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학원비(2)
슥슥.
주말 내내 나를 괴롭히던 정진수 회장님의 서류는 월요일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마침내 사인이 들어갔다.
“결정하셨나 보군요.”
구단주 사무실로 들어온 차재훈 부장이 펜을 든 내 모습을 보고 정답을 맞췄다.
“두 회사의 이름은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까요.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가 가져오는 게 맞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구단주님이시죠.”
“하하. 그렇죠.”
그래. 우리가 아니라 나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이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분을 받기로 한 결정은 백번 생각해도 옳았다.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의 그늘에서 충분히 계약을 따냈고 지원도 적지 않게 받았다.
MM 프로팀에서 두 회사에 착실하게 쌓아온 부채의 상당수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떨어진 것은 조금 속이 쓰리지만, 어찌 되었건 앞으로 발생할 수익 또한 회사의 이름 아래 둘 수 있다.
두 회장님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쾌거다.
“부장님, 잠시 직원분들을 모아주시겠습니까? 저도 이 서류만 마저 확인하고 바로 나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십억짜리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서류다. 행여나 실수가 있어선 안 되기에 사인을 마친 뒤에도 나는 몇 번이나 서류들을 확인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은엔 일본에 가 있는 하시모토 부장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모여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시모토 부장 역시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화상회의 창을 켜 놓고 있었지만 말이다.
“회사의 지분에 조금 변동이 생겼습니다. 제가 대현그룹이 가지고 있던 지분의 25%를 양도받았습니다.”
“그럼 이제 구단주님이 최대 주주네요?”
“뭐 서류상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정진수 회장님께서 관련 지원은 전처럼 계속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다만 두 곳의 눈치를 조금 덜 보고 회사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게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들 때문이었다.
최대 주주가 바뀌었다는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렇게 내가 회사를 넘겨받은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는 듯했다.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예?”
“상사가 바뀐 것도 아니고 급여가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괜히 일하고 있는데 혁신이니 뭐니 하면서 부서가 바뀌고 멀쩡한 의자가 사라지면 될 일도 안 되니까요.”
기대를 박살 낸 건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지금껏 그렇게 굴러갔다. 큰길은 내가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분명 설득을 가장한 압력이 있었다. 미니카 제작은 모두가 반대하는 사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는 온전히 직원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모두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안정이다. 저들은 이미 전 직장에서 살얼음판을 충분히 걸어왔으니.
회사를 책임져야 하는 중압감은 온전히 내가 감내하면 될 일이다.
“이 서류는 나중에 대현에서 사람이 오면 전해주세요. 그럼 저는 퇴근합니다. 다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나는 지분 양도에 관련된 서류를 회의실 책상에 올려두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회의를 빙자한 빠른 퇴근이다.
삐리리리.
막 시동을 걸려는 찰나 걸려온 전화에 서둘러 가방을 던져 놓고 부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네. MM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택배입니다. 물건은 어디에 둘까요?)
“아! 그냥 문 앞에 두시면 됩니다. 혹시 사인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확인 문자만 한 통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런, 벌써 도착하다니. 평소 오후 늦게 오는 택배가 오늘은 유독 빨랐다.
아직 준비물도 사지 못했는데…….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렇게 마트에 들러 재료(?)들을 사서 급하게 도착한 문방구에는 생각보다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다.
이 시골에 택배를 도둑맞을 일은 없지만, 이 커다란 박스를 그대로 훔쳐갈 간 큰 도둑은 도시에도 드물 듯싶었다.
찌익. 찌이익.
박스가 거칠게 뜯겨지고 마침내 그 내용물이 위용을 드러냈다.
“그래. 이거지!”
어린아이 키만 한 높이, 굵직한 투명 유리통 세 개.
바로 슬러시 기계다.
할아버지 문방구에도 이 녀석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맛에 성능도 그리 좋지 않아 운이 없는 아이들은 슬러시와 그냥 김 빠진 음료수의 경계에 선 무언가를 종이컵에 받곤 했다.
이 슬러시 기계는 사실 방방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조합이다. 그래서 방방장을 설치하면서 바로 주문했는데 조금 늦은 타이밍에 도착한 것이다.
방방장은 그냥 운영되지 않는다. 최소한 이 근방의 방방장은 그러했다. 한정된 방방과 정해진 시간은 아무리 회전율이 좋아도 결국 그 수익의 한계가 명확했다.
그래서 방방장 할아버지는 한 가지 묘수를 고안했는데 바로 서비스 슬러시였다.
할아버지는 처음 방방을 타기 전 그 시간을 막론하고 일회용 소주 컵에 슬러시를 한 잔 따라준다. 정말 목이나 축일 요량으로 조금 따라주는 그 슬러시의 맛은 방방을 뛰는 내내 입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땀범벅이 되어 방방에서 내려오면 300원짜리 슬러시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가 그런 기분일까?
특히 방방장에서 집까지 거리가 제법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다.
종이컵에 인심 좋게 수북히 쌓아주시는 슬러시와 무심하게 꽂힌 숟가락 모양의 빨대. 식품위생법이 닿지 않는 그 슬러시 기계의 내부가 어떻게 관리되는지는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컵씩 받아든 슬러시를 아껴 먹으며 돌아오던 길은 의외로 기억에 꽤 높은 빈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야옹!”
“들어가 있어. 또 스티로폼으로 눈발 날릴 생각하지 말고.”
잠시 추억에 잠긴 사이 슬쩍 나와 먹잇감을 탐색하던 누렁이를 다시 방으로 밀어 넣고 작업을 이어갔다. 작업이랄 것도 없이 깨끗하게 씻은 통에 인공 색소가 가득한 소다 원액 물을 섞어 부으면 끝이다.
위이이잉.
전원이 올라가고 롤러가 돌아가며 내는 소음은 생각보다 시끄러웠지만, 다행히 손을 가져다 대니 금방 냉기가 차올랐다.
나는 형형색색의 슬러시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민호: (동영상)
민호: 슬러시 기계 들어왔다. 방방 뛰고 원래 이거 먹어줘야 함.
상진: 형, 우리 형 회사 사표 냈대요.
민호: 뭐?
지환: ??
상진: 뭐라고 말 좀 해봐.」
슬러시를 광고하던 케톡방에 생각지도 못한 말이 올라왔다. 어쩐지 어제부터 채팅에 1이 계속 남아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철진이가 우리 몰래 일을 낸 모양이다.
어렴풋이 짐작하던 일이다.
철진이가 했던 그간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저번 우희왕 듀얼대회에서 그런 철진이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를 두고 펼쳐야 하는 싸움에서 스스로 내려온 것이다. 동생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서.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케톡도 읽지 않는데 전화를 받을 리가 없지. 전화기도 끄고 간 마당에 연락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아니, 연락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일지도 모른다. 폰을 껐다는 건 그런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 * *
“조철진 전무가 오늘 아침 비행기에 올랐다고 합니다.”
“몬난 놈. 이래 지 사람들 놔둬뿌고 그냥 낼름 그만둔다 이 말이가? 다 낙동강 오리알 만들어뿌고?”
탁.
박 상무의 보고에 조동욱 회장은 갈 곳 잃은 화를 애꿎은 볼펜에 풀었다.
“조철진 전무 쪽 사람들은 모두 조상진 전무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합니다. 기존에도 최소 인력만 남기고 계속 지원을 나가 있는 상황이라 큰 변화도 없다 합니다.”
“이노마 이거 언제부터 이 일을 꾸민긴지 원. 언제온다 카는 말은 없었제?”
“네. 아마 한동안 돌아오지 않지 않겠습니까? 휴가를 쓸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가 정신이 없었고마. 생각할 시간 좀 주고 난중에 이야기한다는 기 벌써 시간이 이래 됐나?”
“사표를 드린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입니다.”
끝까지 아들에게 무심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으나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미 머리가 굵어진 장남을 웬만해선 설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두려 했던 것인데 이렇게 외국으로 휑하고 가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볼까요?”
“됐다고마. 글마가 갈 데가 또 어데 있겠노? 하와이지.”
하와이라는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뒤, 조동욱 회장은 노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글마 요만할 때 어매가 몸이 안 좋아가 거 요양을 며칠 보냈다. 요양 가는 마당에 혹 두 개 달고 가는 기 아이다 싶어가 막내만 포대기에 싸서 보냈디마 마 거기서 그래 갑자기 떠날 줄 누가 알았겠노? 내 사마 그때 일을 말 안 해서 기억도 못 할 낀데 사람 마음이 다 이어지기라도 한 긴지 틈만 나면 기를 쓰고 거길 가는 기라. 왜 가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끌끌. 뭐 자랑이라고 떠들끼고. 내가 무심해가 처도 못 챙긴 긴데.”
조동욱 회장의 아픈 과거다. 아내의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기침과 두통을 달고 살았지만 약을 먹으면 버틸 만하다는 그 말만 믿고 몸에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퍼지는 것을 두고 봐야만 했다.
“지도 엄마 따라 갈 끼라고 울고 불고 하는 걸 억지로 떼놨띠마 그게 그렇게 한이 되삔네.”
“회장님…….”
박 상무는 책상에 놓여 있던 티슈를 뽑아 조심스럽게 조동욱 회장에게 내밀었다.
“나이가 들었나? 주책스럽구로.”
티슈를 받아든 조동욱 회장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아내의 죽음과 남겨진 아이들의 그리움은 무덤까지 들고 가야 할 자신의 업보였다. 하지만 하늘이 야속한지라 그 죄값은 엄한 아이들이 받는 것만 같았다.
“거 덥고 음식도 다를 낀데 얼매나 있을란고.”
“걱정되시면 사람을 보내볼까요?”
“찾는다고 뭘 하겠노? 넘사시럽게 잘 지내냐고 안부나 전할까?”
“그래도 걱정되시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고요.”
박 상무 자신 역시 두 형제가 자라는 모습을 같이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두 형제는 박 상무에게도 친조카나 다름없었기에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
“아니면 민호 군에게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리 염치가 없기로서니 그 이역만리를 남의 아들내미 보러 댕기오라 카는 기 말이 되겠나?”
“하와이입니다. 휴가를 보내준다 여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호텔도 잡아주고 전용기 타고 편히 다녀오라 하시면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끌끌. 그냥 댕기오라 케도 갈 놈인기라. 그래. 아쉬운 소리 한번 해보자. 진수 글마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손자까지 매낐는데 나도 비싼 학원비 값 좀 해달라 케야지.”
전화기에서 저번처럼 문방구를 더듬더듬 칠 필요도 없었다. 통화 목록에서 스크롤을 두어 번 내리면 보일 정도로 연락을 자주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