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37화 (137/151)

#137. 학원비(1)

방방은 우리 문방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래 봤자 세 녀석과 이따금 오는 설란이 주된 고객이었지만 말이다.

그중에 단골은 단연 나다. 올 손님이 없으니 늘 전세를 내다시피 누워 있었다. 시원한 얼음물과 노트북, 그리고 든든한 보조배터리에 연결된 휴대용 선풍기까지 늘어놓고서.

물론 에어컨을 튼 방보다야 조금 후덥지근하지만 어린 시절 소원이었던 방방에서 누워 있기를 마음껏 즐기는 기분은 올해 가지 못한 휴가에 비견될 만한 즐거움이다.

“읏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어느 성질 급한 사내들처럼 미처 다 닦지 못한 몸에 아무렇게나 잡히는 옷을 입고는 방방에 올랐다.

주말이라고는 하나 내 일정은 제법 빠듯한 편이었다. 오전 근무만 하는 주제에 주말에 챙겨봐야지 하고 미뤄둔 한물간 드라마며, 영화, 너튜브가 산처럼 쌓여 있다.

그렇게 오늘은 꼭 다 보리라 다짐하고 알찬 주말을 시작할 무렵에 저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굽이진 길을 올라오는 차는 정진수 회장님이었다.

그 사건 뒤로 처음 방문이시다.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겨 방방에서 내려왔다.

오늘 방방의 주인은 내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이거 연락도 없이 와서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문방구에 연락하고 오는 사람도 있나요?”

“허허. 참, 인석들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회장님 손자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남아 있던 늦은 주말 아침의 졸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래. 어서 와.”

“우와! 이거 뭐예요?”

“나 백화점에서 타봤어!”

아이들이 이 커다란 방방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달음에 방방에 달려가 금방이라도 올라갈 기세로 모여든 아이들은 그제야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내려와 나에게 돌아왔다.

“형, 이거 얼마예요?”

“달력에 먼저 적어야지? 한 시간에 500원이야. 다 적었으면 신발 벗고 들어가서 놀면 돼.”

“네!”

정진수 회장님의 손자들도 우리 문방구에서는 예외가 없다.

달력 끝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 남은 돈을 확인하고 거기에 천 원을 더해 오늘 날짜에 다시 적어야 한다.

아직 한글도 익숙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나름 어려운 작업이라 도와줘야 하나 싶었으나 삐뚤빼뚤한 글씨로 곧잘 달력에 이름을 적었다.

“날이 더운데 들어 오시죠.”

“고맙네.”

나는 회장님을 방으로 안내했다. 아무래도 방방은 회장님이 같이 들어가서 손자들과 놀기엔 무리가 있고 그늘도 없는 땡볕에 오래 서 있을 만큼 서늘한 날씨도 아니었다.

우우웅.

오늘은 조금 쉴 수 있었던 에어컨이 일정에 없는 주말 특근을 시작했다.

“방이 좁아서 금방 시원해질 겁니다. 커피 드릴까요?”

“잘 먹겠네. 매번 미안하구먼.”

“커피믹스인걸요, 뭘.”

박하기로 유명한 우리 문방구의 손님 대접에 커피는 고급 원두커피가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걸출한(?)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원두로 내리는 기계라도 사야 하나 싶다가 가격을 보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야말로 남자의 계산법이다.

방방장에 수백만 원을 쓰는 건 아깝지 않아도 매일 마시는 커피의 퀄리티를 한 단계 올려 줄 머신은 엄격한 가성비의 잣대를 들이민다.

아무렴 어떤가?

대충 컵에 믹스를 부어 넣고 얼음만 동동 띄운 이 싸구려 커피는 오늘도 그렇게 여기저기 찍힌 자국이 있는 스텐 쟁반에 올려져 대현그룹의 회장님께 전해졌다.

“진행하는 사업은 순조로운가 보더군.”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다.

공짜로 받은 돈은 아니지만, 대량생산에 필요한 막대한 계약금은 두 회장님의 회사에서 나왔다.

세상천지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남의 돈을 받는 것이다. 아니, 어디 남의 돈뿐이던가? 내 돈을 빌려주고도 엎드려 빌면서 받아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두 회장님은 MM 프로팀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셨고 지금껏 자금이 문제가 되어 프로젝트가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다 자네 능력이지. 어디 못 미더운 사람한테 자기 돈을 맡기는 법이 있던가?”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니까요.”

“그럼 이것도 사양 말고 받게.”

“네?”

회장님은 들고 오신 가방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나에게 내미셨다.

“MM 프로팀의 지분 25%일세. 작업은 다 끝났고 사인만 하면 되도록 해놨네.”

“저는 이 지분을 살 만한 돈이 없습니다.”

“대금은 이미 치렀다 하지 않았나.”

일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값이다. 세 아들의 지분을 다시 거둬들이고 막바지에 들어갔던 승계 작업을 모두 무효로 돌리게 만든 값.

심지어 그렇게 내미신 돈은 가치를 형용하기 어려웠다. 이제 막 미니카 시제품이 나오고 애니메이션 방영이 코앞에 있는 상황이다. 주식 상장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부터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은 지분에 맞게 돌아간다.

단순히 회사의 가치를 따져 지분을 판다 하더라도 지금은 가장 저평가가 된 시점이다. 자, 가져가거라 하고 그냥 쥐여주기엔 너무나 큰돈이다.

“받을 수 없습니다.”

“대현그룹을 살려줬으니 당연한 걸세.”

“그런 뜻으로 주시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미안함이다.

아들들의 과오로 불쾌한 일에 휘말리게 만든 미안함을 아비 된 도리로 사죄하고 계신 것이다.

그냥 준다 해도 거절할 판에 이런 불편한 돈을 냉큼 받을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진 않았다.

“받지 않으면 우리 대현그룹은 MM 프로팀을 지원할 수 없네. 구단주로 앉아 있는 사람이 이리 계산이 어두워서야 원. 그리고 조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네.”

“조건이요?”

조금도 먹히지 않을 투정 섞인 협박에 더해 작은 조건이 붙었다.

“나중에, 자네가 한 50쯤 될 때일까? 내가 죽고 나면 손자들이 앞가림은 잘하는지 한번 내다봐 주게. 부모라는 놈들이 영 못 미더워서 말이야.”

까르륵.

밖에는 방방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창문을 통해 쉼 없이 들려왔다.

“뭐, 일종의 학원비라 해두지. 삼정그룹에서도 학원비 명목으로 이미 받고 있지 않나.”

“그거야…….”

부인하기 힘들었다. 학원비라 하기엔 그렇지만 조동욱 회장님께 받은 도움은 그 금액을 떠나 횟수로도 결코, 적지 않았다.

“섭섭하구먼, 그래. 자식놈 다 쫓아내고 남은 손자들 맡기는 늙은이를 이리 거절하면 벌 받을 걸세. 자.”

서류뭉치가 내 손에 억지로 쥐어졌다.

“자네가 최대 주주가 되어도 우리 대현그룹의 지원은 달라지지 않을 걸세. 물론 2대 주주가 삼정그룹이니 거기 곳간이 조금 더 쓰이겠지만 말이야. 그 수전노 주머니에서 최대한 빼가게. 말이야 바른 말이지 큰돈 나가는 순간에는 자네한테 지분 넘기고 쏙 빠졌지 않나? 지독한 늙은이 같으니.”

갑자기 조동욱 회장님이 떠올랐는지 회장님은 대화하느라 얼음이 녹아 묽어진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켜셨다.

“사인하고 월요일에 사무실로 사람 보낼 테니 넘겨주면 되네.”

“한잔 더 드릴까요?”

“아니네. 손주들 보러 나갈 참이거든.”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닌데 시간이 벌써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나는 빈 컵 두 개를 아무렇게나 싱크대에 던져두고 돌아와 회장님이 주신 서류를 천천히 훑어봤다.

이 서류들에 사인만 하면 내가 MM 프로팀의 최대 주주가 된다. 말 그대로 주인이 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공장 창고에서 시작한 여느 중소기업보다 못한 회사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 회사에 생활이 걸려 있는 식솔만 스물이 넘는다. 그런 회사를 책임지는 사람이 굴지의 대기업이 아닌 문방구 주인으로 바뀌는 것이다.

고민이 깊어지는 하루다.

* * *

달빛이 아직 산 중턱에 걸린 이른 저녁.

은은하게 가야금 연주가 들리는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은 갑자기 들이닥친 두 VIP로 인해 직원들의 분주함이 평소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다.

드르륵.

“아, 왔나?”

“시끌시끌하디마 정리는 얼추 됐는갑제? 이래 밥도 묵자카고.”

“거, 오자마자 밉상스런 인사하곤. 그리고 남의 집 안방 사정은 왜 자꾸 들여다보나?”

한때 삼정그룹 비서실에 온갖 뒷조사를 당했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른 정진수 회장이 반가운 표정을 지우고 눈을 흘겼다.

“어데 내가 볼라캐서 본 기가? 기사만 안 났지 소문이 이래 쫙 퍼짔는데.”

“불효막심한 놈들. 탈탈 털어서 보내버렸지. 마음 같아선 호적에서도 파버리고 싶네.”

대현그룹의 후계자들이 하루아침에 짐도 빼지 못하고 쫓겨난 소문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이었다. 매스컴에 떠 주가에 영향을 주지 않을 선에서 퍼지는 소문은 정진수 회장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세상일이 참 뜻대로 안 되는 기라. 가마있으모 될 일을 꼭 이래 삐딱선을 탄다 카이.”

“그래도 다행이지 뭔가? 하마터면 회사 말아먹을 뻔했으니 말이야.”

“실없는 소리. 든든한 살림꾼들이 다 현역으로 있는데 말아먹을 일이 어디 있다꼬.”

“아버지 때는 없었나? 미꾸라지 하나가 논을 흐리는데 그런 놈이 셋이면 말 다 했지.”

“끌끌. 내도 똑같다. 장남이라 카는 기 사표 던지고 나갔으이.”

“아니, 왜?”

“내가 그노마 속을 알면 이래 안 답답하지! 여 차 말고 얼음물 좀 주소!”

갑자기 장남 생각에 속이 답답해진 조동욱 회장이 얼음물을 찾는 모습에 정진수 회장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자식 농사를 대차게 말아먹었으니 또 놀림을 당할 생각에 만나기 전부터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정작 눈앞에서 씩씩대는 사람은 조동욱 회장이었다.

“그래, 만다꼬 불렀노? 마음이 심란해서 부르진 않았을끼고.”

“아, 별건 아니고. 지분을 조금 처분했는데 자네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뭔 지분? 내가 느그 집안 지분 나누는 걸 와 알고 있어야 대노?”

“MM 지분이거든.”

“뭐? 얼매나?”

“25%.”

“그라모 문방구가 최대 주주가?”

너무 당황해 간단한 셈도 버벅거린 조동욱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오늘 서류는 다 넘겼고 사인만 받으면 되네. 자네가 이제 2대 주주지.”

“끌끌. 늙어가 인자 계산도 안 되드나? 조금 있으모 크게 벌낀데 하필 지금 그걸 넘기나?”

“거래를 했거든.”

“뭔 거래? 글마 그거 회사 돈 빵꾸난 거 매꾼다고 쌈짓돈 다 털어가 글배인데. 지분값으로 뭘 줬단 말이고?”

“우리 손주들을 맡겼지. 아, 삼정그룹의 대들보인데 학원비로 그 정도도 안 주면 면이 어디 서겠나?”

“느그 대들보 있다매! 그 차 뭐시기 부장!”

“뺏겼네. 잠깐 일만 배우고 오라 했더니 도무지 올 생각을 안 해.”

“그렇다고 남의 사람 빼가는 기, 이기 상도덕이 맞나!”

“아, 누가 빼간다 그래. 잠깐 부탁한 거지.”

“그게 그거지!”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좀처럼 멈추지 않는 바람에 다음 요리를 내놓기 위해 기다리던 종업원들은 몇 번이나 다시 음식을 데워와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