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20화 (120/151)

#120. 황혼의 듀얼리스트(2)

삼정그룹의 주인. 맨손으로 도산 위기에 처한 회사를 일으킨 신화의 주인공. 경영 능력을 입증한 로열패밀리의 수장.

조동욱 회장님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너무나 많았다.

‘내가 정말 그런 분을 만난다고?’

청년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룹웨어로 날아온 공지는 아직 자신의 메일함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업무도 많은데 이 정체불명의 지시를 따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직장이다. 자고로 직장생활이라 함은 긁어 부스럼을 조심해야 한다. 이미 업무는 과하다 못해 넘치도록 받는다. 여기서 행여나 다른 업무를 추가로 받는다면 기약 없는 야근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엔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재작년 우희왕 전국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던 경력을 이미 알고 있다면 오히려 난감한 처지가 되니까 말이다.

결국, 고민 끝에 비서실에 연락을 했고 곧장 본사 건물로 호출을 당해 지금 비서실이라 적힌 문 앞에 서게 되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사, 삼정무역 자재부 서인홍 사원입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회장님이 금방 내려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네넷!”

긴장한 탓에 과하게 우렁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벌컥.

“아, 안녕하십니까! 삼정무역 자재부 서인홍 사원입니다!”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다. 인사 한번 씩씩하구마. 니가 그 우이왕 잘하는 아가?”

“네넷! 재작년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했습니다!”

“전국구구마. 잘됐다. 여 앉아봐라.”

조동욱 회장은 비서실의 빈 테이블로 서인홍 대리를 불렀다.

“그 우이왕은 도대체 우애 하는기고?”

“네?”

“그 카드 게임 말이다.”

‘카드게임 업계의 동향 분석이 아니라 게임 방법을 물으시는 건가?’

서인홍 대리는 당황하여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삼정그룹의 회장님이 찾으시니 당연히 우희왕 게임의 매출과 판매 실적, 그리고 업계의 동향을 물으실 줄 알았다.

따로 보고서까지 만들어 가져왔는데 정작 필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우, 우선은 카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40장을 조합해서 상대방과…….”

“잠깐만! 천천히 말해봐라. 아직 덜 받아 적었다.”

나이를 잊은 만학도는 수첩에 선생님의 말을 받아 적느라 분주했다. 수업 내용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배움 앞에는 나이도 돈도 소용없는 모양이다.

* * *

문방구는 한가하다. 손님이래 봐야 놀러 오는 세 녀석 말고는 딱히 없으니 퇴근한 뒤에 조금 늦장을 부리면서 문을 열어도 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아, 기다리고 있었는디 인자 오면 우짜자는 겨.”

“하하. 직장을 다니니까요. 어서 들어오세요.”

“이이.”

도대체 언제부터 기다리고 계셨는지 할머니는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하셨다.

“을매여?”

전처럼 문방구를 구경하시는 줄 알고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시원한 빅카스를 가져오려 했으나 할머니께서는 그 틈을 허용해 주지 않으셨다.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카드 뭉치 집어오신 할머니가 냉큼 가격을 물으신다.

“3천 원 주시면 됩니다.”

“하이고메, 요 쪼매난 기 비싸기도 비싸. 그쟈?”

“요즘 물가가 하도 오르니까요.”

내가 알기로 이 카드는 상당히 오랫동안 같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가 상승과는 무관한 상품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쌈짓돈을 터는 마당에 이 정도 립서비스는 당연했다.

“이이. 여기 3천 원.”

“어르신은 어디서 이렇게 10원짜리를 한 뭉치씩 가지고 오세요?”

지폐가 나올 줄 알았건만 윗집 할머니의 전랑에서 나온 돈은 두툼한 10원짜리 동전들이었다. 그것도 아직 은행 종이에 멀끔하게 포장된 새 동전들이다. 장사를 하시는 것도 아닌데 100원짜리도 아니고 이 10원짜리 동전들을 들고 다니실 까닭이 없었다.

“이이, 나가 옛날에 고스톱 해서 호구 양반들한테 다 딴 거여. 아직 집에 몇 뭉탱이나 더 있제! 그럼 수고햐.”

두 회장님의 피가 묻은 돈이었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토록 처절하게 싸우시고도 남김없이 빼앗겼던 돈의 마지막 주인은 내가 되었다.

그렇게 찝찝한 출처를 알게 된 돈까지 포함해서 오늘 매출은 자그마치 2만3천 원. 모두 우희왕 카드로만 나온 매출이다.

한 명당 40장의 카드가 필요하니 초반 투자가 상당히 많이 되어야 하는 분야였다. 그중에 또 같은 카드는 3장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 서로 품앗이를 하듯 카드를 나눈다 해도 결국 쓰지 못하는 카드가 생겼고 할머님들이 줄지어 카드를 사가시는 웃지 못할 진풍경이 펼쳐졌다.

명절날 어쩌다 손자들의 손을 붙잡고 장난감이나 사러 온 날이 아니면 문방구에 올 일이 없으셨던 분들이 이렇게 내가 문방구를 열 시간만 기다려 오픈런을 하실 줄이야.

“이게 그렇게 재미있나?”

아쉽게도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녀석이다.

미묘했다. 하필 고학년의 아이들은 이미 문방구를 졸업하고 기껏해야 과자나 사러 들리는 데에 그칠 시기에 유행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놀거리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문방구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했다.

집집마다 상당한 몸값으로 귀한 대접을 받던 컴퓨터는 더 이상 아이들이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컴퓨터 속에 친구들이 모두 모였고 미니카와 딱지 대신 몬스터를 같이 잡으며 진짜 같은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문방구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문방구만이 아니다. 우후죽순 생겨난 피시방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던 문방구와 분식집, 그리고 오락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뭐 영원한 건 없으니까.

나에게 이 우희왕 카드는 격변의 시대의 끝자락을 장식했던 녀석이었다. 타지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종종 학교 앞 문구점에서 바닥에 버려진 우희왕 카드들을 봤으니 말이다.

창고에서 새로 꺼낸 카드들을 다시 진열하면서 어쩐지 오래된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읽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케톡.)

「상진: 한국 도착.

민호: 다음 주에 온다더니 일찍 왔네?

상진: 잠깐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요. 2일 뒤에 바로 나가요.

민호: 이야. 우리 중에 일다운 일을 하는 사람은 상진이랑 지환이뿐이네.

철진: 아, 나도 올 초에 철야했다고.

철진: 맞다. 이거 봐라.

철진: (사진)

상진: 뭐야?

민호: 우희왕 카드. 어르신들 사이에서 지금 인기다.

지환: 야레야레. 우희왕인 것입니까? 내가 한때 듀얼리스트였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민호: 우린 못 해, 인마!

지환: 왜입니까?

민호: 재고가 없어.

지환: 아.」

우리는 우희왕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하지 못한다, 가 맞는 표현이다. 카드는 진열하기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좀처럼 없던 일이기에 우리가 듀얼을 할 만큼 충분한 개수가 아니었다. 지금 발주를 넣어도 다음 주는 되어야 재고가 들어온다.

우리 중 그나마 카드가 있는 사람은 철진이가 유일했다.

부웅.

한창 케톡을 하던 중에 익숙한 차가 마을로 들어왔다.

회장님의 검은색 세단이다.

“안녕하세요, 회…….”

마침 문방구의 문이 열려 있었기에 인사를 드렸으나 회장님은 나를 보지 못하셨는지 곧장 마을회관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유독 그런 날이 있다. 모두가 분주하고 어수선한 날. 이 한적한 시골 마을도 오늘이 그런 날인가 보다.

***

드르륵.

드디어 운명의 문이 열렸다.

“올만이구마잉.”

“잘 지냈는교?”

“아, 우덜은 누구 덕택에 풍족하게 지내제!”

“크흠!”

시작도 전에 매운맛의 도발을 받은 조동욱 회장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근디 이를 우짜나? 우린 인자 고스돕 안 치는디.”

“내사마 다 이야기 듣고 왔소.”

“아따 멀리 사시믄서 벌써 그짝까지 소문이 갔디야. 그럼 덱은 준비해 왔것네.”

“아, 수저 안 챙기고 동냥 다닐까.”

“옴마. 그 요사시런 가방은 뭣이당가?”

평소 낡고 해진 서류가방이 불룩하도록 동전을 가지고 왔던 조동욱 회장이 오늘은 검은색 하드 타입의 007가방을 꺼냈다.

“카드는 이 관리가 생명인기라!”

푸쉬.

가방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바깥 공기와 만나 조그만 아지랑이를 피웠다.

“이 채신 기술로 내부 습기를 싹 잡아삐니까 카드가 빳빳하게 살아 있다 아인교.”

“뭘 얼마나 대단스러운 덱이길래 이래 가방까지 요란하게 들고 다니는 거여.”

“뭐 짜달시리 다른 거 없소. 고마 몇 봉지 뜯어가 가져왔지.”

아니다.

조동욱 회장은 이 덱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TCG게임인 우희황을 하기 위해선 규칙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카드의 효과를 모두 숙지해야 비로소 게임이 가능했다.

이는 몇 개 없었던 과거 시절에는 큰 제약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확장팩이 무려 10개가 넘었다. 이 수천 가지의 카드를 모두 외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최대한 상대방의 덱에 영향을 적게 받는 빌드를 짜야 했다.

거기에 더해 너무 좋은 카드가 많아도 안 된다.

카드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졌다는 아들의 구시렁댐을 저 할마시들이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기껏 이기고도 찝찝함을 남길 빌드는 차라리 안 하니만 못했다.

그렇게 전국구(?) 선생의 도움을 받아 만든 최상의 덱이 당당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잉? 이거 다른 카드 아녀? 우리는 요 파란 봉다리에 든 카드만 하는디?”

“뭐, 뭐라꼬? 이게 국제대회 표준 카드인데 뭔 소리 하는교!”

“아, 국제 표준인지 뭐신지는 나가 모르것고 우리 동네는 이 붉은 눈의 백룡의 전설 이거만 취급하니께 요 카드는 안 디야. 정 하고 싶으믄 저 호야문방구가서 사 오등가.”

“쪼매만 기다리소. 내 금방 사서 올끼니까.”

밤을 새워 외운 카드들의 성능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빈손으로 떠날 순 없었다.

‘카드가 거기서 거기지. 고마 얼른 사가 훑어보면 비슷할끼라!’

조동욱 회장의 짐작은 정확했다. 카드는 새로 출시하면 할수록 점점 그 효과가 복잡하고 설명이 길었다.

확장팩마다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어야 하고 그 기능에 대처할 다른 예외 조건까지 모조리 카드의 설명에 넣어야 했으니 심한 경우에는 텍스트가 설명칸을 뚫고 프린트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붉은 눈의 백룡의 전설은 처음 나온 카드다. 오히려 힘들게 익힌 조동욱 회장의 카드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알기 쉬웠다.

탁탁탁탁.

구두를 찾아 신을 겨를도 없었다.

마을회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슬리퍼를 서둘러 신고 문방구로 달렸다.

“헉헉… 문방구 있나!”

“네, 회장님, 안녕하세요.”

“그… 그… 카드 있나?”

“우희왕 카드요?”

“그래, 그거 어데 있노!”

“방금 전에 다 나갔습니다. 안 그래도 발주서에 적어서 보냈으니 아마 다음 주에 올 겁니다. 요즘 찾으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아이고메.”

털썩.

“회장님?”

그 발주서대로 물건을 가져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오랜만에 뜀박질이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동욱 회장의 신형이 무너졌다.

듀얼리스트의 길은 고독하고 힘들다.

예순을 넘긴 황혼의 듀얼리스트는 특히나 더 제약이 있는 건지 조동욱 회장의 듀얼은 시작도 하기 전에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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