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36화 (136/151)

#136. 방방(3)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인정이야말로 시야를 객관적으로 바꿔주고 비로소 나와 상대방의 능력을 제대로 저울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오빠! 이거 진짜 오랜만인데 재미있다!”

“나도 큰맘 먹고 지른 건데 의외로 괜찮네.”

대화는 형식적이었다.

이미 불리한 싸움이다. 나는 3명과 대결하며 적지 않은 기력을 소모했고 설란은 이제 막 들어온 최적의 몸 상태다.

나는 설란이의 말에 짧은 대답을 하며 숨을 골랐다.

“어릴 때 진짜 쓰러질 때까지 탔는데 중학생부터인가, 생각이 안 나더라.”

“그래?”

영악하다.

아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보고 이미 내 지친 몸을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쓰러질 때까지 탔다고?

“천 원, 이천 원이면 종일 탈 수 있잖아.”

“아…….”

설란은 그런 아이였다.

전파상집 공주라 불리는 아이. 과한 용돈은 전파상의 넉넉한 살림 덕분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다르다. 경험의 차이가.

퉁. 퉁.

설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가볍게 내려앉는 몸에 튀어 오르는 높이는 우리보다 훨씬 높았다. 게다가 끼릭끼릭 하는 용수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마치 풀잎 위를 밟으며 뛰어오르는 모습이다.

“초상비(草上飛)……?”

“응?”

“아, 아니야.”

“이거 어떻게 하더라? 맞다! 넘어지면 지는 거지?”

투웅.

설란이 날아들었다. 깊고 날카롭게.

“치잇.”

단번에 품으로 날아든 설란에게 급히 떨어졌지만, 하마터면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다.

왜지? 왜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공격이 가능하지?

체급의 차이는 분명했다. 설란은 나보다 적어도 20㎏은 더 가볍다.

나보다 훨씬 무거운 철진과 싸우면서도 힘으로 대적해 이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란은 정면으로 치고 들어와 철진이보다 훨씬 무거운 공격을 쏟아냈다.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승리하려면 저 술수를 간파해야 한다. 하지만 방금 공격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 공격을 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번의 공격에 치명적인 대미지를 감수해야 하다니. 어쩌면 이번엔 정말 패할지도 모른다.

“우와! 잘하면 민호 형 이기겠는데?”

“시끄럽스므니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심결에 시선을 옮겼다. 방에서 창문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세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패할 수 없다.

녀석들에게 난 패배를 모르는 대장이어야 하니까.

“오빠, 한눈팔면 안 되지!”

투웅.

잠깐 시선을 돌린 찰나를 설란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품속에 파고든 신형이 내 발, 바로 아래를 노렸다.

“크흣!”

여전히 날카롭고 예리하다. 마치 송곳 같은 공격. 잠깐, 송곳?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잡힐 것 같았다.

발끝이다.

발끝을 마치 발레를 하듯 세워 내리꽂는 기술이 가볍지만 위력적인 기술의 비밀이었다.

바닥에 닿는 면적이 줄어들면 당연히 그곳에 몰린 파괴력은 올라간다. 땅은 더 깊게 파이고 그곳에 서 있는 적에게 예상하지 못한 기울기를 남긴다. 단순하면서도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공격이다. 마치 하이힐을 신듯 발끝으로 땅을 디디면 무게 중심은 당연히 불안정해진다. 마치 억지로 책상에 세운 펜처럼.

하지만 설란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수십 년 만에 방방을 탔음에도 곧장 이런 공격이 가능하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왔단 말인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무섭기까지 했다.

여성의 몸이다.

그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다.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그저 무리를 지어 제자리 뛰기나 하다 내려오더라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터. 그러나 설란은 달랐다. 뭇 사내들처럼 방방장에 올랐다간 방방 대결에도 끼워주지 않을 불리한 조건에서 이토록 무서운 무공을 연마하다니. 그 노력에는 비단 풍족한 용돈만이 필요한 게 아님을 알기에 내 움직임은 더욱 신중해졌다.

“그렇게 도망만 가면 어떡해?”

투웅.

한 발짝 물러서면 여지없이 설란의 공격이 쇄도했다.

철진에게 썼던 기술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급히 방향을 바꿔도 설란이 코앞까지 쫓아온다. 맨발로 경기장에 들어선 설란에게는 도망가는 상대를 추격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이얏!”

“큭.”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까이 붙어서 공격을 해야 한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불리함으로 다가왔다.

바로 독이다.

달큰한 향기.

샴푸, 아니면 화장품? 맡아본 적 없는 그 달콤하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과한 움직임을 타고 내 코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필시 독공에 비견될 공격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눈앞에 확 들이치는 설란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도망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설란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다른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어지럽고 심란하다. 흡사 무협지에서 보던 환술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체격에서 오는 불리함을 극복한 것도 모자라 상대방의 정신마저 혼미하게 만드는 설란의 잔악무도한 공격엔 그 누구보다 승리를 갈망하는 무사의 집념이 담겨서이리라.

하지만 설란, 너는 모르고 있다.

그 집념은 결국 시야를 좁히고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집념을 이기는 것은 무념이다.

무아(無我)의 경지.

생을 초월한 그 무아의 경지에 들어선다면 코를 간질이던 향기와 설란의 매혹스러운 얼굴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마음에 들어찬 사념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3명을 꺾은 자만심을 비웠다.

국밥집에서 조금이라도 비싼 메뉴를 시켜 든든하게 배를 채우려던 탐욕도 비웠다.

설란이 방방에 들어오고 난 뒤에 느꼈던 두려움도 비웠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집념도 비웠다.

종국에는 마음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화아아악.

구름에 가려졌던 햇빛이 다시 지붕에 내려앉으며 검은 방방장의 지면을 밝혔다.

그래. 이제야 보인다. 승리로 향하는 활로가.

팟.

내 신형이 높게 뛰어올랐다.

“하!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분명 하책이다. 큰 점프는 당연히 큰 힘을 가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수들에게 통용되는 말이다.

체공 시간이 길면 그만큼 지면에서 준비할 시간도 길어진다. 고수의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상대방의 공격을 역이용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지는 것이다.

설란 역시 고수 중의 고수, 내가 착지할 위치에서 무릎을 낮게 굽히고는 공격에 반격할 준비를 이미 마쳤다.

어떻게 내가 떨어질 자리와 그 힘에 맞는 대비까지 가능한가? 그것은 방방 대결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격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결국, 솟아오른 몸이 떨어지면서 만드는 충격일 뿐. 아둔한 자도 상대방의 점프를 두어 번 본다면 바닥이 꺼지는 깊이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빠르게 들어가는 기술은 모두 그 예측을 기반으로 한다. 수읽기 싸움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의 경지에서 나는 보았다. 그 한계를 넘는 방법을.

지붕에 닿을 듯 높게 뛰어오른 신형이 정점에 잠시 머무는 찰나, 나는 지붕을 지지하던 프레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힘껏 밀었다.

“무, 무슨!”

당황하는 설란의 표정이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계를 넘어선 힘.

중력에 손으로 지붕을 밀친 힘까지 더해지자 내 신형은 마치 내려꽂는 비수처럼 빠르고 예리했다.

쑤욱.

바닥이 지금껏 본 적 없는 깊이로 과하게 파였다.

미묘하게 떨어지는 각도까지 틀었기에 이미 설란의 몸은 균형을 잃고 상체가 흔들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이 정도로 무너질 상대였으면 처음부터 내 적수가 아니었을 테지.

깊게 파고든 발이 다시 튀어 오르려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을 완전히 풀었다. 높게 떠 천장까지 밀어내어 만든 응축된 힘은 그렇게 주인을 잃었다. 그리고 신형이 무너진 설란에게로 향했다.

“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설란이 눕다시피 옆으로 퉁겨져 날아갔다.

투욱.

그리고 마침내 설란의 엉덩이가 땅에 닿았다.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것이다.

“또 졌네?”

“그래도 잘했어. 나도 지는 줄 알았으니까.”

“에잇!”

설란은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손을 잡아 일으켜 주려던 나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나는 설란의 손에 이끌려 곁에 같이 누워 버렸다.

“으아! 이렇게 있으니까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네. 왜 웃어?”

크게 기지개를 켜는 설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그냥, 나도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

“하긴, 할아버지 문방구에 사니까 더 그렇겠네? 손님은 많이 와?”

“가끔? 그래도 처음 열었을 때보다 많이 오네.”

“물건은 다 어디서…….”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아, 아니야!”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돌아누운 설란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가까웠기에 표정이 여실히 눈에 들어왔다. 설란은 어쩐지 아까 대결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그 모습을 문방구 안 VIP석에서 3명의 관중이 지켜보고 있었다.

와작와작.

청년들이 과자를 한 봉지씩 손에 들고 미어캣처럼 좁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꼴이 민망해 떨어질 법도 했지만, 창문에서 얼굴을 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민호 형이네. 이길 수가 없어. 천장을 이용하다니. 돔 구장이 이래서 중요하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이므니까?”

“아니, 그런데 민호 형은 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이기려는 거야?”

“이럴 때 보면 철진 상보다 바가이므니다.”

“뭐 인마? 멋지게 이겼구먼.”

“아니, 이기면 안 된다고…….”

가슴이 답답해진 상진이 철진에게 무어라 쏘아붙이려다 이내 괜한 고생임을 깨닫고 설득을 포기했다.

“너희들도 이리 와서 누워!”

그렇게 한참 누워서 땀을 식히던 민호가 창문에 붙어 있는 세 사람을 불렀다.

“그럴까?”

아무리 늦여름이라지만 여름은 여름이다.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방보다 방방이 더 시원할 리가 없다. 하지만 철진이 보기에 두 사람이 누워 있는 방방은 어쩐지 이곳보다 더 편안하고 시원해 보였다.

“아니, 가지 마!”

“가면 사람이 아니므니다!”

그리고 그런 철진을 막아내려던 상진과 지환의 필사적인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나서는 철진을 말리기 위해 엉겁결에 같이 딸려 나온 두 사람을 민호와 설란이 반겼다.

“나오라는 말 안 들렸어? 왜 이렇게 꾸물대?”

“이쪽에 누워요! 정말 시원해요!”

하는 수 없이 방방장으로 들어온 세 사람도 민호와 설란의 곁에 빙 둘러 누웠다.

포근하게 감싸는 방방장의 바닥과 가볍게 부는 바람에 다섯 사람은 오래도록 이야기가 끊기지 않았다.

누군가는 추억을 이야기했고 또 누군가는 엊그제 있었던 재미있던 일을. 그렇게 문방구에는 오래전 그때처럼 여느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다시 채워졌다.

늦여름의 잠자리가 노을빛에 빨갛게 익어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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