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17화 (117/151)

#117. 자승자박(2)

아침이다.

생기가 충만하고 만물이 깨어나는 시간.

“으으…….”

나는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3시간, 어쩌면 그보다 더 적게 잤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이 새벽까지 보드게임을 하는 바람에 어중간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이도 저도 아닌 수면시간에 차라리 밤샌 것만 못한 최악의 컨디션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야옹!”

“그만해. 으으. 밥 줄게. 그만해.”

아침 알람은 진작 꺼버렸다. 어차피 해가 뜨면 알람보다 먼저 누렁이의 핥기 공격을 받게 되니까 말이다.

귀여운 고양이가 아침마다 얼굴을 핥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동물을 딱히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길을 걷다 고양이가 보이면 괜히 손도 한번 내밀어보고 ‘쭈쭈’ 하는 소리도 내봤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그 기분 좋은 공격의 대상이 되고 나니 여간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단 혀가 강아지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마치 때밀이처럼 까끌까끌한 혀는 한번 볼에 닿을 때마다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게다가 진한 입 냄새는 덤.

촤르륵.

밥그릇에 사료가 부어지고서야 누렁이의 공격이 멈췄다.

일단은 출근 준비다. 조금만 버티면 다시 돌아와 잘 수 있으니.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피곤한 몸만 빼면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다.

아니, 조금 빨랐다.

느긋하게 9시가 넘어 밍기적거리며 출근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피곤한 몸이지만 조금 서둘러 차에 올랐다.

오늘은 드디어 우리 MM 프로팀의 미니카의 시제품이 나오는 날이다.

관련 부품들이 오늘 아침 퀵서비스와 택배로 모두 도착했다 했으니 사실상 오늘이 첫 단추를 꿴 날이나 다름없었다.

기대감에 노래도 틀지 않고 서둘러 도착한 사무실에는 벌써 나 말고 다른 직원들의 차가 가득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일찍 왔네요.”

“안녕하십니까.”

모두 인상이 좋지 않다. 아마 오늘 시제품이 나온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듯 보였다. 물론 나도 밤잠을 설쳤지만 조금 다른 일 때문이기에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조그마하게 자리잡았다.

“부품은 다 도착했나요?”

“이제 커버만 남았습니다. 아마 30분 정도 남았을 겁니다.”

커버만 남았다면 그냥 조립을 진행해도 된다. 커버는 동작하는 데에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첫 주행에 미완의 작품을 낼 순 없다.

우리는 회의실에 앉아 부품들을 모두 펼쳐놓고선 택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택뱁니다.”

벌떡.

긴 인고의 시간 끝에 들리는 반가운 소리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무실 입구로 달려갔다.

“우왁!”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진풍경을 마주한 택배기사님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웃지 못할 헤프닝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모든 부품이 한 곳에 모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기사분 전에 우리 집에서도 누렁이 때문에 한 번 놀랐던 분인데 오늘도 일진이 사납게 되셨다.

“조립은 누가 하죠?”

“…….”

나름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누가 완성을 하든 큰 상관은 없지만, 이 순간은 우리에게 정말 특별하다.

철진이의 우격다짐으로 만들어진 팀에 사연 많은 사람이 모였다.

미니카 프로팀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낭만과 꿈 따위는 없이 직장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대회에 출전했고 사활을 걸었다.

1년, 3년, 우리가 일궈낸 성과는 이들이 다닐 수 있는 직장의 수명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운명을 또 한 번 바꿔줄 날이 다가왔다.

“구단주님이 조립하시죠.”

“아닙니다. 백성환 부장님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제가요?”

백성환 부장.

굳이 과거를 캐물을 필요는 없었으나 이곳에 온 사람 중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만년 차장 딱지를 달고 외지의 창고 관리를 도맡아 하던 분이었다. 부장의 직함을 단 것도 이곳에서 퇴직을 시키기 전 파견된 다른 동료들과 직함을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승진을 통보받으셨다.

한직 중의 한직을 전전한 세월.

당연히 나이가 차도록 제대로 업무를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너무나 한직으로 갔기에 매번 정리해고 대상자에서는 제외되었고 그렇게 불안한 직장생활을 지금껏 해오신 분이다.

그랬기에 우리 프로팀에서 백성환 부장님의 열정은 남달랐다. 등을 떠밀다시피 해야 비로소 퇴근하셨고 젊은 직원들과 선수들에게 매번 손수 커피를 타주며 업무를 배웠다.

우리 MM 프로팀은 백성환 부장님께 작은 빚을 진 셈이다. 그 열정에 동화되어 더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 가져가야 했다. 최소한 내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직장에서는.

“그럼 조립을 시작하겠습니다.”

조립은 런너를 뜯는 작업부터였다.

사출 기술이 발전되어 굳이 런너를 고집하지 않아도 분리된 부품을 담을 수 있었지만,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손맛을 지키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마침내 런너에서 부품들이 모두 분리되고 바디에 기어와 바퀴, 모터가 하나씩 자리 잡았다.

“사진으로 볼 때보다 훨씬 조립이 쉽네요. 헷갈리는 부품도 없고요.”

“이 정도면 아이들도 무리 없이 조립하겠어요.”

장난감 조립에 능숙할 리가 없는 중년의 손에서도 망설임 없이 조립이 진행되었다. 우려했던 앞바퀴와 블루투스 수신부 역시 유격 없이 한 번에 자리를 찾았다.

딸칵.

마지막으로 커버가 씌워지고 드디어 미니카가 완성되었다.

“이제 동작해 보겠습니다.”

“어? 그런데 우리 트랙은 어떡하죠?”

“일단 그냥 바닥에서 달려봐야지.”

“트랙이라면 이미 있습니다.”

“네? 미리 제작해서 가져오셨단 말씀인가요?”

나는 방긋 웃으며 손으로 예전에 대회 때 사용했던 트랙들을 가리켰다.

“아!”

“우리는 다미야처럼 힘들게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없습니다.”

독자 규격.

기존에 다미야 미니카와 전혀 다른 디자인, 그리고 크기였다. 대현그룹 법무팀의 자문을 받아 조금이라도 특허 분쟁이 생길 만한 소지를 철저하게 피했다.

그래서 우리 미니카는 다미야의 미니카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가 되었다.

기존 제품보다 작은 사이즈를 고집한 것은 다소 독단적인 내 의견이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소유욕이었다. 어감이 조금 이상할 순 있지만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사이즈는 내가 이 장난감을 온전히 가졌다는 기분이 들게 해준다. 이는 생각보다 중요해서 지금껏 아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장난감들은 모두 자신의 손바닥 크기를 벗어나지 않았다. 만약 제조의 간편함이나 내구성을 구실 삼아 사이즈를 키웠다면 오히려 아이들에게 어필하기가 더 힘들지도 몰랐다.

두 번째는 바로 무임승차다.

이미 다미야의 미니카 트랙은 전국에 퍼져 있다. 이젠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학교 앞 문구점이 아니라 다미야 미니카를 판매하고 있는 공식 매장과 기타 다른 완구 매장에도 다미야의 미니카 트랙은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는 갑자기 불어닥친 미니카 열풍에 맞춘 변화의 바람이었다.

우리 미니카는 이 잘 차려진 인프라에 무임승차를 할 작정이다. 같은 트랙을 달리는데 크기가 조금 작은 미니카가 무슨 대수겠는가?

“이러면 우리 미니카에 맞춘 트랙이 아니더라도 큰 상관이 없겠네요.”

“맞습니다. 오히려 코너링에서 좌우 간격이 넓으니 난이도는 좀 더 있다고 봐야겠죠. 굳이 다미야와 경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모조리 가져옵니다. 다미야는 자신들의 트랙에 우리 미니카가 달리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달려보겠습니다.”

웨에에엥.

전원 스위치가 올라가고 바퀴가 힘차게 돌아간다.

그렇게 트랙에 놓인 미니카가 쏜살같이 트랙 벽을 타고 달려나갔다.

“좌우 동작도 잘됩니다.”

우리가 기획했던 핵심 동작도 부드럽게 잘 움직였다. 좌우로 미묘하게 틀어지는 컨트롤. 굳이 타이밍에 맞게 틀지 않더라도 크게 속도가 줄어들지 않으면서 내가 미니카를 조종하고 있다는 확실한 인지가 된다.

“이제 나머지 시제품도 모두 만들어보죠. 혹시나 있을 간섭도 확인이 필요하니까요. 참, 일본에 가 있는 하시모토 부장에게도 보여줘야 하니 누가 영상 좀 찍어주세요.”

대성공이다.

우리 손으로 만든 미니카는 첫 주행을 무난하게 마쳤다. 다미야의 트랙을 밟고서.

* * *

‘무서운 분이시다.’

차재훈 부장은 힘들게 제작한 시제품의 주행을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민호의 치밀한 전략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부터 다미야를 이렇게 이용하실 생각으로 미니카를 기획하신 건가?’

사실 처음 민호가 미니카를 만들겠다며 PPT파일을 들고 왔을 때는 되지 않을 일로 생각했다.

제조판매업은 그리 만만한 분야가 아니다.

확실한 소비처와 고품질의 제품, 그리고 탄탄한 유통구조까지. 모두 아우르지 못한다면 처참한 매출과 함께 처치 곤란한 재고까지 폭탄으로 떠안게 된다.

그런 분야에 대뜸 PPT파일 하나를 들고 와 뛰어들겠다 했으니 최선을 다해 말리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반드시 저지해야만 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구단주님의 계획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넘어야 할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것쯤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검은 속내가 드러난 미니카의 실체는 너무도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자승자박. 다미야는 자신들의 꾀에 넘어갔구나.’

구단주의 인기를 이용해서 알맹이를 뽑아먹고 치졸한 방법으로 일본팀에게 우승을 안겨주려던 꾀는 도리어 자신들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효과를 불러왔다.

다미야가 구단주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단주님이 다미야가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구축한 인프라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 웃지 못할 상황을 다미야는 막을 수 없다. 자신의 미니카를 들고 온 아이에게 우리 미니카가 아니니 달릴 수 없다며 매정하게 막아서는 모습을 보였다간 전 세계에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기껏해야 미니카대회의 프로팀 구단주.

미니카에 프로팀이 생긴 것부터가 아이러니한 상황일진데 그 프로팀의 수장이래 봤자 얼마나 힘이 있겠는가? 그러나 구단주님은 사비까지 들여 이 프로젝트를 해냈다. 미니카 프로팀이라는 짧지만 명확했던 정통성까지 지키면서.

다미야의 미니카 시장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뒤이어 터지는 애니메이션으로 제품 홍보까지 성공한다면 과연 얼마나 큰 수익이 될지 차재훈 과장은 머릿속에서 쉽게 계산이 되지 않았다.

“참, 선수분들은 기존에 다미야 부품이 우리 미니카에 잘 부착되는지도 테스트해 주세요.”

“부, 부품까지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사용자들이 우리 미니카에 무슨 개조를 하든 우리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요.”

씨익.

구단주님의 웃음은 서른 중반이라 믿기 어려운 잘생긴 배우의 상쾌한 미소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다시없을 악인의 비웃음으로 직원들에게 비춰졌다.

그리고 이 동네에 자승자박을 노리는 사람이 아직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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