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충만한 용기(1)
“저쪽은 무슨 덱이야?”
“붉은 눈의 백룡덱. 방금 결승 올라온 사람은 잘 모르겠네.”
의외였다.
박 상무님, 아니, 회장님이 결승에 올라오실 줄이야.
후원사 대표가 결승에 진출한 것도 조금 민망한 일이나 이곳에서 회장님을 만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주변에는 결승전답게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는 마을회관의 커다란 에어컨으로도 식히지 못해 가슴을 조금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는 테이블에 덱을 내려놓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카드 수비로 세트. 턴을 넘깁니다.”
“저도 카드 한 장을 수비로 세트하겠습니다.”
첫 턴부터 초반은 공방전 없이 싱겁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지루한 턴이 계속될수록 듀얼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침묵은 점점 더 깊어졌다.
맴맴.
닫힌 창문 너머 늦여름의 매미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족히 백 명도 넘게 모인 이 공간에 흐르는 정적이 건물 밖 소음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가 대회 규정으로 사용하는 붉은 눈의 백룡의 전설 팩은 초장기에 나온 카드들인 만큼 그 성능이 단순하고 직관적이었다.
후반을 도모하거나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카드는 지극히 한정적이고 그 성능도 제한적이다.
빠르게 몬스터를 내고 상대방의 체력을 한 턴이라도 먼저 깎는 싸움.
그런데 정작 결승에 올라온 두 듀얼리스트는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황금 같은 초반 턴을 그저 카드나 뽑는 데 소모한 것이다.
물길이 막힌 강처럼 점점 거대해져만 가는 강물이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기에 모두 숨죽여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드 몬스터 두 개를 제물로 검은 매지션을 소환. 소환된 검은 매지션으로 수비로 세트 된 몬스터를 공격.”
드디어 나왔다.
검은 매지션.
만화에서 주인공이 주로 쓰는 필살기라 할 수 있다.
붉은 눈의 백룡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분명 두 번째로 강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고 다른 보조하는 카드들과 연계하면 아득한 공격력을 보장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화에 국한된 이야기. 검은 매지션은 주인공의 보정이 없으면 그저 2인자 카드일 뿐이다.
방어로 세트 된 몬스터가 묘지로 간 것은 아쉽지만 들어온 대미지는 고작 300이었다.
“이거 잘하면 저 아저씨가 이기겠는데?”
“저대로 검은 매지션이 계속 나오는 하수인을 죽이면 백룡이 나올 타이밍이 없으니까. 혹시 손에 안 들고 있을 수도 있어.”
누가 봐도 압도적으로 뛰어난 카드가 들어 있는 덱과 어중간한 저격덱이었다. 섣불리 승패를 장담할 순 없어도 박 상무님이 불리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의외의 분위기로 흘러가자 침묵을 깨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 * *
‘승산이 있다!’
조동욱 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문방구에게 붉은 눈의 백룡이 3장이나 있다는 소식은 이미 아들을 통해서 들었다.
하지만 붉은 눈의 백룡은 필드에 몬스터 2장이 먼저 나와 있어야 비로소 소환이 가능했다.
이렇게 계속 소환된 몬스터를 정리하면서 검은 메지션에 대미지를 더한다면 설사 붉은 눈의 백룡이 소환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대미지가 근소하게 앞선다.
“이건기라! 문방구가 아무리 똑똑해도 결국 관록은 못 이긴데이.”
자기 전까지 침대에 카드를 나열해 놓고 한참을 빼고 더하길 반복했던 나날이었다.
그저 좋은 카드 몇 장이 있다고 해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인기 있는 게임이 되지도 못했다. 비록 윗집 할마시를 잡기 위한 덱이었으나 만나기 전에 다른 선수들에게 허무하게 질 순 없으니 나름의 범용적인 카드도 섞어 두었다.
그리고 지금 그 카드들은 착실하게 드로우되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바닥에 카드만 보이 찝찝하구마. 문방구 절마가 지금 무슨 얼굴로 있겠노?”
답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겨온 카메라는 한 대. 바닥에 깔린 패와 자신의 손에 든 패만 보더라도 빠듯한 각도였다. 카메라를 올려 상대방의 얼굴까지 확인할 각도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손패를 다 털어내도 강화된 검은 매지션을 이길 몬스터가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나 상대방은 천하의 박 상무도 어찌 못할 문방구다.
(마법 카드 절망의 블랙홀을 발동! 필드의 몬스터를 전부 파괴하겠습니다.)
“뭐, 뭐라꼬! 그라믄 니도 백룡이 못 나올 낀데!”
어떻게든 바닥에 몬스터 두 마리를 꺼내놓고 그 몬스터를 제물 삼아 붉은 눈의 백룡을 소환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민호가 바닥에 깔린 모든 몬스터를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훨씬 유리했다.
윗집 할머니의 함정카드를 파훼하기 위해 직접 공격을 하는 마법 카드의 비중을 높인 까닭이다.
“그래. 일단 내가 유리한 기라. 대미지가 낮아도 뽑은 몬스터는 바닥에 최대한 깔아뿌라.”
이미 민호의 체력은 충분히 깎은 상태였다. 남은 건 직접 공격이 가능한 카드가 빨리 나오길 기다리는 턴 싸움이다.
‘문방구한테 놀러가면 볼만하겠고마.’
이미 이긴 싸움.
윗집 할머니에게 어렵게 따낸 승리는 비록 당사자에게 말하지 못할 안타까운 비밀이었으나 민호는 달랐다.
발주된 물건을 가져다주며 이번 결승에 대한 이야기로 짐짓 어른스러운(?) 조언을 해줄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간 조동욱 회장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고 이미 승자의 자세가 되었다.
그러나 듀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죽은 자의 되살림 카드를 발동. 묘지에서 몬스터 한 장을 소환합니다.”
“말도 안 돼!”
“죽은 자의 되살림을 안 쓰고 그냥 맞고만 있었다고?”
죽은 자의 되살림.
죽은 몬스터 한 장을 특수 소환으로 되살리는 카드다.
묘지로 간 몬스터 하나를 아무런 제약 없이 되살리는 사기적인 능력으로 덱에 단 한 장을 넣을 수 있도록 제안했기에 이 카드가 내 손에 들릴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러나 나는 이 카드를 처음부터 들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것일 뿐.
“그리고 필드의 두 몬스터를 제물로 붉은 눈의 백룡을 소환합니다.”
콰아아아!
그늘막을 뚫고 들어온 햇살에 내 붉은 눈의 백룡을 비추자 마치 모두에게 포효하듯이 반짝였다.
확률의 싸움.
만약 내가 억지로 검은 메지션이 있는 상태에서 붉은 눈의 백룡을 소환했다면 분명 내가 유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확률이다. 만약 운 좋게 회장님께서 검은 메지션을 강화할 카드가 두 장 이상 손에 들고 있으시다면 그렇게 소환한 내 붉은 눈의 백룡은 허무하게 묘지로 가버리게 된다.
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감내하고 마지막 기회를 잡아낸 덕에 결승전다운 역전극을 만들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때를 기다린 자의 승리. 압도적인 덱 차이가 조금 양심에 걸렸지만 듀얼은 늘 그래 왔다. 낭만덱이 티어덱을 이기는 이야기는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나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듀얼이 아니라도 승리를 남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
이곳의 골목 대장은 패배를 모르는 존재여야 하니까.
“자, 이제 시상식이 있것습니다! 3위까정 요 앞으로 나오시고 시상식이 끝나믄 저짝에 조촐하게 먹을거리가 마련되어 있으니께 다들 그냥 가지 마시고 한 그릇씩 드시고 가시믄 되것습니다.”
* * *
시상식이 끝난 뒤, 우주는 1차전에서 탈락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매니저가 기다리는 차로 향했다.
“벌써 가는 겨?”
“네?”
터덜터덜 걷는 걸음에 힘이 없어서였을까? 수육을 한 상 가득 들고 가던 할머니가 우주를 붙잡고 물었다.
“밥은 먹었고?”
“아직…….”
‘먹었다고 해야 했는데.’
본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무심결에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토설해버린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은 할머니의 귀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우주의 예상 범위를 한참 벗어났다.
“뭣이라고라? 여태까정 밥도 안 먹고 시방 있었다고라?”
“이이? 누가 안 먹은 겨?”
“아, 이 멀때같이 키만 커가꼬 빼싹 마른 청년이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디야!”
“큰일 날 뻔했고마! 싸게 일로 오드라고!”
도대체 밥 한 끼 안 먹는 게 무엇이 그리 큰일이던가? 어느새 몰려든 할머니들은 무어라 사양을 하기도 전에 마치 다 죽어가는 병에 걸린 사람을 본 것처럼 우주를 잡아끌었다.
“아, 저, 일행이 있어서요…….”
“그람 전화해서 오라고 혀!”
그런 시절을 살았던 분들이다.
밥은 먹었냐가 진짜 걱정을 담은 인사가 되었던 시대. 행여나 먹지 않았다 하면 없는 살림을 털어 콩과 보리를 섞어 불린 밥에 간장 종지라도 내놓는 것이 당연했다.
추위와 배고픔의 무서움을 겪어본 사람들이기에 젊은 청년의 허기를 외면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어, 끝났어? 차로 와. 집에 가자.)
“아니, 형. 형이 좀 나와봐야 할 것 같은데…….”
(왜? 무슨 문제 있어?)
연예인이기에 늘 난처한 상황에 자주 놓인다. 이제 막 인기를 얻어 매스컴에 비치고 있었으니 대중들의 관심이 당연했다. 매니저는 우주가 또 어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거절도 하지 못하고 끝없는 싸인 릴레이를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눕혀놨던 운전석의 의자를 올리기도 전에 그 짐작이 틀렸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똑똑.
창문을 두들긴 우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 누구야?”
“또 밥 안 먹은 똥깡아지가 이 청년인겨?”
“네?”
우주를 둘러싼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묻고 싶었으나 이미 성미가 급한 할머니 한 분이 얼른 문을 열고 내려오라 운전석 손잡이를 잡고 당길 기세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도 모르겠어요.’
우주와 매니저 사이에 서로 눈빛으로 이야기가 오갔으나 상황을 타개할 마땅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 싸게 내리더라고. 한 상 차려놨응께.”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마을회관 앞에 깔린 돗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니 어르신들의 성의가 있었고 그렇다고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것 역시 불편했다.
“어쩌죠?”
“어떡하긴. 일단 차려주신다니까 얼른 먹고 가자.”
어차피 집으로 가기 전에 국밥집이라도 들러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울 요량이었다. 그늘막이 무더위를 다 막아주지 못하고 식탁도 없이 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하지만 얼른 먹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 어르신, 정말 배부릅니다.”
“이? 아침도 안 먹고 꼴랑 그거 묵어가 무슨 배가 부르다고! 둘이 먹으면 그거 금방 다 먹겠구만! 여 가져온 떡만 먹어봐야.”
두 사람이 오늘 아침부터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집중마크를 당하게 되었고 바닥에 차려진 음식은 좀처럼 줄어들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의 역경은 좀처럼 스스로 극복하길 기다려주는 법이 없었다.
“막걸리 왔습니다.”
민호가 우승 상금으로 막걸리와 행여나 안주가 부족할까 싶어 잔뜩 사 온 마른 안주가 또다시 차에서 내려졌다.
“이? 막걸리도 딱 맞게 왔구먼! 이장! 여 아침부텀 쫄쫄 굶은 똥강아지들부터 챙겨주드라고!”
“그려? 술도 왔는데 배가 덜 차면 안 되제! 자, 여 막걸리 받드라고.”
이장이라 불린 할아버지가 양손에 든 막걸리도 모자라 옆구리까지 한 병씩 끼고 다가와 자리에 앉아버렸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 일어날 타이밍까지 놓치게 된 것이다.
‘안 돼! 여기서 드신다고?’
“나가 이 마을 이장인디 아는가 모르것네. 아까 인사할 때 보았는가?”
“아, 저는 운전을 해야해서요.”
“이? 그람 이쪽만 받아야겠구먼.”
그릇도 모자라 어디서 잔치국수나 담을 대접을 가져온 이장님이 잔을 내밀자 방어 본능이 발동한 매니저는 웃으며 우주에게 잔을 넘겼다. 행여나 대리운전을 부르라는 억지를 듣지 않고 자연스럽게 술 상대를 만드는 처세술이 빛을 발했다.
콸콸.
막걸리 한 병이 두 사발에 깔끔하게 비워졌다.
“자, 쭉 들이키드라고. 우리 마을이 말여. 여 냇가 물맛 좋기로 유명해서 막걸리를 담으믄 저짝 아랫마을 옆 마을에 주당들이 허구언날 탁주 얻으러 오는 통에 나가 아주 골치였잖여. 이래 사 먹는 것도 좋지만서도 항아리에 누룩 깔고…….”
우주는 자신이 술에 취한 것인지 이장님의 말에 취한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빈 막걸리병이 4병째가 될 무렵, 우주는 처음 경험한 듀얼과 달짝지근한 막걸리에 취해 눈이 풀려버렸다.
‘오늘은 정말 즐거운 날이구나! 뭐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야.’
술은 사람을 용감하고 과감하게 만들어 버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