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15화 (115/151)

#115. 블루마블(3)

“약속했스므니다! 꼴찌는 고무줄총 한 대므니다. 나중에 딴말하면 안 되므니다!”

“알았어, 알았어. 일단 이기고 나서나 말해.”

아직 자신이 왜 맞았는지 납득하지 못한 지환이가 피눈물로 제안한 벌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고무줄 총은 남는 시간에 조금씩 개조를 한 데다 따로 인터넷에서 구매한 두껍고 질긴 고무줄까지 총알로 쓰기에 지난번 오락기 사건에서 철진이가 맞았을 때와는 위력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억울할 만한 고통이었으리라.

그렇게 경기는 조금의 긴장감이 더해졌다.

“다음은 나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세 명은 출발점으로 돌아올 때까지 각자의 땅을 한 번도 밟지 않고 착실하게 땅을 구매했다.

“이제 슬슬 피 말리는 구간이네.”

두 번째 바퀴는 선수들에게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게임은 확률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흐름인가?’

주사위에 수작질을 하지 않았다면 던졌을 때 나오는 숫자의 확률은 정해져 있다.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불규칙한 결과.

그러나 블루마블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한 가지 의구심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자라나기 시작한다.

‘각 판마다 유독 잘 걸리는 땅이 존재한다.’

주사위를 던질 기회는 동등하고 주어진 돈도 같다. 땅을 살 기회도 큰 차이가 없어야 함이 맞다.

그러나 한 바퀴만 지나도 그 격차가 발생한다.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정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볼품없는 땅에 한 개씩 올라간 호텔들은 어느덧 감당할 수 없는 통행료가 되어 대전차 지뢰가 매설된 구간처럼 넘어가기 껄끄러운 존재가 되곤 했다.

지금 이 게임에는 상진이가 가진 베를린이 그러했다.

“5. 또 베를린이네.”

“아오! 도대체 저길 몇 번이나 걸리는 거야.”

“이래서 이 땅에 호텔은 무조건 지어야 했다니까!”

철진이는 투덜거리면서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모두 상진이에게 넘겼다.

“형, 40만 원 모잘라.”

“뭐? 그럼 어떡해.”

“뭘 어떡해, 땅을 팔아야지.”

아니다.

굳이 땅을 팔 필요는 없다. 블루마블은 꽤 세밀한 경제 구조를 구현해 놓았기에 부족한 자금을 융통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출할래?”

“대출?”

대출. 은행의 특권이다.

막강한 현금을 바탕으로 한 대출로 수익을 가져올 수 있다.

공식룰로 정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법의 허점이 드러난다. 설명서에 ‘해도 된다.’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선 안 된다.’도 없기 때문이다. 해석에 따라 그 룰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고 여느 놀이처럼 그렇게 동네마다 블루마블의 규칙은 조금씩 달랐다.

물론 대출이자는 은행장의 권한이지만.

“이자는 한 바퀴당 20만 원.”

“뭐야! 너무 비싸잖아!”

“어차피 월급 받잖아. 중도상환하면 10만 원이야.”

“아무리 그래도…….”

“담보대출로 전환하면 조금 싼데 어떻게 계약 조건이나 한번 들어볼래?”

인간은 탐욕의 동물이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남의 것을 취하려 하는 것이 응당 생존에 필요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 본능에 충실하다면 게임을 지옥으로 바꿀 수 있는 플레이어가 바로 은행장이었다.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대출은 대부분 간절한 사람이 받게 된다.

상품을 구매하는 쪽이 당연히 갑이 되어야 하지만 이 간절함 때문에 은행대출상품은 은행이 갑이 되어버린다. 처지가 갑과 을을 바꾸는 것이다.

내 짐작이 맞다면 평생 부족함 없이 살아온 세 녀석은 대출이라는 신개념 금융상품에 처음 노출되다시피 했다.

이론으로만 접했던 금융지식을 직접 마주한 파급력은 정상적인 사고를 어렵게 만든다.

채무는 자산인가?

당연히 자산이다. 개인의 신용도와 상환 능력을 고려한 심사를 받은 상태이기에 자산으로 잡힌다.

그러나 이들은 모른다. 자신의 돈인 줄 알고 마구잡이로 쓰던 그 돈이 변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얼마나 커다란 벽으로 다가오는지…….

그렇기에 미끼를 물 수밖에 없다.

철진이의 고심은 길지 않았다.

“얼마까지 가능한데?”

“통행료랑 건물 짓는 돈 이상은 안 돼. 용도를 넘어서니까.”

“그럼 이번 통행료만 좀 해줘.”

“통행료는 80만 원이니까 선이자 20 빼고 60까지 가능해. 아니면 담보 잡고 75만 원.”

“당연히 75만 원이지!”

나는 철진이에게 돈을 건넸다. 굳이 상진이에게 바로 주지 않고 철진이에게 건넨 것도 나름의 전략이었다. 잠시나마 내 손을 거친 돈과 그렇지 않은 돈이 나가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니까.

“형, 그러면 우리도 나중에 대출되죠?”

“당연하지. 대신 한 번씩만이야.”

지극히 합리적인 방법이다. 대출을 받는 사람도, 그리고 경쟁자들도 모두 이득이 된다. 돈의 가치는 고정적인데 시장에 돈이 많이 풀리는 상황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세 사람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한방에 큰 대출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가득하겠지.

“다음은 내 차례이므니다.”

철진이의 막혔던 자금이 대출로 뚫리고 경기는 다시 순풍을 탄 배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도 호텔 지어야 하므니다. 50만 원 대출하겠스므니다.”

“형, 저도 통행료 100만 원만 주세요.”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똑똑한 아이들이니 대출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그 짧은 순간에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자잘하게 빌려서 갚기보다는 크게 빌려 후일을 도모했다.

모 아니면 도의 무모한 방식.

그러나 힘들게 턴을 지나오며 힘들게 건물을 올린 내 땅들을 파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차라리 언제고 한번 걸릴 누군가를 위해 더 큰 덫을 치는 것이 심적으로나 확률적으로나 돈을 딸 가능성이 더 컸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기다리는 사이 꼬박꼬박 이자를 챙겨가는 쪽은 오직 은행뿐이다.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경제가 호황이거나 어렵거나 상관없이 웬만해선 은행은 돈을 잃지 않는다.

물론 은행의 힘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건 이번 판까지만이다.

블루마블은 장거리 게임이다. 한번 맛보면 도박보다 무서운 게임으로 악명이 자자할 정도였으니까. 그 긴 게임 동안 내가 계속 은행을 붙잡고 돈놀이를 한다면 시스템의 불합리함을 토로할 반동분자(?)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라도 안정적으로 승리를 취하고 지환이의 악에 받친 복수를 피한 뒤에는 다시 플레이어로 돌아갈 작정이다.

물론 세 녀석에게 서민들이 대출로 겪는 고충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다음에 말이다.

* * *

(냐옹! 오오오. 파지지지직.)

‘윽! 갑자기 무슨 소음이야?’

예상치 못한 잡음이 찢어질 듯한 노이즈가 되어 고막을 때리는 바람에 장설우 과장은 이어폰을 벗어 던질 수밖에 없었다.

(타타탁타타탁. 누렁아! 그… 하고 들어와!)

‘뭐야? 고양이가 도청장치를 건든 건가?’

낭패였다.

어차피 발신기는 특수제작되어 일반인들의 눈에는 발신기로 보이지 않는다. 크기도 작고 안테나도 없이 싸구려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들켜도 무방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한참을 물고 뜯었는지 노이즈는 점점 심해졌다.

꽤 긴 시간 동안 들리는 소리라고는 ‘치직’거리는 잡음이 전부였다. 무언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긴 했으나 무슨 말인지 구분은 불가능했다.

(치직! 치직… 이 땅에 호텔… 무조건 지어야 했…! 뚝.)

그렇게 힘겹게 동작하던 도청장치는 회광반조처럼 짧은 단말마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이거 난리 났네. 아니, 그래도 쓸 만한 정보는 전부 얻었으니 차라리 다행이군. 우선 이대로 보고드리자.’

아침까지 차 안에서 꼼짝없이 밤을 새워야 하는 신세를 면하긴 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돌아가는 길의 핸들이 전보다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 * *

“실패했다고?”

“죄송합니다. 타깃이 키우던 고양이가 숨겨놨던 발신기를 발견하는 바람에 파손되었습니다.”

장설우 과장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원래라면 아침까지 도청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를 올려야 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도청에 실패하고 돌아왔으니 질책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의자 너머에서는 욕설 섞인 고함 대신 차분한 질문이 돌아왔다.

“건진 건?”

“여기 있습니다. 4시 21분에 유일하게 구분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장설우 과장은 가방을 열어 스크린화면에 타이머를 끝으로 옮기고 이어폰을 부회장님께 공손히 건넸다.

(치직! 치직… 이 땅에 호텔… 무조건 지어야 했…! 뚝.)

“이게 녹음된 파일 전부야? 다른 대화는?”

“고장 나기 전 부분은 대화가 없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네.”

팍팍.

정인성 부회장은 도청장치에 붙어 있는 손바닥만 한 기계장치를 뜯어 발로 밟았다.

구두 굽에 짓이겨진 장치는 스파크와 미세한 연기를 뿜어내며 까맣게 타들어갔다.

“젠장. 이건 매번 할 때마다 바닥이 상한다니까. 종이라도 깔아야 했는데. 그만 가봐. 어차피 더 이상 접근도 어려울 테니까.”

대리석 바닥에 까맣게 그을린 자국을 한참 구두로 문지르던 정인성 부회장은 짜증 섞인 어투로 장설우 과장을 내보냈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으나 장설우 과장은 이 귀찮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업무가 빨리 끝난 것에 안도하며 얼른 부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기념관이 아니라 호텔을 짓는다고? 흥.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삼정그룹의 조동욱 회장이 말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아버지의 기념관을 짓는다 할 때부터 한차례 소문이 파다하게 났었다.

회사에서도 이면지를 안 쓰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수전노가 갑자기 아버지의 기념관을 짓겠다 했으니 대현그룹의 계열사인 대현건설에서도 관련 보고서가 올라왔었다.

죽을 때가 돼서 안 하던 짓을 하겠거니 하고 넘겼건만 기념관이 호텔이 될 줄은 정인성 부회장도 생각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 노인네는 무슨 연관이 있어서 애들을 데리고 저곳에 간단 말이야?’

기념관을 호텔로 둔갑시키려는 삼정그룹의 후계자들과 문방구 주인, 그리고 손자들을 데리고 굳이 그곳으로 가 시간을 보내는 대현그룹의 총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이에 접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호텔이 지어진다 한들 자기 호텔도 아닌데 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뱅글뱅글 돌다 마침내 도달한 곳에는 너무나 명확한 정답이 있었다.

‘삼정그룹이 지은 호텔을 대현그룹이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언할 수 없지만, 정황상 너무나 확실한 증거였다.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차명 계좌를 통해 토지 매입부터 건설에 투입되는 하청업체들을 밀어 넣어 지분을 빼 와도 되고 완공 전에 최대주주가 바뀌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다.

문제는 그렇게 먹은 호텔로 무얼 하느냐였다.

도대체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벌이는 그 은밀한 행동에 저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결국, 둘째 놈 머리를 빌려야 한다는 건데… 이거 원 재주만 곰이 부린 꼴이네.”

담배를 물고 다시 의자에 앉은 정인성 부회장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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