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황혼의 듀얼리스트(3)
“어머니, 저희 왔어요!”
“이이. 아이고, 내 새끼들. 오느라 힘들진 않았고?”
“밀리지만 않으면 금방인데요, 뭘.”
“그랴그랴. 덥겠다, 후딱 들어가야. 에어컨 틀어놨응께.”
자식의 방문이 반갑지 않은 노인은 없다. 하지만 저마다의 삶이 있고 도시 생활이 바쁜 줄 알기에 안부 전화만 해줘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할머니, 이 카드 다 뭐예요?”
“이? 우희왕 카드여. 우리 마을회관에서 요새 요고 한다고 끼니도 거른다니께.”
“푸하하! 할머니가 진짜 이걸 한다고요?”
할머니와 우희왕 카드.
도저히 조합될 것 같지 않은 이 두 단어가 무심하게 폰게임만 하던 손자에게 웃음꽃을 피게 만들었다.
“우리 똥깡아지도 할 줄 아는가?”
“그럼요! 제가 학교에서 다섯 번째로 잘했었어요!”
정직하고 바르게 큰 손자다. 아무도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내용에 그저 제일 잘한다, 거짓말을 해도 될 법한데 구태여 손가락을 펴며 다섯 번째라 말했다.
“그럼 이 할미랑 한번 해볼까?”
“그런데 저 카드 안 들고 왔어요. 하도 옛날이라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옛날엔 재미있게 했었는데…….”
“이 할미가 사 줄 테니께. 걱정하덜 말어. 자, 가자!”
“어휴, 됐어요. 애 이제 대학 가는데 장난감은 무슨! 괜히 돈 쓰지 마세요.”
“아녀! 어멈아, 나가 돈이 많아서 그랴.”
가끔 부쳐드리는 용돈 외에 산나물이나 내다 파는 벌이가 얼마나 잘되겠냐는 짐작에 시어머니를 말리던 며느리는 사랑방캔디 통에 가득 찬 10원짜리 동전들을 보고 만류를 그만두었다.
“어머니, 잔돈이 왜 이리 많으셔요?”
“이이. 따로 쓸 떼가 없으니께.”
차마 고스톱을 해서 돈이 많아 보이는 양반의 주머니를 털었다 말하기 어려웠던 시어머니는 멋쩍은 듯 웃으며 얼버무렸다.
“자, 우리 똥깡아지 카드 사러 가자.”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본 게 얼마 만이던가?
어릴 땐 곧잘 어리광도 부리고 할머니의 등에 업혀 다녔다 들었다.
언젠가 봤던 사진첩에도 할머니의 포대기에 업혀 자고 있던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만남이 뜸해진 할머니는 어색한 존재가 되었다.
일 년에 몇 번 오지도 않는 할머니 집이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지 않았던가.
방학이 되면 굳이 가라 하지 않아도 자고 오겠다 떼 쓰던 할머니집은 어느새 재미없고 지루한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아니다.
변한 것은 자신이지 할머니의 집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집은 모든 것이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이가 나간 컵과 접시들, 그리고 언제부터 걸려 있었는지 모를 오래된 액자와 자신이 장난 삼아 한쪽을 뜯어놨던 나전칠기 이불장까지.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주는 사랑은 단 한순간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훌쩍.
“우리 똥깡아지, 왜 우는가?”
“아,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요.”
“이? 비비지 말어야! 이 할미가 후 불어줄 테니께!”
“아니에요. 다 빠져 나왔어요.”
할머니의 걱정이 한차례 호들갑처럼 지나간 사이 두 사람은 문방구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어? 할머니 손자예요?”
“이이. 우리 똥깡아지.”
“세상에, 이렇게 컸어요? 난 초등학생인 줄 알았는데.”
“아, 무슨 소리여. 인자 대학 간다니께.”
“남의 자식은 빨리 큰다더니 진짜네요. 하하.”
민호는 자신의 키만큼 커버린 할머니의 손자를 보며 짐짓 어른스러운 체를 했다.
언젠가 반찬을 받기만 한 것이 미안해서 손자가 오면 주라며 챙겨드렸던 과자와 얄궂은 장난감들이 떠올라 민망해진 탓에 괜히 손자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인 민호는 냉장고에서 빠빠우 두 개를 꺼내 할머니와 손자에게 내밀었다.
“이거 날도 더운데 드시면서 가세요. 마을 회관으로 가시죠?”
“이이, 하이고, 자꾸 파는 걸 주면 우쨔?”
“아니에요. 반가워서 그래요.”
민호도 어르신들에게는 아직 핏덩이 아이에 불과했지만 민호의 입장에서는 포대기에 쌓여 있던 아이가 장성한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손자는 민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한 손에 시원한 아이스크림의 냉기를 느끼며 문방구를 둘러봤다.
장난감은 진작에 졸업했다.
어쩌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사는 물건이라 해봤자 학용품이나 과자가 전부였다. 용돈은 대부분 피시방에서 쓰였고 이런 조잡한 장난감은 좀처럼 볼 기회조차 없었다. 우희왕 카드는 그나마 그런 아이들이 문구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의 유일한 놀이였기에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더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도 되니께 찬찬히 봐야.”
“그냥 이것만 살게요.”
손자는 행여나 할머니가 허투루 돈을 쓰실까 싶어 얼른 우희왕 카드 몇 뭉치를 집었다.
“제가 살게요.”
“아녀아녀! 내가 손주 사주고 싶어서 그러니께 할미가 살껴.”
“저도 돈 있어요.”
“아니래도, 참말로!”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결국 이긴 사람은 오랜만에 손주에게 할머니 노릇을 하고 싶었던 윗집 할머니였다. 밭일하느라 여기저기 흙이 묻은 전낭에서 십 원짜리 몇 뭉치가 또 한 번 가득 나왔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 손자는 오랜만에 손에 들린 우희왕 카드를 집에 가서 뜯을 인내심이 바닥나 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대충 입에 물고 봉투를 뜯자 이질적인 비닐 냄새를 뚫고 그리운 향이 콧속으로 들이닥쳤다.
입에 문 싸구려 아이스크림 냄새도 이겨낼 그리움의 향기.
추억은 눈에 담기지 않는다.
코와 귀, 그리고 손끝에 담긴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이 추억이랄 게 무어가 있겠냐만은 그리움의 순간은 책갈피와 같았다. 300쪽짜리 책이나 얇은 그림책이나 저마다 꼽아놓고 싶은 곳이 다를 뿐.
손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덱을 세팅했다. 카드는 두 손에서 부지런히 옮겨지며 가지런히 자리를 찾아갔다.
“하이고, 그걸 다 애우는 가배. 우덜은 햇깔려서 달력 뒤에다 적으면서 하는디.”
“할머니가 진짜 이걸 하세요?”
“아, 고럼! 지금도 저짝 마을회관에 가믄 지금도 하고 있을 껴. 울 손주도 가볼 텨?”
“에이. 거짓말.”
거짓말이 당연했다. 할머니 집에 있던 우희왕 카드도 이걸 사놓으면 손주와 놀아줄 수 있다라고 어디서 주워 들으셨으리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손자는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언능 와야!”
드르륵.
“이, 이게…….”
마지못해 할머니의 뒤를 따라 들어온 마을회관. 그곳에선 20살의 적지않은 인생을 살아온 손자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 거미 사람은 인자 장착마법으로 강해진 겨. 자, 한번 칠 테면 쳐 보드라고!”
“하! 이 할마시가 어디서 사기 듀얼을 배워왔댜? 나가 어둠의 힘은 흑마족 몬스터만 강하게 맹그는 걸 아는디!”
몸빼바지를 입은 어르신들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듀얼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
찰칵.
손자는 이 믿기 힘든 상황을 반드시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찍힌 한 장의 사진은 얼마 뒤, 살이 붙어 손자가 자주 가던 게시판에 올라갔다.
「제목: 흔한 시골 마을의 풍경.jpg
야, 요즘 시골 마을에서 듀얼 유행하는 거 아냐? 구라 같지?
나 할머니 집 왔는데 여기 좀 골 때림. ㅋㅋㅋㅋ
도대체 이게 왜 이 촌동네에서 유행하는진 모르겠는데 마을회관에 어르신들 모여서 듀얼하고 계신다;;
못 믿을 것 같아서 사진도 찍어옴.
(사진)
근본 백룡덱만 가능하고 확팩은 쓰지도 못함. ㅋㅋㅋ
나도 다음 주에 바로 팩깡해서 원정 한번 더 올 예정.
아, 그리고 여기 이길 때 남은 피에서 100 나누고 나온 숫자만큼 상대방한테 돈 줘야 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해봤자 10원에서 50원 사이인데 그래도 돈 걸리니까 개 쫄깃함.
야 그리고 어르신들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나 여기서 한 판도 못 이김. 할매들 진짜 잘함;;;;;
└ 김치찌개맨: 미친 어둠의 듀얼ㅋㅋㅋㅋㅋ
└ 푸치: 거기 어디냐? 주소 좀.
└ 샤바두바: 근본덱이면 개꿀잼이겠다 진짴ㅋㅋㅋㅋㅋㅋㅋ
└ ㅇㅇ: 나도 간다 주소 내놔.
└ ㅇㅇ: TGC갤은 유동이 살린다.
└ ㅇㅇ: 판돈 걸리는 거 개 웃기네ㅋㅋㅋㅋㅋㅋ
└ ㅇㅇ: 주소좀」
* * *
“네, 2천 원입니다.”
뭔가 잘못되었다.
어르신들이 사고 나면 분명 우리가 살 기회가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다른 손님들이다.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버스도 얼마 안 오는 이 촌구석 문방구에 카드를 사러 오는 손님이 너무 많았다.
결국, 통째로 가져가려는 사람까지 나오는 바람에 부랴부랴 팩은 인당 2개까지라고 적어놨지만 오늘도 금방 동날 기세였다.
“사장님, 여기서 듀얼 해도 될까요?”
“아, 잠시만요. 트랙 치워드릴게요.”
팩을 산 사람들은 무언가 홀린 듯이 마을회관으로 하나둘 들어가더니 이젠 마을회관에도 자리가 없나 보다. 이 여름에 결국 평상 위까지 듀얼리스트들이 점령해 버렸다.
솔직히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나도 딴에는 인터넷상에 유명인이다. 아니, 이었다고 해야 하나? 미니카 짤방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곤 하지만 MM 프로팀 창단식과 세계대회에 우승한 소식은 제법 뉴스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미니카 프로팀이 운영하는 문방구.
분명 큰 화제가 될 것이라 예상해 나름 긴장하고 있었으나 김칫국에 지나지 않았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나 가끔 가는 국밥집과 백반집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은 전무했다. 더불어 이 시골 문방구에 내 얼굴을 보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인터넷의 떡밥은 쉼없이 굴러갔고 그렇게 우리 MM 미니카 프로팀과 내 이야기는 새로운 떡밥의 파도에 휩쓸려 저 깊숙이 묻혀버렸다.
그런데 무슨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진 것일까? 정작 문전성시가 된 곳은 어르신이 모여 테리비나 보던 마을회관이다.
“거 두 명! 여짝에 자리 났응께 빨리 들어오드라고!”
어디서 구해 오신 건지 커다란 경광봉을 든 이장님이 마을회관에서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평상에 앉아있는 두 명에게 크게 소리치셨다.
“야, 자리 났대. 빨리 가자.”
그렇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두 명의 손님이 떠나고 문방구는 잠시 여유로움을 찾았다.
“휴우.”
가만히 앉아서 계산만 한 주제에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나는 뭉친 어깨를 이리저리 돌렸다.
“형, 앞에 차들 다 뭐야?”
“나도 모르겠다. 퇴근하고 오니까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던데?”
“또 어디 사진 퍼진 거 아니야?”
“아직 찾아보진 않았는데 아마 그럴 거야.”
이미 한 번 전적이 있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는 그때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사태도 그런 사진 한 장이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오랜만에 장사다운 장사를 하는 건 좋지만, 정도가 있어야 한다. 복작이는 마을회관에 가기 전 손님들은 꼭 이곳에서 우희왕 카드 팩을 사가니 지금껏 양복도 벗지 못하고 카운터를 지키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려면 빨리 이 사태를 수습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