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블루마블(1)
“일정이 조금 당겨졌는데 혹시 괜찮으실까요?”
(문제없습니다. 처음부터 널널하게 기간을 잡았으니 오히려 빨리 찍어내면 저희도 감사하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뚝.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화상회의 창을 닫았다.
세상이 변한 것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집에 앉아 상의만 양복을 입고서 전국 팔도에 있는 업체들과 회의가 가능하다니. 학교에서 과학의 날에 새천년의 미래사회를 그릴 때면 단골로 나왔던 화상통화는 이제 나처럼 어중간하게 늙어버린 사람들이나 신기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굳이 사무실의 좋은 컴퓨터와 카메라를 두고 문방구에서 이렇게 신기한 화상회의로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이 궁색 맞게 보이긴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다.
애니메이션 제작 일정이 당겨지면서 여러 업체에 일을 맡겼던 우리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당연히 그 아쉬운 소리는 차재훈 부장이나 하시모토 부장이 아니라 구단주인 내가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굳이 일일이 방문할 필요가 없는 업무라면 회사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팬티인지 반바지인지 판단이 애매모호한 바지를 입고 과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업무가 가능했다.
회의 결과를 요약해 보고서를 한창 작성하는 와중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계십니까?”
“네. 잠시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큰일 날 뻔했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 반가워 양복에 반바지를 입은 꼴사나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얼른 정장을 벗어 던지고 방문을 열었다.
“혹시 사무용품을 좀 살 수 있을까요?”
“네, 저쪽에 있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손님이 아니다.
단정 짓긴 조금 이를지도 몰랐으나 내 직감은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다.
고작 시골 문방구에 들어온 주제에 어딘가 뻣뻣한 자세와 몸동작. 그리고 신발과 매칭되지 않는 과한 등산복을 입고 구태여 사무용품을 찾았다.
굳이 그런 어색한 부분을 집어내지 않더라도 박 상무님께 예방접종을 한 번 맞았기에 시골 문방구에 찾아오는 몇 없는 손님들과는 다른 특유의 분위기를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다해서 14,900원입니다. 현금영수증 끊어 드릴까요?”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남자가 문밖을 나서자마자 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기요!”
“네?”
“아, 저희가 사은품을 드리는데 깜빡했습니다. 여기 필통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필통이 또 한 번 전해졌다. 훈련이라도 된 건지 이 짓도 두 번째가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 * *
‘깜짝이야. 십 년 감수했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딱 집어 어디 소속인지 밝혀내진 못하겠지만 타깃에게 미행을 들키는 직원은 종종 있었다. 감시나 뒷조사를 맡겨야 할 정도의 인물은 대부분 떳떳하지 못한 처지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 타깃은 나이도 어렸고 자신을 의심하기는커녕 사은품이라며 낡은 필통까지 선물로 주었다.
장설우 과장은 손에 들린 비닐봉지들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실없는 놈이네. 다 쓰러져 가는 문방구에서 사은품을 줘봤자 매출이 얼마나 오른다고.’
재벌 2세들과의 인맥으로 구단주에 오른 것도 능력이 좋아서가 아님이 분명했다.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하는 일이 많아 직접 임원들에게 보고하다 보면 저런 류의 인간이 더러 있었다. 능력은 없으면서 운으로 그 자리에 간 사람들 말이다.
한심한 놈이라 속으로 욕을 한 것과는 별개로 가장 위험한 업무를 방금 성공한 장설우 과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를 타고 미끄러지듯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이윽고 어느 작은 공터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발판에 있던 하드타입의 작은 여행 가방을 열었다.
여행 가방이 반으로 갈리며 그 내용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작은 모니터와 투박한 버튼들, 그리고 길게 뽑아낸 안테나까지. 평범한 서류가방으로 위장한 모습과는 대비되는 전자기기가 가득한 내부는 영락없이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진 장비였다.
‘타깃이 늦게 나와서 오히려 작업이 쉬웠다.’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고 다이얼을 미세하게 조정하자 어느덧 귀에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직… 무릅티비의 오늘 컨텐츠는…….)
‘내일까지 이걸 듣고 있어야 한다니. 후.’
도청 작업은 평소 상당히 쉬운 작업에 속했다. 옛날처럼 마우스만 한 크기에 사거리가 짧은 구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손톱만 한 크기에 수신 거리도 상당했다.
그래서 대충 인적이 드문 곳에 이렇게 차를 세워두고 숙소에 들어가 쉬거나 혹은 아예 퇴근했다가 나중에 돌아와 녹화 파일만 가져가면 끝난다.
하지만 문제는 문서를 남기면 안 된다는 제약 사항이었다.
대외비 문서도 작성하지 못하는 판국에 녹음 파일을 가지고 갔다간 다른 직장을 알아볼 테니 퇴직시켜 달라 요청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일을 지시한 부회장은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지시한 대로 생각 없이 따르다간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는 진술과 함께 철창 신세를 지기 딱 좋을 일이기에 최후의 보험으로 녹음 파일은 꼭 남겨두어야 했다.
하지만 녹음과는 별개로 차량과 지급받은 업무용 폰에는 위치추적기가 부착되어 있다. 자리를 비우고 나중에 녹음 파일만 가지러 오는 팔자 좋은 잔머리는 통하지 않았다.
타깃이 집을 비우는 아침까지 이 공터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장설우 과장은 컵홀더에서 졸음방지 껌을 가득 꺼내 입에 욱여넣었다. 지금부터는 지루함과의 싸움이다.
* * *
방금 방문했던 수상한 손님의 정체는 어차피 지금 알아낼 수 없었다.
만약 누구인지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면 심증만으로 누군가의 뒤를 캐는 다소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의심이 가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다미야다.
그곳 말고는 손님을 가장해 사람을 보낼 만큼 나에게 적대감을 가진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왜 사람을 보냈는지, 그렇게 사람을 보내서 얻을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가진 유리한 수는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보낸 사람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박 상무님께 요청한다면 금방 답이 나오겠지만 그 방법이 법적으로 떳떳하지 않을 것이기에 대안으로도 두지 않았다.
정보가 한정적이고 유추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면 잠시 멈춰야 한다. 이런 일은 시간이 해결해 주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흐아아암.”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졸리다. 아니, 졸리다 못해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야옹! 야옹! 오오오…….”
언제 문방구로 나갔는지 밖에서 누렁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진열장에 있는 뭔가를 바닥에 떨어뜨려 사냥놀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안타깝지만 저 장난감은 이미 생명이 다했다.
매일 쓸고 닦아도 바닥은 바닥이다. 누렁이가 가지고 놀 만한 작은 잡동사니라면 이미 여기저기 굴리고 깨물어 돈을 받고 팔지 못하는 상태일 테니 포기하는 게 속이 편하다.
누렁이는 이미 동일 전과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멀쩡한 상품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매출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녀석이 원망스럽다가도 이내 마음을 놔버렸다. 혼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방과 문방구를 구분하는 여닫이문은 누렁이가 너무도 쉽게 밀어서 열 수 있었다. 심심할 때마다 나와 문방구를 탐험하는 누렁이는 막을 수 없는 일종의 재해와도 같았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그냥 장난감이나 하나 사준 셈 치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아쉽게도 낮잠은 깊게 가지지 못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뽀송뽀송하게 말린 이불을 덮고 막 잠들려던 찰나 문밖에서 익숙한 자동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하. 어르신들이 키우는 개도 아니고 저놈들 차 소리를 다 기억하네.”
이곳에서 키워지는 개들은 생각보다 똑똑해서 낯선 차가 아니면 잘 짖지 않는다. 그래서 개 짖는 소리가 나면 누가 왔나 하고 이장님이 나와 보곤 하셨다.
지금 나는 그 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 우리 왔어.”
“알아, 인마!”
“우씨, 왜 짜증을 내.”
짜증이 난 이유까지 이실직고한다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 같아 되삼키고는 슬리퍼를 끄적이며 밖으로 나와 녀석들을 맞이했다.
“뭐야? 비 와?”
“맞다. 내일모레까지 내린다던데.”
“여름은 여름인가 보네.”
밖으로 나가보니 꿉꿉한 공기와 빗물이 뜨거운 바닥을 때리며 나는 흙내가 은은하게 퍼졌다. 간혹 이렇게 내리는 비를 무시하고 수중전이라는 명목하에 공놀이를 하곤 했지만,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나를 제외하곤 모두 빨랫거리를 만들어왔다며 잔소리를 듣기 딱 좋은 날씨다.
“그럼 오늘은 천렵 못 가겠네.”
“당연하지. 엊그제 그렇게 잡았는데 그게 또 먹고 싶냐?”
“진짜 맛있었어요.”
물음의 답은 의외로 상진이의 입에서 나왔다.
딱히 식탐이 없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면 정말 맛있었나 보다.
장작불에 구워 먹는 은어는 시골에 살아도 깨끗한 냇가가 없다면 쉽게 누리지 못하는 혜택이다. 예전 직장이나 군대에서도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던 사람을 더러 만나곤 했지만, 은어를 잡아먹었다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갓 잡아 구워 먹는 은어는 그만큼 귀하고 쉽게 맛보기 어려운 경험이다.
“일단 들어와. 티비라도 보든지.”
사실 굳이 비가 오지 않더라도 밖에서 놀 거리는 마땅히 없었다. 천렵을 한 번 더 하기엔 힘에 부쳤다. 기껏해야 잠깐씩 나가 오락기나 조금 하다 들어오는 게 오늘 예상되는 일과다.
“뭐 다른 건 없으려나.”
철진이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문방구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없을 리가 있나?
문방구는 아이들의 천국이다.
진열장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장난감들과 학용품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아이들의 선택을 받는 것들로만 채워졌다.
어린 날의 추억이 전무하다시피 한 세 녀석에게는 뭘 쥐여줘도 재미있게 놀 것 같았다.
“이거 우리 전에 봤던 비디오에 나오는 로봇이네?”
“희망소비자 가격이 그때 가격으로 2만 원이야. 그럼 지금 얼마지?”
“이건 상자가 너무 바래서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스므니다.”
하는 짓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진상들이다.
하지만 그 시절 아이들은 모두 이 녀석들과 비슷했다. 사지도 않을 물건을 이리저리 만지고 흔들어 본다. 그렇게 학교가 끝나면 우르르 몰려와 어제와 똑같은 물건들인데도 하나하나 꼼꼼히 구경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그러지 말라고 제지한 적이 없으셨다.
지금 나처럼 이 문지방에 앉아 그런 아이들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셨다.
투두둑.
“야! 그만 좀 떨어뜨려!”
하지만 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철진이의 큰 덩치 때문에 또 진열된 물건들이 떨어지는 걸 보고 단박에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응? 어디?”
어차피 철진이에게 시켜봤자 그냥 주워서 먼지도 털지 않고 원래 위치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쌓아둘 것이 뻔했기에 내가 직접 나서야 했다.
“다 근육이라 뭐 살 빼라는 말도 못 하겠…….”
나는 구시렁거리면서 물건을 줍다 진열장 아래에서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면 이런 기분일까?
내가 집어 든 건 다름 아닌 보드게임이었다.
“오늘은 이거 할까?”
원래 분홍색이었으나 세월이 너무 오래된 탓에 거의 흰색으로 변한 납작한 상자의 정체는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지도 모른다.
바로 보드게임의 제왕. 혹은 왕도라 불리는 블루마블 세계일주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