 틈에 자신과 부족한 세 아들이 들어갈 틈 따위는 없음에 죄 없는 조동욱 회장만 면박을 받게 되었다.
“할아버지, 그럼 우리 주말에 또 놀러 와요?”
“허허. 그러자꾸나.”
통화를 엿들은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또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손가락으로 남은 날짜를 세었다.
띠링.
「민호: 그 로봇은 4개가 하나로 합체됩니다. 설명서를 보내드릴 테니 손자분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문자의 밑에는 친절하게 한글로 번역까지 적어둔 설명서가 이미지로 첨부되어 있었다. 아마 조립 로봇이 서툰 자신을 위한 배려였으리라.
뜻밖의 소식을 얼른 아이들에게 알리려 했으나 이내 정진수 회장은 빙그레 웃으며 손자들이 볼까 얼른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이미 손자들의 웃음과 사랑을 과하게 받았다. 작은 비밀은 주말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 * *
“다녀왔습니다.”
“가서 실수 안 했어?”
할아버지 집에서 해가 지고서야 돌아온 자식에게 하는 첫 질문이 정답에서 한참 빗나갔다. 밥은 먹었는지, 재미있게 놀았는지 따위의 질문이 먼저였어야 함을 남자는 알지 못했다.
“안 했어요. 이제 폰 주세요.”
“자. 조금만 보고 바로 공부하러 들어가. 오늘 과외도 못 했잖아. 선생님이 숙제 놔두고 가셨다.”
“네.”
밝았던 아이의 표정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압수당한 폰을 받은 아이는 거실 쇼파에 누워 자기 얼굴만 한 화면을 터치하며 열심히 뒤적거렸다.
그러나 이전처럼 게임을 켜지 않았다. 분명 게임에서 그날이 아니면 다시 하지 못하는 퀘스트가 가득 남았을 텐데 공부하러 가기 전 그 짧고 소중한 순간에 게임 대신 인터넷 창을 열고 구슬용사를 검색해 자신의 로봇을 찾기 시작했다.
“어?”
그렇게 검색 페이지를 넘기던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합체가 돼요!”
“무슨 소리니, 도대체?”
“우리 네 명이 그레이트 구슬용사로 합체할 수 있어요!”
가뜩이나 또 실수했을까 하는 걱정에 신경이 쓰였던 남자는 자꾸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아들이 답답했다.
“너 또 서준이랑 은우처럼 할아버지한테 버릇없이 군 거 아니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리 넷은 이제 한 팀이에요.”
“팀이라니? 넷은 또 누구고? 나 참.”
“공부하러 갈게요.”
아빠의 연이은 질문에 아이는 대답을 피하고 슬며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이 통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같이 로봇을 만들었던 두 사촌과 할아버지, 그리고 보물창고 같은 장난감 가게에 있었던 친절하고 잘생긴 형이다.
주말까지는 다섯 밤. 하루가 긴 아이들에게는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의젓하게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로봇을 타는 블랙은 과묵하고 일을 미루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아이는 부모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