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황혼의 듀얼리스트(1)
우희왕.
TCG장르의 간판스타다. 매직더갠더링이라는 원조가 있긴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 대중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한 TCG장르의 게임은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우희왕이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우희왕 세대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카드는 그리 정형화된 룰이 없는 게임이었다. 기껏해야 섞어서 내민 카드에 적힌 숫자나 별의 개수 따위로 승패를 겨루는 것이 전부였다.
우희왕은 안타깝게도 우리 다음 세대의 유행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키덜트의 바람이 불어 어른들의 장난감과 아이들의 장난감을 가르던 경계가 무너졌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들도 종종 이 카드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뭐 인식이 아주 다 바뀐 건 아니라 게임이나 하지 이런 애들 놀이나 하냐는 타박을 받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일단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카드를 사야 한다. 여기서 일본의 악명 높은 가챠 시스템이 현실판으로 다가온다.
봉지에는 10개의 카드가 들어 있다. 세대를 거치면서 마치 컴퓨터게임의 확장팩처럼 추가 카드가 나오긴 했지만, 애초에 이 시골 문방구에 그런 최신 카드까지 주르륵 나열할 공간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이런 카드류 게임은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카드의 성능이 복잡해지니 할머니가 하시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봉지에는 당연하게도 랜덤한 카드가 들어 있다. 희귀한 카드부터 경기에 한 번도 나오지 못할 이른바 똥카드까지.
그래서 원하는 조합이 나올 때까지 용돈을 털어가며 끝나지 않을 가챠와의 싸움을 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시스템이었다.
최소한 게임은 40장으로 가능했다.
“카드 성능은 다 외우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나올 때마다 확인하면 되니까요.”
“이이.”
룰은 확실히 화투와는 괴리감이 있어 할머니께서 한 번에 이해하긴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부모는 자식의 질문을 귀찮아하는 법이 없다. 달이 왜 자신을 따라오냐는 질문을 수백 번 받으면서도 웃으며 네가 좋아서 따라온다 답해주는 것이 부모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질문을 싫어한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익숙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것들도 귀찮다며,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넘겨짚고 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친 질문들은 가슴에 작은 덩어리로 남는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그대들에게 왜 그때 상냥하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의 덩어리로.
나 또한 그랬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뒤늦게 몰려온 후회는 지금도 쉬이 떨쳐내지 못했다.
할머니가 몇 번이고 여쭤보시는 질문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형, 엑스트라 존이 뭐였지?”
“거 있잔여. 요사시런 조건이 있어야 내놓을 수 있는 몬스터를 뒤집어 놔야제.”
“아, 맞다!”
넌 왜 윗집 할머니보다 이해가 느린 거냐?
정작 윗집 할머니는 금방 게임이 손에 익으셨다. 나도 우희왕의 룰을 몰랐기에 너튜브를 보면서 급하게 익힌 터라 설명이 빈약했을 텐데 곧장 철진이와의 경기를 주도해 나가셨다.
“자, 인자 내 턴이니께 철이를 때리믄 끝이구먼!”
“맞습니다. 이렇게 잘하실 줄 몰랐어요.”
윗집 할머니의 완승이다.
혹시나 흥미가 없으시거나 너무 어려워하시면 포기하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알려드린 게임을 이렇게 잘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철진이의 이해력이 이렇게 떨어지는 것도 더해서 말이다.
“내 카드 조합이 안 좋아서 그래.”
“그래.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항상 패자가 말이 많은 법이다.
할머니에게 진 게 충격이긴 했는지 철진이는 얼른 패를 섞어 다음 판을 준비했다.
“나는 여까지 할껴.”
“네?”
“얼른 가서 나도 선생 노릇 해야제! 그래야 빨리 해볼 거 아녀.”
그랬다. 윗집 할머니만 할 줄 안다고 진행될 게임이 아니다. 결국, 고스톱 멤버는 따로 있었고 이 3명이 모두 우희왕 카드게임을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라고 철이는 수준이 조까 떨어지니께 연습을 좀 해야 쓰것어.”
“네? 아니, 할머니, 제가 카드가 조합이…….”
“그려그려. 연습을 하더라고, 연습을. 아직 젊으니께.”
마지막까지 트레쉬토크를 철진이의 면전에 시원하게 날리신 할머니는 잘 펴지지 않는 무릎을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 * *
삼정그룹의 핏줄이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저녁 시간은 상진이가 빠지면서 두 사람의 독대가 되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독대의 자리가 되면 무슨 변명을 해서라도 피할 자리였으나 부자지간의 서먹했던 거리는 금방 좁혀졌다.
어느 가정집의 무심한 밥상처럼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에서 조동욱 회장은 아들보다 손바닥만 한 폰화면을 더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파프리카 맞고!)
“아버지, 그거 헛수고입니다.”
“박 상무도 그래 말하드라. 근데 느그들이 모르는 기 있다. 이것도 결국 사람이랑 하는기라. 무슨 패를 내고 고를 할지 스돕을 할지, 이 치열한 심리전을 갈고 닦는 과정인기라.”
식음을 전폐할 정도는 아니나 요즘 들어 밤 늦게까지 폰 게임 삼매경에 빠진 조동욱 회장의 아바타는 매번 돈을 탕진할 때마다 반강제적으로 구입한 옷들로 여느 연예인 뺨치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뇨. 이제 마을회관에 가시면 고스톱을 못 하실 거라고요.”
“뭐라꼬? 와?”
“인제 종목이 바뀌었어요.”
“뭐 섯다라도 하나? 할마시들 판돈 커지는 거 안 할 낀데.”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도 엄연히 예의와 법도가 있었다. 잘 지켜지지는 않는 듯했지만. 노골적으로 판돈이 커지는 섯다는 아예 경기조차 열리지 않았고, 어쩌다 인원이 부족해 하게 되는 맞고도 판돈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엔 이걸 하십니다.”
“그기 뭐꼬?”
철진이가 안주머니에서 꺼낸 카드들은 돋보기안경을 들어 눈을 찡그려 봐도 도통 그 출처와 용도를 알기 어려웠다.
중심에는 조잡한 프린팅이 되어 있고 하단에는 뜻 모를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거 얼라들 장난감 아이가?”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듀얼은 장난이 아닙니다. 윗집 할머니부터 옆집, 뒷집 할머니까지 요즘 이 듀얼을 안 하는 분들이 없습니다.”
진실이 왜 고귀하고 고결한 단어가 되었을까? 우리가 거짓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오늘 오후, 그것도 처음 봉투를 뜯어 두어 판 해봤을 뿐이면서 세상 다시 없을 듀얼리스트가 된 철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 선동을 하는 중이었다. 철진의 선동은 엄밀히 따지자면 거짓으로 보기 어려웠다. 분명히 윗집 할머니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아니,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카드 상성이 좋은, 실력과 카드로 무장한 채 마을회관으로 가셨다. 그 뒤에 상황은 철진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정황상 곧 우희왕 카드가 유행할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단 한 명의 입을 거쳤을 뿐인데 선풍적인 유행이 일어난 것으로 기정사실화 되어버렸다.
‘이기 진짜 할마시들이 새로 하는 게임이라고?’
믿기 힘들었지만 삼정그룹 장손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만! 카모 그 할마시들도 오늘 배았단 말이가?”
“네. 우리 마을에 우희왕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민호 형도 오늘 배웠습니다.”
블루오션.
무릇 장사를 하면서 이 블루오션을 먼저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면 큰돈을 벌기 어려웠다.
선점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비슷한 덩어리는 차지해야 했다. 후발주자가 동등한 위치에 가기까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는 굳이 경영이 아니라 고스돕판에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인자 선수는 없고 다 초짜배이인기라! 카모 나도 승산이 있다!’
조동욱 회장은 그 순간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떠나는 한 명의 개척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간 무수히 많은 패배를 겪으며 어느 정도 벽을 느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흐름을 읽는 능력과 상대방의 패를 투시라도 하는 것처럼 훤히 꿰뚫는 눈,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심리전까지. 무엇 하나 자신이 유리한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게임이다.
수십 년간의 경험과 노하우가 도움이 될 순 있지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결정적 한 방이 되진 못할 것이다.
철진의 우희왕 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조동욱 회장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우애 하는 기고?”
“우선은 한 번씩 번갈아가며 턴이 돌아옵니다. 이게 점수고…….”
평소 쌀 한 톨도 아깝다며 그릇을 치우기 전에 행여나 밥알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던 조동욱 회장은 먹던 밥그릇도 저만치 밀어놓고 식탁에 카드를 내려놓으며 설명하는 철진이의 말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이내 철진이의 약팔이는 금방 그 실체가 탄로 나 버렸다.
“아, 아닌가? 이게 함정카드 자리였던가?”
“니 확실하게 아는 거 맞나?”
“아버지, 잠시만요. 민호 형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글마도 오늘 배았다믄서?”
답답한 소리를 하는 탓에 하마터면 자식이라는 것도 잠시 잊고 모진 말이 나올 뻔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던 아들은 ‘이게 아닌가?’라는 신뢰도 떨어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카드를 더듬어 들었다 놓길 반복했다.
‘이놈은 답이 없다.’
절대 직감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자신이었으나 이번만은 확실했다. 시원치 않은 선생에게 배워서 어디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있겠는가?
선생이 필요했다. 여우 같은 할마시들의 코를 단박에 납작하게 만들어 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이.
조동욱 회장은 폰을 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찾으셨습니까?)
“어, 비서실이제? 우리 아들 중에 우, 우희왕? 그거 잘하는 아 있는지 좀 알아봐 도가.”
(우희왕 말씀이십니까?)
“그래. 사업에 좀 필요한 부분이 있는 기라.”
삼정그룹 총수의 직함을 달고 차마 애들이 가지고 놀 법한 카드게임을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조동욱 회장의 둘러댐은 꽤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찾는 대로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빨리 찾아라. 시간이 읍다!”
돈을 들여 전문가를 초빙할 돈이 아까웠던 조동욱 회장이 자주 쓰는 수법이었다.
삼정그룹에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직원들이 자그마치 10만. 확률적으로도 이 중에 우희왕 게임을 잘하는 직원이 있을 가능성이 없을 가능성보다 월등히 컸다.
그렇게 삼정그룹의 그룹웨어를 타고 붉은 글씨로 긴급 공지 메일이 발송되었다.
「사내 긴급 공지(2023.07.26.)
우희왕 카드게임(모바일 게임 포함) 대회에 입상 경험이 있거나 혹은 진행 경험이 있는 사원은 비서실로 연락 바랍니다.」
짧은 메일은 너무나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잘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당연히 나서는 사람이 없으리라 판단해 확실한 낙인이 찍힌(?) 사람을 찾았다. 대회 입상과 관련 대회 진행 경험은 오프라인 행사라면 어디라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숨지 못할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이 담긴 한 줄이었다.
‘쪼매 치사하지만 사기 치는 것도 아이고 그냥 배우는 긴데 뭐 어떻노?’
자신에게까지 공지 메일이 날아온 것을 확인한 조동욱 회장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라 비틀어버린 밥을 가져와 마저 숟가락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