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16화 (116/151)

#116. 자승자박(1)

학창 시절 잘 하지 않던 컴퓨터게임에 재미가 들린 적이 있다.

같은 공간이 아니더라도 온라인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신기함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 나이가 되면 온라인게임에 반드시 빠지게 되는 필연의 과정이라도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도 잊고 게임에 한창 빠져 살았었다.

학생이면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철저하게 등한시한 결과로 당시 성적이 처참하게 떨어지긴 했지만 그런 죄책감을 이겨내고도 남을 재미였다. 그렇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느 정도 절제를 하기까지 잃어버린 성적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버렸다.

이 녀석들도 그 시절의 나처럼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려 하고 있다.

“형. 빨리 다음 판 돌리죠.”

“그만하자. 이제 아침이야.”

“그래, 형은 한 판 쉬고 우리끼리 하자.”

“은행은 누가 하고?”

“내가 하면 되지.”

“철진 상, 돈 계산도 잘 못하면서 무슨 은행이므니까. 그냥 대출 놀이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므니까? 내가 하겠스므니다.”

“헛소리하고 있어! 오늘 문방구 문 닫을 거니까 다 나가.”

“아, 형! 한 판만!”

“웃기네, 한 판만이라고 한 게 벌써 5판째다, 이놈들아!”

곧 아침이다.

중의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3시간 뒤에 해가 뜬다. 나도, 세 녀석도 한량처럼 살고 있긴 하지만 명색이 직장인이다. 해가 뜨면 출근을 해야 했다. 땀내가 나는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한다면 결코 좋은 뒷말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드르륵.

영업시간(?)을 한참 지나 연장근무를 하던 유일한 직원의 퇴근.

세 사람은 입맛을 다시며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진짜 깔끔하게 딱 한 판만 더 하려고 했는데.”

“출출하므니다. 우리 저녁도 안 먹고 있었으므니다.”

“그러게, 나도 이제야 배고프네. 우리 아랫동네 국밥집 가서 한 그릇 하고 갈까?”

이 근방에 유일한 24시간 국밥집은 세 사람뿐만 아니라 민호와 설란의 단골집이기도 했다. 딴에는 읍내역할을 하던 동네답게 새벽까지 하는 식당은 더러 있었지만, 세 사람은 민호와 처음 먹은 국밥집 외에는 선택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고급 세단 3대가 문방구를 빠져나와 국밥집 앞에 나란히 섰다.

늦은 밤답게 국밥집은 어수선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직원들과 손님은 한 명도 없고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채 장부를 적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만 보였다.

“어서 오세… 어휴, 오랜만이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세 사람을 맞이했다. 민호와 설란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탓도 있겠으나 문방구를 나서야 한다는 아쉬움에 이곳에서 제법 많은 국밥을 먹었던 이유가 더 컸다.

“이모, 안녕하세요. 국밥 특 하나, 살코기 둘, 그리고 수육 대자, 순대 대자 하나 주세요.”

“그래. 에어컨 금방 틀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침까지 누가 올까 싶어서인지 홀은 가마솥의 뜨거운 열기를 식힐 에어컨이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에어컨에 가장 가까운 구석 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국밥과 다른 메뉴가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빈 동작 없이 솜씨 좋게 담아낸 국밥과 수육, 순대들은 수저를 꺼내놓는 찰나, 금방 식탁에 차려졌다.

저녁도 먹지 않고 블루마블 삼매경에 빠졌던 덕분에 뒤늦게 찾아온 시장기는 구수한 고깃국 냄새를 참지 못하고 저마다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게 만들었다.

“이번 달은 조금 힘들 것 같아요…….”

“그 소상공인 대출은 어떻게 됐어?”

“심사는 들어갔다는데 기약이 없다네요. 추가 대출이라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하고요. 이번 달 이자도 빠듯한데 걱정이네요.”

“허허…….”

노인들은 목소리가 크다. 본인들의 귀가 어두우니 무의식중에 상대방도 잘 들리지 않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노부부는 행여나 누가 들을까 조용조용한 목소리였으나 세 사람의 귀에 들리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수저를 부지런히 놀리던 세 사람의 손이 느려지다 이내 멈췄다.

노부부가 24시간 영업을 하며 이 무더위에 에어컨도 틀지 않고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서민의 삶이다.

빚이 없는 사람을 찾기 드물고 미래는커녕 내일을 걱정하며 산다. 평소 같으면 그냥 조금 어려우시구나 하고 넘겼을 이 대화들에 세 사람은 수저도 뜨지 못할 만큼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작 보드게임의 돈이었으나 돈이 항상 부족했다.

서른 가까운 인생에 단 한 번도 돈이 부족해 본 적이 없었던 세 사람이다.

문방구의 달력에 적은 금액이야 돈이 있어도 못 사는 물건들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오늘 겪었던 보드게임은 세 재벌 2세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돈이 부족했다.

생존을 위해서, 혹은 희망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이자가 줄어들까 싶은 마음에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은행장에게 돈을 빌려달라 손을 내밀었다.

자신들은 고작 게임에서도 그리했을진대 노부부는 은행에 돈을 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고 사정을 했을지 몰랐다.

사람은 그 처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한다. 비록 보드게임이었지만 대출로 느꼈던 쫓기는 듯한 압박감과 이자의 무서움, 그리고 어떻게 갚을지 막막했던 기분을 현실에서 마주한 두 사장님께 다시 웃으며 주문을 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먹먹한 감정은 그 맛있던 국밥의 맛도 앗아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깟 대출이 얼만지 물어보고 당장에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쥐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심 끝에 가장 먼저 행동한 사람은 철진이었다.

탁.

“우리 팀원들, 아침에 밥 많이 거르고 오던데 여기서 포장 좀 해가야겠네.”

“나도 그렇스므니다.”

“나도 포장해 갈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세 사람의 마음은 풍요로움 속에 공허함을 넘어 어느덧 평범한 삶이 들어찼다.

나누는 법과 그 나눔에 존중을 담는 법을 깨우쳐 나갔다.

그렇게 ‘억’ 소리 나는 고급 세단 세 대는 진한 국밥 냄새를 풍기며 다시 길을 떠났다.

* * *

“이 동네 사람들 잘사나 보네. 저런 차들도 다니고.”

정인성 부회장은 저 멀리 떠나는 강남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 세단을 바라보며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뜻이겠지. 귀하신 부회장님이 땅 투기하는 동네를 뭐 가봤어야 말이지. 나같이 껍질만 있는 계열사나 몇 개 받았으면 이런 데 부지런히 다녀야 하거든.”

비아냥대는 동생의 말에도 정인성 부회장은 비죽 튀어나오는 짜증을 삼켰다. 어찌 되었든 아쉬운 소리를 하는 쪽은 자신이었다.

“이렇게 다니면 뭘 알 수 있다는 건데?”

“진짜 여기가 호텔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제일 확실한 건 부동산이야. 대충 마스크 쓰고 들어가서 찔러보면 반응이 오니까.”

‘말 하나는 청산유수네. 뱀 같은 새끼.’

이런 극비 정보를 둘째 동생에게 흘리기까지 제법 고심을 했었다. 하지만 호텔을 짓는 것도, 그 안에 자신의 아버지가 연루되어 있는 것도 모두 확실한 정보였다.

만약 그렇다면 무언가 대응을 하기에 힘이 부족했다.

페이퍼컴퍼니로 빼내던 비자금은 모두 지분 방어에 쓰여야 했다. 돈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한 푼도 쓰면 안 되는 상황.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후계 구도에서 밀린 뒤에 총알을 가득 모으고 있으면서 머리 회전이 빠른 둘째 동생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돌아다닐 필요도 없네. 워낙 작은 동네라 부동산은 저기 하나뿐이고.”

동생은 색이 바래고 프린트된 글자의 끝이 갈라져 덜렁이는 간판을 가리켰다.

“두꺼비 부동산?”

두 사람은 불편한 만큼의 거리를 벌리고 두꺼비 부동산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지금 가면 장사도 안 할 텐데 왜 이 시간에 가잔 거냐?”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아침이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새벽. 당연히 부동산 사무실이 열었을 리 만무했다.

“돈 벌게 해주겠다는데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는 놈이 어디 있어? 냅다 튀어와야지.”

정현석 이사는 간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 여보세요? 두꺼비 부동산입니까? 내가 이 근방에 땅이랑 건물을 좀 사려고 하는데 지금 사무실로 올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럼 부탁합니다.”

초면에 무례하다는 표현을 미묘하게 비켜 갈 정도의 시건방진 태도. 평소 어떤 행실로 사람을 대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봤지? 금방 나오겠대.”

“그래그래. 잘났네.”

툭툭.

대화는 더 이상 없었다.

해가 뜨면서 서서히 더워지는 공기에 짜증을 누르기 위한 담배는 좀처럼 끊길 줄 몰랐고 그렇게 바닥에 꽁초가 몇 개 떨어지는 시간이 지났다.

“아이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두꺼비 부동산 이경수입니다.”

남자는 급히 나온 티가 역력했다.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들번들했으며 아무렇게나 입은 셔츠는 제대로 바지춤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땅딸막한 키에 넓적한 얼굴. 뚱뚱하다 못해 제대로 걸어 다니긴 할까 싶은 비대한 몸까지.

두꺼비 부동산이라는 이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 생김새에 두 형제는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우린 따로 명함이 없습니다. 뭐 직업이 있는 게 아니라서요.”

명함을 건넨 두꺼비, 아니, 두꺼비를 닮은 부동산 중개업자가 손을 거두지 않고 있자 정현석 이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요새 일 안 하는 사람들이 제일 돈을 잘 버는 시대 아닙니까? 자, 들어가시죠.”

철컥.

굳게 잠겼던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중개업자는 불과 에어컨을 켜고 커피를 타기 위해 비대한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 다방이 아직 열 시간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자, 드시죠.”

눈앞에서 커피믹스 봉지를 컵에 넣고 휘휘 저어 쪽 빨아낸 투명한 제조 과정을 본 덕에 커피를 마실 생각이 싹 사라진 두 사람은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슬쩍 치웠다.

“그래, 어디 땅을 보러 오셨습니까?”

“여기가 이 근방에 유일한 부동산이던데 맞습니까?”

지도를 펼쳐 든 중개업자에게 정현석 이사가 되물었다.

“아, 그럼요! 이 근방 매물은 제가 다 들고 있습니다. 어디 다른 데서는 구하지도 못하죠!”

“그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심상치 않은 땅이 있다던데.”

“소문이요?”

‘이 날건달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부동산 중개업자는 잘 밤에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분명 돈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10년 경력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두꺼운 알이 박힌 시계, 그리고 비싼 원단으로 보이는 정장과 구두. 고생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보이는 깨끗한 피부까지.

‘일단 대충 그렇다고 하자. 이빨은 나중에 끼워 맞춰도 되니까.’

계산이 끝난 중개업자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소문이 벌써 밖으로 나갔습니까?”

소문 따윈 애초에 없었다. 아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세 사람 중 누구도 출처와 진위를 알지 못하는 뜬구름이 펼쳐진 지도 위에 지금 막 내려앉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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