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신입사원(4)
시간이 총알처럼 흐른다.
아쉬운 휴가를 다녀오고 꼴에 이틀간 밀린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주말이 다가왔다.
“으, 이젠 진짜 보일러 틀어야지.”
자가당착에 빠졌다. 밤에는 쌀쌀한 날씨에 두꺼운 이불을 덮어야 잠이 잘 온다는 생각으로 보일러를 켜지 않고, 아침이 되면 금방 따뜻해질 걸 알면서도 보일러를 틀까 하는 고민을 한다.
“조금만 더 잘까? 주말인데?”
서늘한 공기는 포동포동 살이 오른 누렁이로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했다. 고양이를 키우기 전에는 몰랐는데 무려 38도 이상 되는 체온을 가진 녀석이다. 일단 껴안기만 하면 최소한 감기에 걸릴 일은 없다.
그렇게 한기에 잠시 떠졌던 눈이 겨우 다시 감길 무렵이었다.
드르륵.
“형! 우리 왔어!”
“안녕하시므니까.”
“상진이는 출장이라 못 온대.”
의외로 나는 느긋한 주말 늦잠과 거리가 멀었다. 문방구에 출근 도장을 찍는 이 녀석들 덕분이다.
“오락기 내놓고 슬러시 기계에 시럽 좀 넣어놔.”
“우리 알바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므니까?”
“알바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침 댓바람부터 와서 잠이나 깨우는 주제에. 하암.”
시계를 보니 아직 8시도 안 되었다. 이 할 일 없는 놈들은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보다 더 일찍 문방구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이불을 걷었다. 그렇게 대충 접은 이불을 장롱에 넣고 칫솔을 물고선 슬리퍼를 끄적이며 밖으로 나오니 시골 아침의 익숙한 흙냄새가 코를 간질었다.
“그런데 어르신들은 다 어디 가셨어?”
“수확기라 다 밭에 가셨지.”
“주말인데?”
“농사일에 주말이 어디 있어. 나중에 추수할 때 되면 우리도 도와야 해. 얻어먹은 밥값은 해야지.”
다들 기력이 예전 같지 않으셔서 밭과 논을 줄이셨지만 때마다 자식들에게 보낼 쌀과 배추며 무, 당근을 포기하지는 않으셨다.
지금이야 먼저 익어 무를 것 같은 작물만 캔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장님의 경운기가 돌아다닐 시기가 되면 나를 포함한 세 녀석도 일손을 도와야 한다.
얻어먹은 제철 반찬이 족히 한 포대는 넘으니 말이다.
“오늘 뭐 하고 놀지?”
“초딩이냐?”
“게임해서 진 사람 이장님댁에 놀러가기 어때?”
“끔찍한 소리이므니다!”
막상 녀석들도 문방구에 왔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평상에 나란히 누워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지극히 알찬 주말 아침을 보내는 중이었다.
“저…….”
“네? 아, 어서 와.”
주말 아침에 문방구의 문을 두들긴 손님은 두 녀석이 다가 아니었다.
“어?”
“우주 씨이므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한창 차트에서 고공행진을 하는 가수 우주의 방문에 두 녀석이 잠깐 아는 체를 하곤 다시 벌렁 평상에 누워버렸다.
나도 문방구 주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저 녀석들과 같은 반응이었겠지.
애석하게도 우리는 남자다. 아무리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지만 같은 남자인 가수에게 흥미를 느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물론 우주의 방문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오늘은 혼자 왔네? 매니저 형은?”
“오후에 스케쥴이 없어서 그냥 혼자 왔어요.”
“차도 없이? 이따가 얘들 차 타고 가.”
“네, 감사합니다.”
우주는 지난번 우희왕 대회를 기점으로 종종 마을회관에 우희왕 카드게임을 즐기기 위해 들렀다. 필연적으로 문방구에도 자주 왔었고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딸그락.
마을회관에 듀얼을 할 어르신들이 없었던 우주는 문방구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오락기 앞에 앉아 동전을 넣었다.
“어어, 손손! 손으로 받쳐야지!”
“네?”
“늦었으므니다!”
드르르륵.
두 녀석의 다급한 목소리에 더 당황한 우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괴돌이를 그대로 땅에 흘렸다.
“빨리 주워! 3초 안에 주워 먹으면 괜찮아!”
“그게 무슨…….”
“빨리!”
터가 안 좋나? 어째 밖에선 다 멀쩡한 애들이 여기만 오면 모질이가 된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우주도 예외는 없었다. 잘생기고 가창력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 인기 가수가 우리 문방구의 훌륭한 신입사원으로 입지를 다지는 중이다.
“호야! 저저 복지관 얼라 또 주워 먹는다!”
“컥컥!”
저번 달에 백내장 수술을 하셔서 시력이 부쩍 좋아지신 윗집 할머니가 밭일을 하시다 말고 큰소리로 외치셨다.
저 까마득히 멀리 계시면서도 우주가 땅에 떨어진 괴돌이를 주워 먹는 게 보이셨나 보다.
“우주도 이제 복지관 사람이므니다.”
“복지관? 민호 형, 그게 뭐예요?”
“나중에 알게 돼. 야, 너희들 우주 그만 놀려. 처음 왔을 때는 더했던 놈들이. 너도 그거 주워 먹으라 한다고 진짜 먹지 말고!”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잔소리를 아침부터 늘어놓는 동안 저 멀리서 익숙한 차 한 대가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참, 오늘 토요일이지? 손님이 많이 오네.”
토요일은 늘 오는 손님이 있다.
바로 대현그룹의 총수 정진수 회장님과 그 손자들이다.
* * *
“드세요. 칡차입니다.”
“고맙네.”
호록.
은은하게 올라오는 칡차의 향이 좁은 방 안에 한가득 채워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누렁이는 슬며시 문방구로 나가버렸다.
“문방구는 여전하군. 그래, 장사가 좀 되나?”
“오늘은 한 6천 원 벌겠네요.”
회장님의 손자가 셋, 그리고 두 녀석과 우주까지 합하면 도합 6천 원의 빛나는 매출을 달성한다.
“그걸 벌어서 어디 먹고 살겠나? 허허.”
“그래도 처음보다는 꽤 매출이 오른 편입니다.”
“대현그룹 손자에 삼정그룹 장남, 루데그룹 아들까지. 그리고 저 사내는…….”
“우주라는 가수입니다. 대현자동차 광고도 찍었지요.”
“그래, 어쩐지 낯이 익다 했네. 이 정도 손님들이면 못해도 수백은 벌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하. 뭐 정 돈이 궁해지면 그때 가격을 올리겠습니다.”
“그래, 우리 애 하나 빼간 건 잘 쓰고 있나?”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고맙지. 자식 놈 얼룩까지 다 뒤집어쓰고 나갈 사람 챙겨준다는데.”
호록.
“뭐 이미 내놓은 자식 놈들 흠집이야 누구 손에 들어가던 큰 상관은 없네만 왜 그걸 하필 삼정그룹으로 가져가라 한 겐가?”
“보험입니다.”
“아니, 보험이라면 자네가 들고 있어도 되지 않은가?”
“제 보험이 아닙니다. 나중에 회장님의 일신상에 문제가 생겨 행여나 아드님들이 다시 이빨을 드러낼 순간에 필요한 보험입니다.”
“뭐라?”
무례한 말이다. 아무리 걱정으로 꺼낸 이야기라지만 면전에 당신이 아프면 아들이 칼을 들지도 모른다는 말을 쉽게 꺼내선 안 되었다. 그러나 물음에 마땅히 둘러 말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시다. 지금은 정정하시지만,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 대현그룹의 구심점인 회장님이 건강 문제로 자리를 비우면 그 틈을 누가 파고들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회장님께 어려움이 닥치면 대현그룹을 지켜줄 힘과 명분이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자네가 잘 모르나 본데 우리 대현그룹과 삼정그룹은 계열사가 아니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생판 남보다 못한 사이지. 그리고 나로서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안다.
두 회장님은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라이벌로 지내오셨다. 세계 시장을 공략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시장을 점유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쓰셨다 들었다.
그 감정의 골은 비단 회장님들끼리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격동의 시기를 같이 겪은 회사의 중역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대현그룹이 위태롭다 하여 삼정그룹에서 손을 내밀 이유는 조금도 없다. 대현그룹 역시 마찬가지였고.
“미운 사람과 싫은 사람은 다릅니다. 미운 사람이 길을 가다 넘어지면 배를 잡고 뒹굴지만 죽을 병에 걸리면 측은지심이 드는 법입니다. 두 분이 그리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면 제가 두 회사에 지원을 받고 프로팀을 운영할 수 있었겠습니까? 분명 조동욱 회장님은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드린 정보도 아마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서랍 속에 넣어 두셨을걸요?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삼정그룹에서 알아내지 못할 정보들도 아닐 텐데요.”
천하의 대현그룹의 부회장과 그 형제들이 연루된 스캔들이다. 내부적으로 조용히 끝냈다곤 하지만 세상에 어디 완벽한 비밀이 있던가? 삼정그룹이 마음만 먹는다면 특보로 뉴스 1면을 도배하듯 채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삼정그룹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두 회장님의 관계는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진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고 서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생채기가 났다 하여 목숨을 끊으려 들 만큼의 분노는 두 회장님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장설우 과장이 우리 회사에 오면 그 소문이 회장님의 아들들에게도 들어갈 겁니다. 삼정그룹의 회장님과 친분이 있는 제가 자신들의 치부를 알고 있는 장설우 과장을 데리고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저들에게는 경고가 될 겁니다. 그 경고조차 알아먹질 못한다면 그땐 어쩔 수 없겠지만요.”
호록.
회장님은 한동안 말없이 차를 드셨다.
“자네도 참 앞날이 복잡하겠구먼.”
“네?”
“이 사람 저 사람 다 챙기다간 어디 본인 앞가림을 할 여유나 있겠나? 허허.”
“원랜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 조금씩 변하나 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네. 주변이 변하는 게지. 지금 자네 주변에는 이 늙은이처럼 손이 많이 가는 놈들이 있는 거고.”
“하핫. 그렇게도 설명이 되는군요.”
드르륵.
무거운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고 공기가 다시 부드러워질 때쯤 방문이 열렸다.
“할아부지, 배고파요!”
“짜장면 먹고 싶어요!”
한창 방방에서 땀을 흠뻑 흘리던 아이들이다.
“그래, 우리 똥강아지들. 짜장면 먹으러 갈까?”
손자가 배고프다는데 그냥 참고 넘길 할아버지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그렇게 차 한 잔에 나누기엔 과하게 무거운 대화가 끝났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오늘도 잘 놀다 가네.”
“형아! 안녕!”
* * *
정진수 회장은 민호의 배웅을 받으며 문방구를 나와 허기진 손자들에게 직접 안전벨트를 하나씩 채워주고는 차에 올랐다.
“회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요 근처 중국집으로 가지.”
“네, 회장님.”
‘지분 돌려받은 값만 줬더니 이거 너무 염치없는 사람이 됐구먼. 늙은이 몸 걱정에 회사 걱정까지 받을 줄이야. 허허.’
아들놈에 대한 분노와 실망으로 경황이 없어 뒷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을 대신해 이렇게 든든한 보험까지 들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체면을 생각해 자신이 모르는 사이 직접 꾸민 것처럼 일을 진행했다.
사전에 허락을 맡았다고는 하지만 그 사소한 마음 씀씀이까지도 고마웠다.
‘아들놈 중에 민호 군 반이라도 따라갈 녀석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고마움 뒤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시골 문방구에서 천 원짜리 장사를 하는 사내보다 못한 아들놈들의 자질이 뒤늦게 떠오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