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12화 (112/151)

#112.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2)

각색이 다소 들어가긴 했지만, 스토리의 초반부는 내가 미니카 전국대회에 나갔던 그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심지어 철진이와 상진이도 이름만 살짝 바뀌어 재벌 2세 그대로 출현했다.

전국대회 우승이 마지막 화이기에 분량을 위해 중간중간 살이 붙긴 했으나 큰 줄기는 다르지 않았다.

특히 전국대회에서 내 미니카가 불탔던 장면에서 주인공이 조금 과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수정을 요청할 뻔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부정할 수도 없다. 횟수도 셀 수 없이 많이 했던 인터뷰에서 앵무새처럼 반복한 이야기였으니.

“이상입니다. 승인만 해주신다면 바로 내일부터 원화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승인을 구하고자 온 게 아니라 통보를 하고자 온 것이다. 아무리 대략적인 콘티라 하더라도 시나리오까지는 전부 나온 상태인데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어찌 보면 이미 검증된 재미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적당히 나이가 있는 주인공과 그 동료들, 그리고 나름의 진중한 스토리는 미니카에 추억이 있는 성인층을 공략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기약 없이 시청자 반응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내용이다.

다만 이 애니메이션이 진짜 세상으로 나왔을 때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것만 뺀다면 꽤 괜찮은 스토리다. 충분히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팀이 이렇게 화제가 되어 인터넷에 회자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대로 작업해 주세요. 계약서에 적힌 조건이 그러니까요.”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간단한 진리를 굳이 몸으로 깨우치는 데에는 과한 대가가 따랐다.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라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다.

그렇게 콘티 발표는 성황리(?)에 끝나고 어느덧 밖이 어둑해질 시간이 되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대접도 제대로 못 해드려 마음이 불편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발표가 끝난 뒤에는 잘 부탁드린다는 말 이외에 딱히 오갈 대화가 없었다.

알아서 일정을 앞당겨 온 것도 고마운 일인데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미 쏘아진 화살은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가 어떻고 바람이 어떻고 하는 말을 뒤늦게 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먼 길을 왔으니 응당 호텔을 예약해드리고 식사 자리를 마련해야 했으나 마사키 감독은 이미 돌아갈 저녁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아마 이곳에 직접 사과하러 온 것도 가지 않는다고 버티고 버티다 아직 상식이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등을 떠밀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정이 다급해 보였다.

학창 시절 만화방에서 재미있게 보던 만화책 중에는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만화가로 연재 중간에 급하게 완결이 나는 책들이 더러 있었다. 위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는데 오늘 마사키 감독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참, 다들 늦었습니다. 어서 퇴근하세요.”

프리젠테이션 발표가 끝난 시점엔 이미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구단주님은 안 가세요?”

“저는 조금 일이 남아서요. 아! 눈치 보지 말고 가세요. 평소에 제가 일을 잘 안 하지 않습니까?”

내 입에서 직장상사가 칼퇴근하는 직원에게 눈치 줄 때 하는 말이 그대로 나올 줄이야!

생각해 보니 평소에는 직원들이 어떻게 퇴근하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휑하고 가버리니까 말이다.

아마 그래서 직원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자, 불 끕니다. 진짜 가세요.”

몇 번이나 말해도 어정쩡하게 컴퓨터에 앞에 앉아 있는 직원들에게 나는 강제 퇴거 명령을 내렸다.

불편한 일이다.

능력과 운이 전부인 사회.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뻘 되는 부장님들이 한참이나 어린 내 눈치를 봐야 한다.

자신이 회사에 발을 디뎠을 때 초등학교나 다녔을 법한 띠동갑도 넘는 상사를 모시는 일은 그리 달갑지 않으리라.

내가 조심하고 격 없이 지낸다 해서 좁혀질 간극이 아니다. 처음부터 이 자리는 내게 과분했으니 말이다.

모두가 떠나는 걸 확인한 뒤 나는 급히 케톡을 보냈다.

「민호: 지금 다 문방구에 있지?

철진: 오늘 늦는다며? 우리도 그냥 게임 좀 하다가 이제 갈려고.

민호: 가는 길에 잠깐 사무실에 들러.

상진: 왜요?

민호: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밥도 안 먹었지? 치킨 시킨다.」

허락이 아닌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마사키 감독만이 아니었다. 졸지에 애니메이션에 나오게 된 두 형제에게 나도 용서를 구해야 했다.

* * *

“우리 왔어. 뭔데 그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세 녀석은 배달원분과 주차장에서 같이 만났는지 손에 치킨 봉투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일단 먹자. 주말에 이거 생각나서 죽는 줄 알았네.”

귀한 치킨이다.

짜장면이야 주말에 혼자 나가서 먹고 오면 되지만 피자와 치킨은 문방구까지 배달 오지 않는다. 나이가 들다 보니 피자는 기름진 맛 때문에 그리 당기지 않았으나 치킨은 예외였다.

포장해 와서 한 마리를 다 먹지 못하면 그 바삭한 튀김옷은 한번 냉장고에 들어간 순간 생명력을 다해버렸다. 맛있는 치킨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시는 대가로 다음 날 눅눅한 튀김옷의 치킨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쉽사리 사 오지 못하는 메뉴다.

회의실에 치킨을 거하게 펼쳐놓고 허기를 조금 달랜 뒤에 나는 슬며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 우리 애니메이션 제작 들어간 거 콘티가 나왔대.”

“콘티가 뭔데?”

“설계도이므니다.”

지환이의 말이 맞았다.

나도 용어를 잘 몰라 부랴부랴 검색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콘티는 일종의 설계도였다. 물론 일이 그렇게 딱딱 맞게 진행될 리는 없다. 중간 과정을 뛰어넘고 급히 시나리오가 수정되기도 하고 심지어 원화 작업 중에도 장면을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하는 대참사가 빈번히 일어난다 들었다.

하지만 큰 줄기는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두 형제가 탐탁지 않게 여긴다면 이 부분은 수정해 달라 요청해야 했다. 치킨은 그런 두 형제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내 얄팍한 잔머리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 내 이야기가 나와, 철진이랑 상진이도.”

툭.

철진이가 양심 없이 세 개째 집어먹던 닭 다리를 떨어뜨렸다.

“우리 이야기가 만화로 나온다고?”

아니, 정확히는 내 이야기긴 한데. 지금 그런 말을 해봤자 철진이 귀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아까 스캔해 두었던 콘티를 회의실 빔프로젝터에 띄웠다.

원본이 그 지경이니 스캔본이 멀쩡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큰 화면에 띄워놓으니 조금 나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 좀 잘생기게 나온 것 같은데?”

“그거 콘티라서 나중에 그림 바뀐다니까.”

“아니, 그래도 비슷하게는 그려줄 거 아니야. 야, 저 글자는 뭐라 적은 거야?”

“나는 번역기가 아니므니다.”

“아, 저것만 알려줘!”

“휴. ‘인상이 굵고 남자답게.’라고 적혀 있스므니다.”

딱히 내가 지은 죄는 아니나 그렇다고 떳떳한 처지는 아니었기에 철진이의 폭주를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콘티에는 문방구에 두 형제가 찾아온 과정이 각색되었지만, 우리 셋이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내용은 그대로 들어갔다. 게다가 두 형제의 출현 비중 또한 주인공의 동료로 꽤 잦은 편이다.

철진이가 자신이 나오는 장면마다 멈춰놓고 거기에 적힌 일본어를 읽어달라 하는 바람에 좀처럼 페이지는 시원시원하게 넘어가지 못했다.

“너희들 집에 안 가냐?”

“조금만 더 보다가. 아니다. 문방구 가서 마저 볼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럼 도대체 집에 언제 가겠다는 거야. 30분 뒤에 불 끄고 나가자.”

이틀에 한 번 꼴로, 그것도 오전만 근무하는 나보다 더 일찍 문방구에 와 있을 때도 있었다. 얼른 씻고 잠들 생각이 간절한 와중에 녀석들이 왔다 간 지금도 이렇게 느리게 보고 있는데 언제 집에 갈지 기약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회의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철진이와 억지로 붙잡힌 지환이 둘뿐이었다.

상진이와 나는 길게 늘어 놓은 소파에 같이 누워 그런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형, MM에 지분이 있으니까 이 애니메이션이랑 미니카에서 수익이 나면 수익이 생기겠네요?”

“뭐 잘돼야 말이지.”

“잘될 거예요.”

“잘돼도 그 돈은 나한테 안 들어와.”

“왜요?”

“빚이 많거든.”

MM 프로팀의 지분을 받았지만 끌어다 쓴 돈이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이 모든 돈을 갚고 안정적으로 팀을 운영하기 위한 사내유보금까지 마련하려면 과연 나에게 떨어질 수당이 있을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이 지분은 내가 수익을 내기 위한 지분이 아니다. 혹시나 또다시 위험에 놓일지 모르는 우리 팀을 지켜낼 지분이다.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돈이니까.

* * *

“나이는 35세. 이름은 김민호. SI 관련 업체에 근무 중 할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곳 문방구를 상속받고 운영 중입니다.”

장설우 과장은 보고하는 중에 잠시 말을 멈췄다. 보고를 받아야 할 상사가 뒤돌아 앉아 있는 데다 끼고 있는 이어폰에서는 티비 소리가 크게 흘러나와 자신의 말이 제대로 들리는지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계속해.”

“아직 조사 중이나 오전에는 MM 프로팀에 근무하고 오후가 되면 문방구를 열고 영업을 합니다. 다만 복지관 봉사활동을 다녀서 종종 열지 않을 때도 있다고 합니다.”

“복지관? 뭐 사회 기여 이런 거 좋아하나? 남의 돈 빨아먹고 사는 주제에 팔자 한번 늘어지네. 다른 건 없어?”

“인적이 드물어 감시가 쉬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마을입니다.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어서 접근이 까다로웠습니다.”

“그러니까. 어제는 뭐 직접 보지도 못했다는 소리네?”

“송구합니다.”

눕다시피 과하게 뒤로 젖혀 앉은 자세로 등을 돌리고 있던 정인성 부회장은 의자를 돌려 장설우 과장을 노려봤다. 두툼하게 부어오른 살집 때문에 눈이 실눈처럼 작아져 진짜 노려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정황이 그러했다.

“주말에 애들이 또 저길 갈 텐데, 그 전에 나는 그 안에서 저놈이 뭘 꾸미는지 좀 알아야겠어.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정보를 좀 가져와. 무슨 말인지 알지?”

‘알기는 개뿔. 들키면 지가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문서를 남기지 말라는 뜻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수행팀에서 작성하는 문서들은 대외비 1등급으로 분류된다. 사내 규정상 대외비 1등급 문서들은 회장님의 인가가 나지 않으면 열지 못한다. 그런 최고 보안등급의 문서도 남기지 않으면서 하는 지시는 결국 회장님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내일이야. 내일까지 내가 원하는 정보를 가져와. 장 과장, 내가 곧 회장 자리에 앉을 건데 이렇게 따로 부르면 장 과장한테도 좋은 소식이 가지 않겠어? 그러니까 수고 좀 해.”

“네. 실망하시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철컥.

부회장실의 문이 닫히고 한참을 걸어 나와도 장설우 과장은 목을 조여오던 기분이 가시지 않아 와이셔츠 카라에 손을 넣고 넥타이를 연신 늘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채찍과 당근이다. 차기 회장으로 확정된 상황이나 진짜 정인성 부회장을 믿고 따를 정도로 신뢰감을 주는 상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직장은 으레 이런 불합리한 일을 하지 않으면 책상을 지킬 수 없었다. 회사는 그런 정의로운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아직 신혼집 대출이 산처럼 쌓여 있는 장설우 과장에게는 나중에 잘못될 수 있다 해서 일을 가려 받을 선택지 따윈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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