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39화 (139/151)

#139. 뜻밖의 휴가(1)

휴가다.

예전 직장에서도 법정 근로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그 철야를 하면서 휴가를 쓰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내가 원해서 가는 휴가가 아닌 써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보내주는 그런 휴가 말이다. 당연히 휴가 시즌과 무관하게 업무가 비는 날이 생기면 바로 전날 급하게 결재를 올려야 했고 그런 휴가로는 해외여행이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3~4일에 운 좋게 비행기 표를 구한다 해도 종일 부족한 잠을 자도 모자랄 판이었으니까. 해외여행도 다 갈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떠난다 여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외를 한 번도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MM 프로팀에 와서도 미니카 대회와 애니메이션 업무로 일본을 가긴 했었으니. 업무에 치이고 사람을 만난 뒤에 곧장 돌아왔기에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새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번 여행도 엄연히 따지고 보자면 회장님의 의뢰를 받은 일이지 진짜 휴가라기엔 어딘가 떨떠름한 구석이 있다.

케톡.

「상진: 형 찾으면 말해주세요.

민호: 알았어, 인마.

지환: 그런데 문방구랑 누렁이는 어떡하므니까?

민호: 설란이가 봐주기로 했어.

지환: 그러면 나중에 밥이라도 한 끼 사야 하는 거 아니므니까?

민호: 선물 사갈 거야.

지환: 아니, 선물 말고…….」

쓸데없는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그대로 폰 화면을 꺼버렸다.

그렇다.

회장님께 말도 없이 떠나버린 철진이를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딱히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걱정이 많으신 듯했다. 상진이와 지환이,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30살 가까이 되는 청년이 어디 가서 무슨 큰 문제나 일으키겠냐만은 좋은 일로 떠난 게 아니었으니…….

어떻게든 연락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하는 걱정은 결국 내가 비행기를 타도록 만들었다. 겸사겸사 난생처음 해보는 해외여행이라는 것도 해보고 말이다.

내 목표는 명확했다.

‘최대한 빨리 철진이를 찾아 혼구녕을 내고 한국으로 돌려보낸 다음 여유롭게 하와이를 즐긴다!’

상진이와 임 차장님이 주신 정보를 토대로 본다면 철진이를 찾는 데에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덩치가 커서 어딜 가도 눈에 띄고 행동반경도 그리 크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회장님의 전용기로 편안하게 도착한 하와이의 첫인상은 의외로 수수했다. 깔끔하긴 하지만 작고 오래된 공항, 거기에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느 한국의 구도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세계적인 휴양지라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비슷한가 보다. 곧바로 야자나무와 에메랄드빛 바다를 상상했던 나는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을 품고 공항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행복한 투어」

높게 들려진 피켓은 얼마나 오래 썼는지 코팅된 끝부분이 다 말려 올라간 상태다.

행복한 투어. 해외여행이 처음인 내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여행사다.

그만큼 이번 여행에 나름 큰마음을 먹고 온 것이다. 랜트카를 타고 다녀도 되지만 외국에서 운전이 처음인 데다 성격상 관광명소를 직접 알아볼 것 같지도 않아 여행사에 부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그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말이다.

어릴 땐 굳이 혼자 다니면 될 일을 왜 비싼 돈을 들여 타이트한 일정으로 관광을 하지?라는 궁금증을 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썩 나쁘지 않은 서비스지 않은가? 알아서 이렇게 공항으로 픽업도 와주고 관광명소를 알차게 소개해준다. 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는 것이다.

“김민호 고객님? 혼자시죠?”

“네, 맞습니다.”

피켓을 들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호쾌하게 악수를 건넸다. 하와이의 뜨거운 태양에 보기 좋게 탄 구릿빛 피부와 여유로운 웃음이 인상적인 사람이다.

여행사도 삼정그룹에서 따로 계약하는 업체가 있다곤 하지만 굳이 그곳에 예약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들을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주제에 여유롭게 여행사까지 예약하겠다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비행기 표와 호텔 숙박도 공짜로 얻은 마당에 이 정도는 써야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낄 것 같기도 했고.

“자, 다 모였으니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안내를 받고 올라탄 승합차에는 일행이 한 팀 더 있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젊은 선남선녀다. 방금 결혼식을 마치고 도착한 듯, 한창 깨가 쏟아진다는 말이 이렇게 어울릴 사람들이 또 있을까 싶게 착 달라붙어 부둥켜안은 모습에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망설일 지경이었다.

“아! 세 분 다 인사하세요! 이틀 뒤에 같이 투어를 가실 분들입니다.”

눈치 빠른 가이드가 백미러로 힐끔 쳐다보고는 어색한 공기를 단번에 간파했다.

“안녕하세요. 김민호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박호영입니다.”

“권미진이에요.”

“운이 좋으십니다. 원래 이맘때쯤 되면 결혼하시는 분들이 또 많아서 복작복작하거든요. 이렇게 소규모 인원으로 가기도 오랜만입니다. 자, 오른쪽에 보시면 하와이에서 생산하는…….”

역시 관록이 있는 가이드다. 별것 아닌 오래된 공장에도 최대한 히스토리를 붙여 맛깔나는 설명을 이어가는 흐름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가이드의 설명을 라디오 삼아 하와이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차를 30분 정도 달렸을까? 드디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티비에서 보던 바로 그 에메랄드빛 바다다.

“여기가 바로 와이키키 해변입니다. 다들 짐 풀고 자유롭게 다니시다가 이틀 뒤 오전 8시에 여기서 다시 모이겠습니다. 혹시 일정에 변경이 있으시면 단톡방에 말씀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같이 공항에서 차를 타고 온 신혼부부도 나와 같은 반패키지를 선택한 모양이다. 첫날부터 빡빡한 일정으로 비행기에 다시 오르기까지 투어를 다니는 풀패키지는 애초에 내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철진이를 찾아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자기야! 여기 정말 좋다!”

“우리 여기서 사진 찍을까? 저, 민호 씨라고 불러도 되죠? 민호 씨, 저희 사진 한 번만 찍어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여기서도 한 장 부탁드려요. 아니다, 아까 거기서 다른 포즈로 한 장 더 부탁드려요!”

와이키키 해변 입구에 양손을 벌리고 꽃다발을 잔뜩 든 이름 모를 동상에서 사진을 찍어달라 잡힌 게 벌써 10분 전이다.

이 부부, 어쩐지 진상의 냄새가 난다.

그래도 일생의 한 번뿐인 신혼여행인데 기분을 상하게 하긴 싫어 해달라는 대로 사진을 찍어줬더니 좀처럼 놔주질 않았다.

“저는 이제 가봐야 할 듯합니다. 할 일이 있어서요.”

“네, 저희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죠? 호호호. 죄송해요.”

족히 30장은 찍은 듯한데 이렇게 끌려다니다간 도저히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아 정중히 말을 꺼냈더니 의외로 수긍하는 눈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3~4장 사진을 찍을 때 빨리 도망칠 걸 그랬나?

“사진 너무 감사합니다. 아, 저희가 이렇게 보내면 너무 죄송한데 커피라도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별일도 아닌데요, 뭘.”

“일정도 없는 마당에 뭐가 그리 급합니까? 자, 저기 들어가서 한 잔만 하시죠. 또 이틀 뒤에 볼 사이지 않습니까?”

몇 번의 사양에도 끝내 나는 끌려가듯 남자의 손에 붙들려 카페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저는 한국에서 IT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직원은 한 100명 정도 되는 작은 곳입니다. 혹시 하시는 일이……?”

싱거운 사내다. 두꺼운 금시계와 고급 브랜드로 보이는 옷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자랑을 떠벌리는.

굳이 여행을 와서 편한 옷차림에 슬리퍼를 끄적이는 차림을 한 나에게 이렇게 자랑을 하는 것은 옆에 있는 아내 때문이리라.

“저는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업무차 잠깐 오게 됐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참 고생이 많아요.”

다행히 내 얼굴은 모르는 눈치였다. 매스컴에도 제법 나왔지만 벌써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일이다. 저들 눈에는 그저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궁금하지도 않은 업무로 이곳에 팔자 좋게 출장을 온 직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편이 나에게도 좋았다. 어설프게 저 자랑하기 좋아하는 남자의 자존심이라도 긁었다간 이틀 뒤에 세상 피곤한 투어를 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휴양지인데 차가 다 그냥 그러네요. 세단도 많이 안 보이고 말이죠. 제가 타는 차는 벤쯔S급인데 같은 차종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손에 익은 차였으면 하는데.”

한시라도 빨리 이 커플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 바람에 대화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급한 일이 있다 해놓고선 철진이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모양새를 들키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무언가 일어나야만 하는 핑계가 생각나지도 않았다.

“참, 오빠! 우리 체크인해야지! 옷 갈아입고 쇼핑하려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희는 저기 포사즌 호텔에 예약했거든요. 하와이에서 제일 비싼 호텔이라나 뭐라나? 하하. 바다가 잘 보여서 그쪽으로 잡았습니다. 참, 오늘 감사했습니다.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끝까지 밉상이긴 했지만 일단 알아서 가준다니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포사즌 호텔? 거긴 회장님이 잡아준 숙소인데 또 운이 나쁘면 마주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찝찝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온 나는 본격적으로 철진이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 차장님과 상진이에게 들은 철진이는 기념품점이 아니면 스테이크를 먹으러 다니거나 호텔에서 맥주를 마신다 했다. 그렇다면 그나마 만날 가능성이 있는 장소는 기념품점과 음식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가장 가까이 있는 스테이크집은 걸어서 100m도 안 되는 거리였다.

다행히 와이키키 해변의 스테이크집들은 대부분 해변 쪽에 모여 있었다. 게다가 별다른 창문도 없이 오픈되어 밖에서도 내부가 훤히 보인다.

무더운 날씨에 햇빛도 따가워 걸어 다니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으나 북태평양의 천국이라는 별명답게 조금만 그늘로 들어오면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혹시나 해서 걸어본 전화는 역시 꺼져 있다.

이 자식 눈에 띄기만 해봐라. 아주 그냥…….

“어?”

놈이다.

당당하게 테라스 끝자리에서 족히 4명도 먹을 만한 고깃덩이를 신나게 썰고 있는 철진이가 저 멀리서도 확실히 구분이 된다.

이렇게 허무하리만치 빨리 찾을 줄이야!

“야! 조철진!”

반가움이 아닌 분노의 외침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저놈이 원흉이다. 이 먼 곳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이 막상 태연하게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을 보니 부화가 치밀어올라 도저히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어어어. 왜? 왜? 형이 왜 여기에 있어?”

“이리 안 와?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진짜!”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나를 보고 당황한 철진이가 포크를 든 채 테이블을 방패 삼아 요리조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기고 저놈을 당장 한국으로 보내면 오늘 저녁부터는 꿈에 그리던 하와이 휴가를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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