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32화 (132/151)

#132. 연극(2)

「정인성 부회장 : 오늘 8시, 전에 왔던 술집.」

예상보다 훨씬 빨리 연락이 왔다. 문자로 별 영양가 없는 보고를 올린 지 어느덧 일주일, 슬슬 도청장치의 배터리가 다 달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할 때쯤 시기적절하게 호출문자가 온 것이다.

나는 시간에 상관없이 꽉 막혀 기어가다시피 하는 서울의 복잡한 도로를 지나 익숙한 술집 앞에 멈춰 섰다.

“주차 도와드리겠습니다.”

주차장 입구에서 일전에 나를 막아섰던 그 팀장이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 그 일 때문에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내 인사는 주차를 대신 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아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 일로 인해 행여나 자신이 난처해질 수 있음을 감수한 것에 대한 감사였다.

안내를 받은 곳은 전과 같았다. 고급스러운 복도 맨 끝 가장 큰 방. 독대하면서 저렇게 큰 룸을 꼭 빌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인성 부회장은 긴 테이블에 다 먹지도 못할 안주를 가득 차려놓은 채 거만한 자세로 나를 반겼다.

“왔군.”

꾸벅.

나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앉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죽 소파를 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가와 곁에 앉은 나를 힐끗 보고는 또 먹지도 않는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 구단주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동안 장난질을 조금 쳤더군.”

“네?”

“두 달 뒤에 있을 공사를 위해 삼정에서 본격적으로 땅 매입을 나서려 하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자네도 한밑천 챙기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던데? 나에겐 3달 뒤라고 태연하게 문자를 보내고 말이야.”

“....”

나는 당황한 척 몸을 굳혔다.

“1억을 준다 했는데 그런 장난질을 치다니. 하, 우리 한배를 탄 사이 아닌가?”

“들킬 줄은 몰랐습니다.”

“뭐? 하하. 사람 참 뻔뻔하기는. 여기서 푼돈으로 땅 몇 평 사봤자 얼마나 벌겠다고. 쯧. 그리고 우리가 그깟 땅 좀 사려고 이러는 줄 알아? 옛날처럼 용역 깡패 동원해서 몽둥이찜질 한 다음 억지로 지장 받아내는 시대가 아니야. 적정 가격 제시하고 아니면 온갖 트집 잡아 소송에 항소, 그렇게 대법원까지. 이거 버틸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할 가치가 없었다. 구단주로 있는 프로팀의 최대주주를 물 먹이는 행동이다. 만약 내가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땅을 산다는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놈이 마치 모든 걸 꿰 뚫어보고 있다는 듯 지껄인다.

딴에는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주려 내 명의로 대놓고 땅을 샀는데 그것도 확인하지 않은 눈치다. 이 정도로 단순할 줄이야.

“사람 참. 장난감 회사를 해서 그런가? 그릇이 왜 이렇게 작아? 큰물에서 놀 생각을 못 하고.”

“큰물이요?”

“건설법인 사업체 하나 파 놓고 계좌번호 보내. 삽질 시작하면 적어도 수십억은 벌게 해줄 테니.”

“대비해서 개인적으로 만들어 놓은 회사가 이미 있습니다.”

“이야. 그릇은 작으면서 준비는 제대로 했네? 좋아. 그쪽 계좌로 약속한 2억 보내주지. 자넨 날 속였지만 난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밀어주는 성격이거든.”

정인성 부회장은 메모장이 열린 폰을 안주가 너저분하게 깔린 테이블 사이로 쓱 밀었다.

“뭐해? 계좌 적어.”

“지금 말씀입니까?”

“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그깟 푼돈 지금 바로 쏴주지.”

“감사합니다!”

“아진건설? 이름 한번 그럴싸하군. 제대로 뽑아먹을 작정이었나 봐? 지금 입금하라고 했으니까 아마 곧 들어올 거야. 자, 들자고. 참, 술은 못 마신다고 했나? 이렇게 좋은 날인데 한잔하지.”

“네, 알겠습니다. 주시는 잔만 받겠습니다.”

평생 양주와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억지로 삼킨 위스키는 깊은 맛 대신 코를 찡그릴 휘발유 향만 남겼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술이 다섯 잔이 넘어갈 무렵.

우웅.

「[Web발신] 2023/08/28 20:41 입금 200,000,000원 입금자명 : 솔미디어테크」

“2억 확인했습니다.”

“그럼 한잔 더 받지.”

돈이 아니다. 독이다.

발각되면 꼬리를 잘라 내던져 줄 사람으로 나를 택한 것이다. 정진수 회장님과 삼정그룹 사이에 내부정보를 이용해서 일을 꾸미다 발각되어 목이 내걸릴 희생양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

내 입에서 아무리 자신의 이름이 나와봤자 이미 정황상 의심되는 자금들은 모두 지금 입금된 계좌에서 오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어색하다.

땅을 팔아 버는 푼돈엔 관심도 없다면서 본인도 빈집을 매입하지 않았는가? 거기에 정진수 회장님의 말씀대로 하청을 돌려 공사비를 빼먹는다 한들 실제 공사가 진행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거칠 손이 많고 나눠 먹을 입이 많은 작업일진데 마치 수백억이라도 벌 것처럼 꺼드럭댈 이유가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저 아둔한 머리에서 전부 나오진 않았으리라.

“혹시 다른 분도 이 일을 같이 도모하십니까?”

“그건 왜 묻지?”

“제가 혹시 또 인사드려야 할 분이 있나 해서 그렇습니다.”

“준비해놨다가 시키는 거나 잘해.”

“네.”

있다. 뒤에 누군가가. 거짓말을 지어낼 가치조차 없는, 한번 쓰고 버릴 패에 얼버무릴 변명도 떠오르지 않은 모양이다.

* * *

대현그룹의 본사 회계부서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사방에 사람 키만큼 쌓여있는 문서들과 밥 먹을 시간도 없었는지 여기저기 쌓여있는 컵라면이 찌든 국물 냄새를 풍겼다.

차재훈 부장은 그 서류 더미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어느 책상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또 무슨 일인가요?”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 넘기고 얼굴에 개기름이 반들반들한 여직원이 짜증 섞인 질문을 던졌다.

“이겁니다. 기타수당 발생 시 첨부할 서류 양식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얼추 적어오긴 했는데....”

차재훈 부장은 제멋대로 적어 온 근무일지와 출장 업무 확인서 따위가 동봉된 두꺼운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서류 양식만 덜렁 주지 말고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예시 삼아 몇 개 기재까지 해달라는 뜻이었다.

“아니. 이런 절차는 파견 간 직원들도 충분히 할 수 있으시잖아요. 그룹웨어에도 다 올라와 있고!”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 이게 다들 실수가 많아서....”

“저희도 이번엔 못 도와드려요. 지금 갑자기 업무가 밀려서 저희도 철야 중이에요. 나중에 마무리되면 봐 드릴게요.”

“휴. 알겠습니다.”

차재훈 부장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구단주님 지금인 듯합니다.”

(바로 시작해 주세요. 참, 그리고 타겟은 정인성 부회장 한 명이 아닙니다. 뒤에 누군가가 더 숨어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차재훈 부장의 손이 또 다시 바쁘게 화면을 두들겼다.

(네, 감사팀 백양준 과장입니다. )

“어, 백 과장. 잘 지내지?”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차재훈 부장님.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

“제보할 게 있는데 이게 좀 굵은 거라 감당될 사람을 찾는데 말이야.”

(얼마나요? )

“얻어걸리면 최소 특진에 금일봉이지.”

(자료 보내주세요. )

“지금 문자로 보냈어. 이건 내가 파악한 거고, 아마 조사하면 더 나올 거야.”

(이야. 우리 차재훈 부장님 좌천되셨다는 말도 다 헛소문이네요. 어떻게 저희보다 더 정보가 빠릅니까? )

“싱거운 소리. 우선 회계부서에서 나가는 자금부터 동결시키고 이번에 추진되는 사업 중에 타당성 검사가 제대로 안 된 것부터 털어봐.”

(윗선에서 뭉개면 어떡합니까? )

“너희들 잘하는 거 있잖아. 툭하면 회장님 지시사항이니 뭐니 떠들고 다니면서.”

(그땐 진짜 회장님 지시사항이었고요. 괜히 이름 팔았다가 저희 팀 나가리되면 사방에 미운털 박혀서 어디 갈 부서도 없습니다. )

“정 불러주는 곳 없으면 여기 오면 돼.”

(악담을 하십쇼. 악담을. )

“그만큼 확실한 건수니까 들이받아. 잘되면 알지? 그리고 하나 잡았다고 그거만 파지마. 여기저기 숨은 쥐새끼가 더 있는 것 같으니까.”

(작업은 언제 시작할까요? )

“지금 당장.”

* * *

복도 한구석에 구색 갖추기로 가져다 놓은 접견용 의자에 먼지를 손수건으로 털어내고 앉은 차재훈 부장은 곧 열 명 남짓한 장정들이 급한 걸음으로 회계팀 사무실에 들이닥치는 모습을 발견했다.

“감사팀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부터 작업하시던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뭡니까? 갑자기!”

“이곳 책임자입니까?”

“아니 우리가 뭘 했다고 이렇게 범죄자 취급입니까!”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페이퍼컴퍼니로 회사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업무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드릴 테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빈자리 컴퓨터도 모두 풀어주세요.”

백양준 과장은 형식적인 사과로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곧장 자신도 비켜준 자리에 앉아 파일들을 USB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인가만 떨어진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감사팀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회계팀 직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어수선한 사무실에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이 새끼들 뭐 하는 짓이야!”

커다란 고함에 순간 정적이 일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인성 부회장이었다.

“감사팀에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덤덤한 백양준 과장의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정인성 부회장은 대뜸 멱살을 움켜쥐었다.

“제보는 무슨 제보? 너 이 새끼 지금 누구 허락받고 이따위 짓을 벌여? 나 누군지 몰라? 부회장이야. 부회장.”

“알고 있습니다. 이것 좀 놓고 말씀하시죠. 보는 눈도 많은데.”

탁.

그제야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의식한 정인성 부회장은 잡았던 손을 밀치듯 풀었다.

“누구 지시야? 내 인가 없이 감사팀 움직인 라인이 누구냐고!”

제아무리 감사팀을 움직일 만큼 끗발 좋은 직급에 있다 해도 부회장보다 높진 못할 것이다.

‘부장님, 확실한 거죠? 믿고 지릅니다? ’

“회장님 지시사항입니다.”

백양준 과장은 잠시 뜸을 들이고 태연하게 없던 말을 지어냈다.

제아무리 감사팀이라지만 회장님께 직통으로 연결된 보고체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대외적으로도 누구의 입김도 들어가선 안 되기에 조직도에서도 멀찌감치 혼자 떨어져 있는 부서다.

부회장의 분노를 사그라뜨릴 만큼 든든한 빽은 오직 정진수 회장뿐이었다.

“내가 지금 확인하러 갈 거야. 거짓말이면 너희들 옷 벗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회장실로 향하는 정인성 부회장을 접견실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차재훈 부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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