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31화 (131/151)

#131. 연극(1)

퇴근길.

평소 같으면 걸그룹 노래나 들으며 10분 남짓 운전하면 도착할 익숙한 길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 철진아. 그 호텔부지 말이야. 슬슬 다시 매입해야겠는데?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다 넘어왔고 빈집 주인들만 만나면 돼. 그래. 알았다. 수고해.”

“네, 회장님. MM 프로팀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네, 네. 그 호텔 건은 삼정그룹에 부지 매입을 서둘러 달라 전했습니다. 혹시 공사 착수는 언제쯤 하실 예정이 십니까? 저도 슬슬 빠져야 하니까요. 2달 뒤 말씀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전화는 가짜다. 통화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그저 아저씨가 양말을 찾으면서 하는 혼잣말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다.

싸구려 연극. 딴에는 리얼리티를 살린다고 했지만, 팔자에도 없는 독백 연기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뻣뻣해지는 목과 어색한 발음에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술집에서 나와 차에 올랐을 때 대시보드 위에서 발견한 작은 쪽지 하나가 원인이었다.

「위치 추적기, 도청 장치 있음.」

모든 일에는 우연과 필연, 그리고 인과관계가 있다.

팀장급 직원이 주차 요원을 자처해서 나를 막아선 것은 정인성 부회장의 안배였다. 그리고 내가 하겠다는 주차를 굳이 만류하고 자신이 내 오래된 경차에 올라 주차를 해준 것 또한 원래의 목적이 있어서였다.

바로 차 내부에 위치 추적기와 도청 장치를 설치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은 핏줄이 그러해서일까?

나를 그 술집에 불러낸 뒤에 차에 이런 수작질을 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들켰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게 숨겨두었던 장치들은 정작 설치한 당사자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우연과 필연 덕분이다.

복잡한 눈을 한 선한 인상의 술집 종업원에게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건넨 빅카스가 쪽지로 바뀌어 돌아온 것이다.

빅카스를 건넨 내 행동은 우연일지 모르나 그로 인해 내가 위치 추적기와 도청 장치를 알아차린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

인과율은 돌고 도는 것이니.

끼익.

“이? 오늘은 왜 거기에 차를 대는 겨?”

“안녕하세요, 이장님.”

어쭙잖은 연극을 하며 도착해 주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장님이 다가와 인사를 겸한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안배한 행동이었다. 이장님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정이시니 말이다.

“이이. 아, 문방구 사방에 빈 공터인디 왜 하필 여기에 차를 대는 겨?”

나는 일부러 문을 살짝 열어두고 차에서 내렸다.

“아, 이장님, 혹시 땅을 좀 살 수 있을까요?”

“땅?”

“네.”

“아, 땅이야 팔려는 사람은 많고 살려는 사람은 없으니께 당연히 되지. 그래, 어딜 살라고? 뭐 고구마나 심을라치믄 저짝 박씨네 아들이 놔둔 땅이 기름지고 참말로 좋지.”

그렇게 이장님께 땅에서 시작된 농작물의 재배역사까지 한참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문방구가 아닌 그 옆에 주차된 또 다른 차다.

“미안합니다. 일도 바쁠 텐데.”

“아닙니다. 이제 테스트도 끝나서 애니메이션이 나오기 전까지는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지시하신 대로 차는 바꿔 타고 왔습니다.”

“제가 지금 귀찮은 감시가 붙었습니다. 행여나 차재훈 부장님께도 해가 될까 싶어 부득이하게 이런 일을 부탁해서 죄송합니다.”

“감시가요?”

“그래서 차재훈 부장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실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차재훈 부장에게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털어놓았다.

자식이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고 아버지의 뒤통수를 노리는 패륜을 저지른다며 광고할 필요는 없다. 나도, 정진수 회장님도 그걸 원치는 않으실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다. 최소한의 조력자가 필요했다. 대현그룹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차재훈 부장은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정인성 부회장이 그렇게 일을 치밀하게 벌일 인물은 아닌데 말이지요.”

“우리처럼 그자에게도 다른 조력자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대현그룹에 회계 지원을 계속 요청해 주세요. 자잘한 것도 확실히 해야 한다면서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요.”

“앓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척하면 척이다.

자금을 움직이는 부서는 크게 두 군데로 나뉜다. 재무부서와 회계부서.

재무부서는 자금의 조달이나 운용에 전반적인 관리를, 그리고 회계부서는 월, 분기, 년도 별 결산과 세금 등 가시적인 수치를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자연스럽지 않은 돈이 움직인다면 두 군데 중 어느 부서가 더 골치가 아파질까?

당연히 회계다.

지저분하게 처리되는 애매한 결제와 막무가내식 운영을 아무런 하자가 없는 상태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회계부서의 눈물 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 와중에 딴살림을 차려 나간 우리 MM 프로팀에서 별 시덥지 않은 일로 지원을 요청한다면?

분명 비명을 지르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이 생길 것이다. 그때가 정인성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나서서 발을 빼지 못하는 순간이다.

“참, 저 이러고 나면 미운털 박혀서 다시 못 돌아가는 건 알고 계십니까? 정인성 부회장의 라인은 의외로 탄탄해서 말이죠.”

“돌아가실 생각이셨습니까? 이 많은 식솔을 놔두고요?”

“직장인이 어디 힘이 있습니까? 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지요.”

“평사원부터 알짜 부서까지 고속 승진으로 올라가는 데에는 업무 능력만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역시 구단주님은 못 따라가겠습니다. 하하.”

조금 나쁜 말로 들릴지는 모르나 차재훈 부장은 업무 능력만큼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뛰어났다.

빽도 없이 젊은 나이에 실세 팀의 부장까지 올라가려면 그저 알랑방귀만 뀌어서는 안 된다. 마음에 들어서 챙겨주는 것들은 한계가 명확하니까 말이다.

치부를 들춰 약점을 잡아 겁박하고 흔들어야 한다. 때로는 대담하고 때로는 은밀하게. 그래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지금은 비록 이 한직 중에 한직으로 좌천되었지만.

이런 일을 저지르려면 한 가지가 보장되어야 했다. 바로 자신은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의 깨끗함이다.

서로 치부가 있다면 애초에 일방적인 거래가 불가능할 테니까. 그게 내가 처음부터 차재훈 부장을 믿었던 이유였다.

* * *

(저도 슬슬 빠져야 하니까요. 2달 뒤 말씀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스피커 모드로 해놓은 폰에서 나오는 통화는 다름 아닌 민호의 목소리였다.

“슬슬 똥줄이 타나 보군.”

정인성 부회장은 한 손으로 와인 잔을 돌리며 씨익 웃었다.

“2달이면 적당하네. 아버지 움직임은 어때?”

“너도 내부에 소식통은 있을 거 아니야.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차린 걸지도 몰라. 이미 자금을 다 마련하신 거면 어쩌지?”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름 없는 돈 수천억이 나가려면 벌써 아버지 집에 돈다발 맡아둔 인사들이 문지방 닳도록 왔다 갔다 했을 거야.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어.”

“난 약속대로 확답을 받아냈으니 이젠 네 차례야.”

“뭘? 이대로 있다가 하청업체만 밀어 넣으면 되잖아. 난 투자 명목으로 나온 사업들 몇 개 먹는 거고.”

“아니지. 상황이 확실해졌잖아.”

“그래서 계산기 다시 두들기자고? 우리 정인성 부회장님 명패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양아치 같은 소리를 하실까.”

“공정하게 가자는 거야, 공정하게. 자금 유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내는 사업으로 네가 먹는 돈은 내가 직접 떠먹여 주는 거고 나는 하청업체 통해서 공사대금 결제 명목으로 지저분한 소송까지 해가며 호텔지분을 가져와야 하고. 이거 뭔가 불공평하지 않아?”

형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내건 조건이니 말이다.

“나 참.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건 차차 생각해 보자고. 아직 두 달이나 남았으니까.”

띠링.

불쾌한 내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정현석 이사에게 거들먹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찰나, 테이블에 올려진 폰 화면에 문자 한 통이 팝업되었다.

「김민호 구단주: 공사 착수는 3달 뒤.」

“하. 이놈 봐라? 1억이나 받아먹고 첫날부터 날 속여? 아니, 잠깐.”

‘이놈을 이용하면 되겠어.’

* * *

촤륵.

조동욱 회장은 책상에 사진들을 던졌다.

그 속에는 철진이 손에 듀얼디스크를 차고 환하게 웃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니 설명해 봐라. 이기 뭐꼬?”

“뭐긴요. 우희왕 대회 때 찍힌 사진이죠. 아버지도 출전하셨잖아요. 2등까지 하셔 놓고선.”

“내가 지금 그걸 말하고 있드나? 와 이런 사진을 굳이 언론에 뿌린나 이 말이다. 내가 다 막을 걸 알면서! 니 지금 이사회 아들이 뭐하카는지 알고는 있나? 이 답답한 자슥아. 와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노!”

조동욱 회장의 긴 다그침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철진은 흩어진 사진 위로 봉투 하나를 올렸다.

“이건 또 뭐꼬?”

“사푭니다, 아버지.”

“니··· 니······.”

“어차피 지금까지 받은 돈만 해도 평생 놀고먹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일도 하기 싫고 경영이니 뭐니 배우기도 싫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참, 정리는 이번 달 내로 하겠습니다. 상진이랑 민호 형한테는 아직 알리지 마세요.”

“니 이리 몬 오나!”

아버지의 호통은 더 이상 철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힘이 담기지 못했다.

아들이 문을 닫고 나간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조동욱 회장은 혈압이 올랐는지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됐다 고마.”

“말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시 불러 오겠······.”

“나도뿌라.”

박 상무의 다급히 뛰어나가려는 움직임을 조동욱 회장이 막았다.

“하지만!”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저래 놈팽이처럼 놀고 싶다 카는 아 붙잡아가 어디다 쓰겠노?”

“조철진 상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행동을 하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 우야겠노? 지 동생한테 다 줘삐고 나가겠다는 아를.”

후계 구도를 놓고 저울대에 자식을 올린 사람은 자신이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저잣거리에 내다팔 고깃덩어리처럼 무게를 잰단 말인가? 조동욱 회장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저 재벌가에 태어난 업이라 여겼다.

부모가 죽고 나면 좁쌀만 한 땅 하나를 가지고도 형제자매끼리 척을 지는 세상이다.

하물며 돈으로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삼정그룹의 주인 자리를 놓고 자식이 둘이니, 자신이 중재하지 않으면 필시 둘 중 하나는 다시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다칠 것이라 예상했다. 어미를 일찍 여읜 두 형제에게 모질고 냉정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와? 의자는 하난데 둘이 있으모 쌈박질밖에 더 하긋나? 알아서 나간다 카이 마 근심거리 하나 덜었고마.”

말과는 다르게 사표를 손에 쥐고 한참을 바라보던 조동욱 회장의 눈은 서글픔이 담겼다.

“착해빠지가 지 꺼 다 내주는 건 지 죽은 어매랑 똑같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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