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블루마블(2)
보드게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직관적이고 간단한 게임으로 인기가 높았다. 한때는 카페 대신 건물마다 보드게임방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당연히 놀거리가 늘 부족했던 우리 마을의 아이들도 이 보드게임을 좋아했고 집마다 한두 개씩은 꼭 가지고 있는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윷놀이와 장기가 전통의 강호이자 어른들의 유흥거리였다면 보드게임은 아이들 나름의 손님 접대용 놀잇감이었다.
또래의 아이라면 손을 붙잡고 데리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기껏해야 스물 남짓이 모여 노는 시골 동네에 새 친구만큼 반가운 존재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별이 다르거나 혹은 연령대가 애매하게 벌어진 상황이라면 아이들도 고심하게 된다.
그럴 때 이 보드게임은 범용성 면에서 가히 최고의 장난감이다. 일단 꺼내두기만 하면 최소 세 명 이상이 즐길 수 있었고, 어디 보이지 않는 산과 들로 쏘다니다 손님이 갈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불상사를 막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다 보니 의외로 용돈을 모아 사지 않아도 부모님이 알아서 사주시곤 했다.
그중에서도 블루마블은 보드게임계의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블루마블은 세계여행, 우주여행. 이렇게 총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기호는 각자 다르겠지만 단연 근본은 세계여행이다. 카피작으로 국내여행이라는 제품도 있었으나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인기를 힘입어 후속작으로 나온 우주여행 역시 출시 시점에는 이미 세계여행을 모두 구매한 상태라 굳이 더 살 필요가 없었기도 했고 행성을 구매한다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아득한 스케일로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데 실패했었다.
당연히 우리 문방구는 인기 없는 제품이 구색 갖추기로 진열되지 못하는 곳이기에 근본인 세계여행이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크네요.”
“그래? 이게 가장 작은 거야.”
당시 보드게임은 같은 게임이라도 3가지 가격대로 출시가 되었다.
가격이 올라갈수록 말이나 주사위, 그리고 다른 부품들이 고급스러운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 있다.
당연히 우리 문방구에서 팔던 라인업은 가장 저렴한 제품이었다.
마을 사람 태반이 농사를 지으며 팍팍하게 살아가는 와중에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만 원이 넘어가는 고급 제품을 덜컥 사줄 부모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이 보드게임 하나로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이 들지 않을까 걱정하셨던 할아버지의 배려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바람에 나는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 폰 게임이랑 똑같은 건가?”
“이걸 안 해봤어? 야, 이건 그래도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랑도 하고 그랬을 거 아니야.”
“우린 이런 거 안 하고 놀았어.”
“그럼 뭐 했는데?”
“승마, 골프, 스키…….”
“그래그래. 어련하시겠냐.”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재벌집 자식들이다.
“그런데 회장님은 돈을 그렇게 아끼시는데 너희들은 용케 그런 비싼 취미를 가졌네?”
따지고 보면 어딘가 이상했다. 조동욱 회장님의 절약 정신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가 많았다. 지금도 구내식당에서 밥을 드실 정도니 당연히 그 자식들도 사치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전형적인 상류층 취미지 않은가?
“골프장은 호텔 계열사에 딸린 어린이 골프장.”
“골프채는 골프장에서 나오는 폐기 골프채였어요. 그것도 어른용으로요.”
“승마는? 그건 자기 말이 있어야 하잖아!”
“그냥 승마장 가면 빌려줘요.”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해야 하니까 한 거야. 이 나이 먹고 졸부집 아들 취급 안 당하려고.”
“나도 마찬가지므니다.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은 없스므니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 해서 애환이 없는 게 아니듯. 부족함 없이 자라온 두 형제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야 훨씬 나은 처지라 아마 엄한 회장님 밑에서 불만도 내비치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할지도 모르겠다. 남들에게는 그 옛날 질리도록 해봤던 추억의 게임이 녀석들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경험일 테니 말이다.
“일단 사전 작업이 조금 필요해.”
“그냥 하는 게 아니라?”
“그러네요. 다 붙어 있네.”
싼 게 비지떡.
주사위를 제외하면 돈은 물론 말과 호텔들도 모두 종이로 되어 있고 전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나씩 뜯어내 잘 모은 다음 고무줄로 묶어두어야 비로소 게임이 가능했다.
“일단 철진이 넌 건들지 마. 다 찢을 것 같으니까.”
“그게 좋겠스므니다.”
“우씨.”
우리 말에 철진이는 거칠게 뜯던 종이를 그대로 내려놓아야 했다.
잘못해서 멀쩡한 카드를 반으로 찢어놓기라도 한다면 게임을 할 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당시의 물가를 반영한다 해도 2천 원짜리 보드게임은 상당히 저렴한 편에 속했다. 극한의 가성비를 추구하는 제품에 찢어지거나 잃어버릴 상황에 대비한 여분이 들어있을 리 없었다.
토독. 토독.
우리 셋은 하나씩 분담해서 카드와 돈을 뜯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이 세 명이라 금방 하네.”
카드와 돈을 쭉 펼쳐놓고 이걸 언제 다 자르나 싶었는데 역시 사람이 많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우린 4명이니까 은행은 내가 볼게.”
“은행도 있어?”
블루마블은 최대 4명의 선수가 출전할 수 있다.
인원이 많다면 말 하나에 팀을 맺거나 혹은 추가로 바둑돌같이 다른 말을 가져와 인원을 늘리기도 했지만 원활한 재미를 위해서는 3~4명의 선수와 진행을 맡은 은행장이 필요했다.
“은행장이 제일 중요해.”
“그냥 돈만 나눠주는 거잖아요.”
“어허! 모르는 소리!”
은행장의 역할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블루마블은 정말 쉬운 게임이다.
턴이 돌아오면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만큼 말을 달리고 도착한 땅을 사거나, 혹은 남의 땅이라면 통행료를 지불하면 된다. 사실상 규칙은 이게 전부다.
하지만 이 간단해 보이는 진행도 중후반부가 되면 상당히 복잡해진다. 보유한 돈과 땅이 늘어날수록 계산은 복잡해지고 상대방의 땅까지 확인하면서 매 턴마다 내거나 받는 돈까지 확인해야 한다. 게다가 집중력이 흩어지면서 주사위를 움직여야 할 칸도 의외로 자주 헷갈린다.
한 칸을 잘못 가서 서울이라도 밟았다간 게임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 속에 놓이기 일쑤다.
은행장이 없다면 분명 그 과정에 이런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실수가 일어나기 쉬웠고 그 실수가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장은 단순히 돈만 내고 받는 역할이 아니라 게임의 전반적인 흐름을 감독하고 불필요한 시간을 줄여 게임을 스피디하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키플레이어인 셈이다.
그리고 은행도 엄연한 플레이어인 만큼 희박한 승리 조건이 존재했다.
“시작하자. 돈은 다 받았지? 적게 받은 사람 없는지 확인해봐.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아까 확인했다니깐.”
손가락만 한 작은 지폐들은 새싹은행이라는 로고가 박혀 금액 단위별로 색이 달랐다.
세 녀석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무심한 표정으로 그 지폐들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펼쳐놓았다. 몇 바퀴만 지나면 저 돈이 전 재산인 것처럼 손에 꼭 쥐고 신주단지 모시듯 할 게 뻔했기에 잔소리를 더 하진 않았다.
“주사위를 굴려서 가장 높게 나온 순서대로 가는 거야.”
스타트가 경기에 큰 영향을 주진 못하지만, 첫 바퀴에서 선두로 치고 나가며 땅을 긁어모은다면 뒤이어 오는 주자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블루마블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높스므니다.”
“그래. 지환이, 상진이, 철진이 순서로 던지면 돼.”
또르르.
손톱보다 작은 주사위가 굴려지고 지환이의 말은 제주도에 도착했다.
“증서는 20만 원이야. 살래?”
“당연하므니다!”
은행장의 능력은 여기서 발휘된다. 부채꼴로 가지런하게 나열한 땅문서에서 빠르게 제주도를 찾아 넘기고 돈을 받는 이 과정을 얼마나 단축하느냐가 관건인 직업이니까.
나처럼 수준급의 은행장은 아풀러나 쮸쮸바 같은 소정의 출장비를 받고 진행을 해줄 정도였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런 매끄러운 진행을 누리면서도 당연히 블루마블이 이렇게 진행되는 줄 아는 녀석들이 나의 대단함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면 땅을 빨리 찾을 수 있겠네요.”
“알아차렸어? 이거 내 영업 비밀이었는데.”
역시 상진이의 눈썰미는 수준급이다.
하수들은 한 묶음이나 되는 땅문서에서 내줘야 할 땅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원하는 땅이 나올 때까지 한 장 한 장 넘기면 아무리 손이 빨라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팁은 땅을 보드의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이다.
첫 시작인 타이페이부터 마지막 땅인 서울까지 차례대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말이 어디에 있는지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하더라도 금방 땅을 찾아 줄 수 있다.
“호텔도 짓겠므스니다.”
“누가 호텔 운영하는 놈 아니랄까 봐 바로바로 올리네. 너 그러다 파산한다.”
“어차피 제주도는 호텔 못 올라가.”
“왜 못 올리므니까! 제주도는 호텔의 섬인데!”
“룰이 그래, 인마! 제주도, 부산, 서울은 건물 못 올려. 그리고 다른 땅들도 한 번 더 도착해야 올릴 수 있어.”
고수들은 빠르게 다음 경기를 하기 위해 바로 건물을 올리도록 일부 룰을 변경하기도 했지만 이제 막 처음 블루마블을 접한 녀석들에게는 이른 방법이다.
남이 산 땅을 피하면서 내 땅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던지는 주사위가 바로 블루마블의 묘미였다.
이렇게 보면 운적인 요소만이 게임의 승패를 가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일단 두 번째 바퀴부터는 높은 확률로 남의 땅을 밟게 된다. 단순 확률로도 아직 구매하지 않은 땅과 내 땅을 제외하면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무사히 한 바퀴를 돌기란 쉽지 않다.
만약 내가 무턱대고 땅과 건물을 짓는 데 돈을 다 써버렸다면 남의 땅을 밟았을 때 결국 땅을 팔아야 한다.
통행료를 낼 만큼만 땅을 되팔고 나면 결국 다음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다시 좋은 땅을 밟았다 한들 건물은커녕 땅을 살 돈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여유자금을 들고 있으면서 비싼 땅을 살 기회를 노리는 작전이 안정적인 운영 방법이었다. 물론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확실한 승기를 잡는다는 보장은 없기에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지만.
정답은 없다. 고수라 칭하는 아이들도 그날 주사위 운이 없다면 단박에 파산하는 게임이 바로 이 블루마블이었다.
“참, 그런데 독도는 없으므니까. 제주도를 샀으니 독도까지 노리겠스므니다.”
“블루마블에 독도는 없…….”
“…….”
“…….”
“다들 왜 그러므니까?”
“철진아. 총 좀 꺼내와.”
“응.”
“왜, 왜 이러므니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도 사실 애매하긴 하거든. 그런데 일단 쏘는 게 맞는 것 같아.”
왜 때리는지 설명하면 금방 논파를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철컥.
“자, 잠깐!”
딱.
쏘아진 총알은 재일교포라는 회색지대를 넘나들며 망말을 일삼던 간자의 미간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