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40화 (140/151)

#140. 뜻밖의 휴가(2)

“아이고, 다리야.”

“자세 풀지 마라.”

나는 눈치를 보고 슬며시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철진이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비행기를 타고 자그마치 8시간. 겸사겸사 휴가를 온 샘 치면 된다지만 애초에 이놈이 아니었으면 오지도 않을 곳이었다.

“너 폰은 왜 껐어?”

“떨어뜨려서 고장 났는데 여기서 사자니 영어로 솰라솰라 하기도 귀찮고 해서…….”

납득이 되는 변명이었다. 평소에도 얼마나 자주 떨어뜨리는지 액정이 멀쩡했던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러나 고작 그런 하찮은 이유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건 그 나름대로 열이 받았다.

“좋은 말로 할 때 한국으로 돌아가서 회장님이랑 애들한테 사과해.”

“어차피 형 폰으로 연락하면 되잖아. 형은 언제 가는데?”

“3일 뒤.”

“뭐야? 왜 그렇게 짧아?”

“놀러 온 게 아니고 너 잡으러 왔으니까, 인마!”

딱.

나는 먹던 포크로 녀석의 이마를 갈겼다.

꽁트도 이런 꽁트가 또 있을까? 30살 먹은 사내 놈이 연락이 끊겨 찾으러 온 곳이 하와이라니.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후우. 여기 맥주 팔지?”

“여기 맥주 유명해. 하프야드 맥주잔이 엄청 크다니까?”

“야, 맥주잔이 커봤자…….”

정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테이블에 자기 머리 높이만큼 커다란 맥주잔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일단 한 잔 시켜봐. 그리고 이걸로 회장님이랑 애들한테 전화 돌려.”

나는 맥주 주문을 핑계 삼아 또 다시 무릎을 펴는 철진이에게 폰을 내밀었다.

“지금? 먹고 하면 안 돼?”

“팍 씨!”

세계적인 휴양지에 왔는데 유독 열받는 일만 생긴다. 허세 덩어리 신혼부부부터 죄를 지은 주제에 뻔뻔하게 고기를 썰고 있던 철진이 놈까지.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

“때, 땡큐.”

한창 철진이를 쥐 잡듯이 잡는 와중에 생글생글 웃으며 맥주를 가져온 점원에게 그 모습을 들킨 게 민망해 말조차 더듬었다.

테이블에는 커다란 흑맥주가 두 잔 올라왔다.

긴 호리병처럼 생긴 맥주잔이 아마 이 음식점의 트레이드마크인 듯했다. 마실 때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맥주잔 겉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철진이와 푸닥거리를 하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던 갈증을 다시 상기시켰다.

“일단 마시고 이야기하자.”

내가 맥주를 비우며 안주를 몇 개 집어먹는 사이 철진이는 부지런히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난감한 얼굴을 보아하니 거는 전화마다 호되게 꾸지람을 듣는 듯 연신 땀을 뻘뻘 흘려댔지만, 업보를 청산하는 과정이기에 딱히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네… 네…….”

그렇게 커다란 맥주잔이 다 비워질 무렵, 철진이의 전화도 회장님께 드리는 마지막 전화로 끝이 났다.

“휴.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네.”

“그래. 말이나 들어보자. 왜 그런 거야?”

“뭘?”

“왜 사표 냈냐고.”

“…….”

안다.

철진이 왜 사표를 냈는지. 지금에 와서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진이에게 삼정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고 회사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살려는 것이다. 그 결정을 하고 사표를 내기까지 철진이는 그 고통을 혼자 감내했다.

“이게 최선이니까.”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철진이 꺼낸 대답이었다.

최선이라 했다. 내가 철진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응?”

“뭐?”

“그게 다야?”

“그럴싸한 위로라도 해줄 줄 알았냐? 네 팀원은 상진이가 잘 추스렸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것도 아니잖아?”

“그, 그렇지.”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단돈 천 원이 없어 밥을 굶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몇십 원짜리 박스를 줍기 위해 새벽부터 리어카를 끄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으니까.

그러나 누구도 이런 철진이의 행동을 배부른 투정이라 할 수 없다.

애환이 없는 삶이 어디 있기야 하던가? 각자 처지가 다를 뿐 그 속에 가슴 아픈 시련을 안고 살아간다.

다만 철진이는 그들보다 아파해선 안 된다.

슬픔과 괴로움도 자격이 있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수술비가 없어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갑작스러운 불운으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부모가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사주지 못하는 괴로움은 철진이 포기한 지위와 돈에 감히 비견될 바가 아니다.

슬프고 괴로울지언정 훌훌 털고 일어나 언제라도 다시 웃을 수 있기에 그럴싸한 말로 포장된 위로도 필요치 않다. 지금은 그저 무심한 형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폰은 지금 바로 사. 유심만 끼우면 되잖아. 그건 멀쩡할 거 아니야.”

“가서 뭐 해? 이제 할 일도 없는데.”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삼정그룹의 후계자가 아니라 진짜 네가 하고 싶은 거.”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도 종국에는 염증을 느끼고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세상천지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월세와 대출이자를 내고 나면 밥 한 끼도 빠듯한 돈을 벌기 위해 아침부터 지옥철을 타고 회사로 향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 또한 그랬고.

다만 그 생활 속에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찾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형도 원해서 MM 프로팀을 맡지 않았어. 할아버지의 문방구를 물려받은 것도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여기에 너를 잡으러 온 것도, 인마!”

딱.

“악! 그만 때려! 그래도…….”

“그래도 해야 하는 거야.”

MM 프로팀을 맡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직장을 다녔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문방구도 진작 철진이에게 비싼 값에 팔아치웠다면 서울 외곽에 번듯한 아파트를 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미니카프로팀을 맡아 한 치 앞도 모르는 불안한 직장을 다니며 그 불안함을 내색조차 내선 안 된다. 문방구는 또 어떻고? 할아버지의 유산을 그렇게 팔아버리기 싫다는 고집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운영을 하고 있다.

36살에 변변치 않은 스펙으로 경력까지 끊긴 마당에 이제 MM 프로팀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정말 갈 곳이 없어진다.

하지만 남았다.

사람이 남았고 즐거운 추억이 남았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감을 구태여 철진이에게 설명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나 또한 살아온 길이 완전한 정답이 아님을 알기에.

“내일 비행기로 다시 돌아가.”

“조금 더 있다가 갈래. 어차피 형도 3일은 있을 거잖아.”

“내일 가. 머리나 식히려고 온 게 아니잖아. 그냥 도망치듯 숨은 거지.”

“형도 온 김에 그냥 같이 더 놀다 가면 안 돼?”

“이게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어쭈? 피해?”

“아, 진짜 아프다고!”

“역사적으로도 이게 약이었다. 넌 좀 더 맞아야 해.”

한 번 내린 결정은 물릴 수 없다. 인생은 골목길 아이들이 하는 게임이 아니니까.

속마음은 깊은 철진이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다만 이렇게 홀로 떠나와 궁상맞게 있는 시간은 그리 넉넉하게 주지 않을 작정이다. 괴롭고 힘들 때 곁에 있어 줄 사람들이 셋이나 있기에.

* * *

우리는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머리를 식힐 겸 해변으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이드가 해변에 내려줬을 때부터 그 진상 신혼부부에게 붙잡혀 사진만 찍어댔고 그 뒤에는 이놈을 찾아 돌아다녔으니 바다를 볼 여유가 이제야 생긴 것이다.

바다에 듬성듬성 떠 있는 요트들과 파도를 타는 서핑보드. 그리고 파라솔에 누워 있는 사람들까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조차도 이런 그림 같은 풍경에는 사뭇 마음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왜 여길 그렇게 비싼 돈을 써서 오는지 알겠네.”

“좋지?”

“너만 없으면.”

“우씨.”

다행히 철진이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사실 처음 녀석을 찾았을 때도 그리 심각한 얼굴은 아니었기에 괜한 걱정이었나 싶을 정도다.

“좀 걷자. 그래도 와이키키해변인데 모래사장은 밟아봐야지.”

“수영 안 하고?”

“축축하게 걸어 다니기 싫어.”

“금방 마르는데…….”

갈아입을 옷은 여유롭게 챙겨오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그때그때 저렴한 가게에서 사 입으면 된다는 말을 봤기에 굳이 짐을 늘리기 싫었던 까닭이다. 여기서 속옷까지 바닷물에 담갔다간 계획에 없는 손빨래를 하게 된다.

사박사박.

나는 철진이의 구시렁거림을 무시하고 해변을 따라 걸었다. 모래를 밟는 감촉이 슬리퍼를 통해 전해진다. 그제야 비로소 휴가를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백사장을 밟으며 걸어 본 것도 대학교 MT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차를 타고 달리면 못 갈 곳도 아닌데 나와는 관계가 없는 별개의 낙원인 것처럼 여겨졌던 게 문제였을까?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없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이렇게 여유로운 사람들과 섞이니 나도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진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해변을 걷다가 공 좀 주워 달라는 말을 건네는 미녀와의 운명적 사랑이…….

“야.”

“응?”

“좀 떨어져서 와. 옷도 좀 입고! 티는 도대체 왜 벗은 거야!”

“왜? 덥잖아.”

신혼여행지로 손꼽는 곳이 바로 하와이다.

우리 나이 또래에 사람들은 전부 연인 사이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 곁에서 철진이가 같이 걷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뒤늦게 깨달음이 왔다. 여자친구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데 졸지에 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게이 커플로 낙인을 찍으며 돌아다닌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험한 꼴을 당할 뻔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뵙네요.”

아. 이런 망할. 하와이 바닥이 이렇게 좁을 줄이야.

그렇게 시달리고 불과 몇 시간 지나지도 않는데 이 넓은 해변에서 또다시 마주치고 말았다. 둘 다 한국인 인증기라는 딱 달라붙는 래쉬가드를 입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두꺼운 목걸이와 귀걸이로 치장을 한껏 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이쪽은 먼저 파견 온 저희 회사 직원입니다.”

“조철진입니다. 누구야?”

“이틀 뒤에 같이 투어 가는 분들이셔.”

“반가워요.”

순간 머리를 짜내 나온 변명치고는 너무나 마음에 드는 정답이었다.

출장을 왔다고 했으니 당연히 옆에 있는 짐승 같은 남자도 연인이 아닌 같은 회사 직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앞서 했던 거짓말 아닌 거짓말에 신뢰도도 더하고 말이다.

“이렇게 또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나 하실까요?”

“아닙니다. 저희 방금 먹고 와서.”

“형, 먹으러 가자. 나도 슬슬 배고파.”

“아니, 너 방금 소 한 마리 먹었잖아.”

“그건 점심이고.”

“그래요. 같이 가요. 저희는 따로 룸으로 예약해 놔서 인원수만 말하면 되니까요.”

이 부부는 한 번뿐인 신혼여행에 왜 이리 다른 사람들을 끼워넣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둘 다 신혼여행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휴가가 아니다.

평생에 두 번 다시 올까 싶은 아름다운 해변에서 도저히 엮이기 싫은 사람이 셋이나 곁에 있다니. 나는 눈부신 바닷가의 햇빛을 핑계 삼아 힘껏 찡그린 얼굴로 두 부부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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