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28화 (128/151)

#128. 충만한 용기(2)

취하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술이 바로 막걸리다.

텁텁한 싸구려 술에 무슨 신묘한 힘이 담긴 건지 울컥 쏟아낼 알코올 향도 나지 않는 데다 사발에 양껏 부어 마시는 것이 미덕이라 주량을 넘어서기 일쑤다.

그리고 막걸리에 취하면 다음은 흥에 취할 차례였다.

“가수라며! 가수가 이 좋은 자리에 노래 한 곡 하는 게 인지상정이여! 겨, 안 겨?”

“아, 노래는 조금…….”

“이? 안 되는 겨?”

“꺼윽. 그럼 이번엔 제가 한 곡 하게슴다.”

매니저가 다급히 말렸으나 이미 우주는 그런 만류를 들을 기세가 아니었다. 꼬부라진 혀.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몸놀림. 누가 보더라도 제대로 취한 사람이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건만 우주는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수가 마이크가 없으면 쓰나! 자! 여 마이크!”

딸그락.

빈 막걸리병에 들어간 숟가락. 술자리가 막장에 치달았다는 보증수표였다.

‘망했다. 말렸어야 했는데.’

매니저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가수의 추태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자신이 사양한 막걸리 한 사발이었다.

투박한 대접에 가득 부어진 막걸리는 같이 앉은 이장님의 페이스대로 급하게 비워졌다. 그리고 잠깐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거나하게 취해버린 우주가 어느새 이장님의 둘도 없는 술친구가 되어 버렸다.

“우주가 노래 부른다!”

“와아아!”

가수이기 이전에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건전한 취미라 아무리 설명해 봤자 저들의 눈에는 어린 애들이나 할 법한 카드놀이를 하는 철없는 어른일 뿐이다.

취미가 무어냐 묻는다면 그저 집에서 영화나 본다는 말로 둘러대고 만다. 마땅히 그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을 해야만 사회생활에 굴곡이 없어짐을 모두가 모르지 않았기에 그랬다.

그래서 이 자리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어설픈 진행과 소박한 상품이면 어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우희왕 이야기를 나누며 술 한잔 나눌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우주는 이들에게 신기한 가수가 아닌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였다.

반주도 없이 우스꽝스러운 숟가락 마이크를 들고 음정, 박자도 제멋대로인 트로트를 부르는 우주를 놀리거나 비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박수를 치며 우주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뭐 상관없나?’

흑역사가 될 것이 뻔한 이 장면을 촬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놓인 매니저는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우주의 모습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신기한 마을이다.

이 촌구석에 애들 장난 같은 대회를 여는 것도, 해외 진출을 노리는 인기 가수가 굳이 오겠다 고집 부리는 것도, 그리고 그 가수가 이미지 관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술에 취해 트로트를 부르는 것도 모두 이 마을이 부리는 마술 같았다.

늦여름의 무더운 햇빛도 더 이상 찝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만다꼬 벌써 오노? 거서 술도 한잔 하고 좀 쉬다 오지.”

할머니들의 권유를 받은 사람은 우주 혼자만이 아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곧장 차에 오르려는 박 상무도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차에 오르지 않았다면 우주와 같이 끌려가 자리에 앉을 뻔했다.

“회장님이 적적하시지 않습니까?”

박 상무는 편의점에서 사 온 막걸리를 들고 흔들었다.

“끌끌. 노인네 말동무 걱정이가?”

조동욱 회장도 카메라로 마을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보았다. 그런 잔치에 가본 적이 언제였던가? 회사 일이 바빠 사람과 어울리지 못했고 회사가 커진 뒤에는 클래식이 흐르는 고급스러운 자리에 억지로 얼굴을 내비쳐야 했다.

저렇게 푸근한 자리에서 탁주 한 사발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조동욱 회장을 가까이서 지키던 박 상무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렇게 막걸리를 사서 서둘러 온 것이다.

“아쉽지만 그릇은 따로 구하지 못했습니다. 종이컵에 드셔야 할 듯합니다.”

“낸주 설거지하기 귀찮구로 그릇은 무신. 그냥 묵자.”

테이블에는 막걸리 두 병과 전자레인지에 데운 두부, 그리고 볶음 김치가 차려졌다. 그릇에 담기지도 않은 성의 없는 술상. 삼정그룹의 총수가 먹는다고 한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 구성이었다.

“자, 먼저 받그라.”

“감사합니다.”

걸쭉한 막걸리가 마을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까지 더해 종이컵에 따라졌다.

“아쉽진 않으십니까?”

“뭐 진기는 진기고. 그래도 그 할마시는 이깄으니 됐다.”

욕심은 당연히 났으나 본래 우승까지 노린 것은 아니었다. 결국 우승까지 하기엔 부족한 덱이었고 전략의 차이도 압도적이었다.

“니가 고생했다. 그래도 이리 입히노이 한 10년은 젋어비네. 끌끌. 고마 평소에도 이래 댕기뿌라.”

“아닙니다. 오늘 미용실에 안 들르면 두고두고 가족들에게 놀림감이 될 겁니다.”

늘 검은 정장에 단정하게 넘긴 머리만 보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모습을 처음 본 조동욱 회장은 자글자글한 눈주름을 만들며 박 상무를 놀렸다.

그렇게 술잔이 한 번 부딪혔다.

“그래도 문방구 덕분에 재미도 보고 이래 술도 한잔하는구마.”

“정 적적하시면 정진수 회장님이라도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어데. 글마 하도 점잔 떨어가 술맛도 떨어진다 카이.”

정진수 회장은 속내를 터놓고 지낼 마음이 편한 사람이지 술자리가 재미있는 친구라 보긴 어려웠다.

아니, 애초에 삼정그룹 총수에게 그런 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기 아인나. 나이가 들고 보이 저 길바닥에서 장기 바둑 두고 안주도 없이 소주 한 잔슥 하는 할배들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는기라. 이것도 다 욕심일 낀데. 돈을 이래 쌓아노코 저 천 원짜리 내기 바둑이나 하는 할배들 재미까지 다 달라카믄 내가 날강도 아이겠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은 돈이 많다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술, 좋은 안주,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정재계 유명한 사람들의 입에 발린 칭찬을 들으며 술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난 술자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대화가 술맛을 떨어뜨렸고 귀한 음식에도 도무지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제?”

“네?”

“절마들 말이다.”

조동욱 회장은 자신의 책상에 올려진 액자를 가리켰다. 일전에 민호에게 선물로 받은 액자였다. 싸구려 액자 속에는 두 아들과 민호가 껴안고 소리를 치는 역동적인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도 내 나이대가 낄낄대면서 술 마실 동무 하나는 저래 있으니 말이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친구입니다.”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는 기지. 절마가 욕심이 쪼매만 있었어도 좋았을 낀데.”

“욕심이 없어서 지금처럼 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끌끌. 니 말이 맞다. 돈 욕심이 났으모 내캉 어데 독대나 할 기회도 없었을 기라.”

잔이 다시 채워졌다. 아쉬움이 담겼던 잔이 비워진 자리에 이번에는 안도감이 담겼다. 적어도 두 아들은 자신처럼 쓸쓸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그렇게 두 사람의 조촐한 잔치도 제법 운치 있는 자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

“슬슬 삼정에서도 작업 들어가나 본데?”

늦은 저녁, 지금 갈 테니 퇴근하지 말고 사무실에 있으라는 건방진 문자만 남기고 찾아온 정현석 이사는 인사 대신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태블릿 화면을 정인성 부회장에게 내밀었다.

「당산마을에서 열린 우희왕 대회?

남양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카드게임 대회가 열렸다. 이 마을 주민들이 최근 마을회관에서 우희왕 카드게임을 하던 사진이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진 것이 계기가 되어…….」

“이게 뭔데?”

“재개발 지역에서 흔히 하는 일이지. 지역행사 구실로 떡값이나 좀 쥐여주고 갈라치기 하는 거야. 자기들끼리 판다, 안 판다 하다가 제풀에 지쳐 넘어가는 걸 노리고. 장남이 건설 쪽에 오래 있었다고 하더니 그래도 제법 머리는 굴러가네. 옛날처럼 용역 부르고 그러면 시끄럽거든.”

“우린 얼마나 샀지?”

“이제 7채. 아마 한 달 안에 대부분 우리 손에 들어올 거야. 가격은 세 배 이상 불렀으니까. 이제 어떡할 거야?”

“묵혀두긴 불안하다 그거지?”

“서로 피차일반이잖아. 난 꽤 불리한 조건이라고.”

동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깟 다 쓰러져가는 집을 사는 데 들어간 푼돈이야 그냥 넘긴다 하더라도 그렇게 산 집들을 잠가두고 아버지께 반기를 드는 사람은 결국 동생이었다.

가뜩이나 자식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받아내는 대가는 너무나 불투명했다.

“잊었어? 나 아니면 넌 여기 돌아가는 상황도 몰랐을 텐데?”

“확답이 필요하다는 거야. 아버지가 그 호텔을 가져간다는 확답이. 정황만으로는 부족해. 형이 꼬리 자르고 도망가면 나만 엿 되는 거 아니야.”

겁박이었다.

자기 몫을 먼저 주지 않으면 빼먹은 정보만 취하고 없던 일로 만들겠다는 겁박.

‘그래, 네가 그러면 그렇지.’

서로 예상했던 일이다.

“뭘 원하는데?”

“유동자금을 막는 데 내 회사를 좀 써줬으면 해. 괜찮지?”

“얼마나 빨아먹으려고?”

“우리 정인성 부회장님만 할까? 어차피 대현건설에서 공사가 들어가면 공사 대금 잠그고 대신 받아낼 호텔지분은 나한테 줄 생각도 없었잖아.”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이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형제애 따위가 아니라 뒤틀리고 꼬인 성격에 철이 들고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칼을 겨눈 탓이었다.

“회사 리스트 보내. 아버지 눈이 있으니까 알아서 낌새 보이면 뭉갤 것까지 같이. 돈은 진짜 삽질 시작하면 넘긴다.”

건설은 돈이 된다.

설계부터 시공, 자재까지. 줄줄이 엮인 하청업체들의 견적서를 부풀리고 버는 돈도 알짜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호텔의 지분이다.

정인성 부회장은 이 지분을 동생과 나눌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빈 쭉정이를 내던질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동생의 속을 꿰뚫고 있듯 동생도 자신의 속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납득할 만한 금액으로. 알지?”

의도적으로 자금 유동성을 떨어뜨리는 작업은 두 가지가 있었다. 재무건전성을 핑계로 부채를 갚거나 혹은 사업 확장을 위한 투자.

동생이 원하는 것은 명백히 후자였다.

“아, 그리고 말이야.”

“또 뭐?”

자꾸만 요구 조건이 붙는 동생에게 짜증 섞인 질문이 돌아갔다.

“확답이 필요하다는 말은 진짜야. 협박하든 돈을 주고 구워삶든 이 내용을 아는 사람 입에서 답을 들어야 해. 다 우리 부회장님을 위해서야. 나야 뭐 좀 깨져도 꿍쳐둔 돈이 있다지만 우리 부회장님께서는 경영권 가져올 지분 챙기느라 개털 신세잖아. 괜히 공사는 삼정에서 하고 아버지가 차명으로 꿀꺽하기라도 하면 진짜 우리 손도 못 쓰고 다 망하는 거니까.”

“삼정건설은 사우디 사업하느라 지금 원룸 건물 하나 지을 여유도 없을 텐데 걱정은 무슨.”

“큰돈 드는 것도 아닌데 좀 두들겨 보고 가자는 거지.”

“그래서 아는 사람 누굴 잡으라는 거야?”

“지금 보고 있네.”

정현석 이사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턱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가리켰다.

방금 보여준 뉴스에 떠 있는 한 장의 사진. 그 속에는 연예인을 해도 믿을 법한 잘생긴 인상의 청년이 1등 상품이라 적힌 쌀가마니를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