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신입사원(5)
“잘 봐. 이게 클릭이야.”
“아, 나도 회사 다녔다고!”
“푸훕!”
내 놀림에 퍽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끈한 철진이 소리쳤다.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으나 워낙 존댓말이 어색하기도 해서 고치는 건 포기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철진이 우리 MM 프로팀으로 출근을 시작하고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철진이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면서 가뜩이나 위태롭던 족보는 완전히 꼬여버렸다. 재벌 2세답게 말도 안 되는 고속승진을 거듭했고 30살에 전무라는 직함을 달았단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중고신입사원이 되어 들어왔으니, 당장 오늘부터 업무를 알려주고 같이 일을 해야 할 직원들이 난감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철진이가 가진 격 없이 사람을 대하는 성격 덕분에 무난한 직장 생활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이리 잘 통할 줄이야.
사람을 이끌고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갑자기 말단으로 떨어졌다면 으레 적응하기 어려울 법도 한데, 철진이는 나름 성실하게 업무를 배워나가고 있었다. 별것 아닌 문서 작성부터 꽤 관록이 쌓여야 만들 수 있는 기획서까지.
그래도 느긋하게 앉아 부하 직원들이 떠먹여 주는 밥만 먹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테스트 결과서는 왜 똑같은 게 이렇게 많아?”
한창 문서를 뒤적거리던 철진이가 물었다.
“코너가 많은 코스로 달린 미니카, 주행거리가 긴 것들, 냉장고랑 온열기에 왔다 갔다 한 것들도 있고.”
“그렇게 많이 해야 해?”
“애들은 장난감을 의외로 험하게 다루거든.”
아이들은 자신의 장난감이 부러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실로 그 창의력은 기발하기 짝이 없어서 어른들의 시선으로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발상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 마을에서는 수중 주행이 가능하다며 물속에 넣어보는 아이도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내구성 테스트는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미 우리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려 아이들의 시선에서 이 미니카를 바라보지 못하니 말이다.
“언제까지 다 해야 하는 거야?”
“그런 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면 돼.”
“정말 이렇게 운영했다고?”
“우리는 그래.”
철진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주위의 직원들을 바라봤다. 아까 내가 했던 농담의 연장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반응을 살폈지만 모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 무책임한 말이다. 최소한의 일정표는 존재하지만, 기록에 의의를 두고 일정이 늦어지거나 빨라지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우리 MM 프로팀은 태생이 생존이었기에 그렇다.
1년 남짓한, 퇴직이 확정된 직원들로 구성된 인력과 취미로 미니카 대회에 나왔던 선수들이 모여 만든 팀.
애초에 미니카 프로팀이라는 곳에 열 명이나 되는 직원이 모여 해야 할 업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조차도 당장에 구단주가 아닌 선수로 대회에 출전해야 했으니 살림을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직원들은 모두 필사적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퇴직을 하면 오갈 데 없이 다시 구직 활동을 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한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필요해서다. 이 무책임한 말은 그렇게 우리 팀의 모토가 되었다.
“익숙해지면 할 만할 거야. 너도 딱히 상진이처럼 매뉴얼대로 움직이진 않았잖아?”
“그렇지. 애들이 고생 좀 했지.”
철진이가 옛 생각이 났는지 조금 씁쓸한 어투로 나지막이 대답하는 모습에 불쑥 짜증이 몰려왔다.
이놈, 너무나 뻔뻔하지 않은가?
철진이 같은 상사는 더러 보아왔다. 즉흥적이면서 막무가내식 지시를 하는 상사는 부하 직원에게 있어서 재앙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철진이는 그런 지시에 따른 결과가 좋았고 지금껏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기에 욕을 조금 덜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철진이의 입장에서 보정된 기억이다. 말 몇 마디에 각종 자료조사와 관련된 보고서를 힘들게 작성해야 했을 직원들의 고생은 이놈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포장이 된 모양이다.
“이젠 네 차례야. 굴린 만큼 굴러지는 거지. 그게 업보란다.”
“응?”
나는 철진의 어깨를 두들기고 그렇게 퇴근길에 올랐다.
“벌써 간다고? 우리는 일하는데?”
“억울하면 계속 다녔어야지.”
철진이도 근태만큼은 다른 재벌 2세들과 다르지 않은 직장생활을 했었다. 나보다 더 일찍 문방구에 도착해 있을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아무리 못해도 한 달은 저 테스트 문서들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 철진이는 한번 시작한 일에 끝을 보지 않을 성격이 아니기에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신입사원의 신고식치고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업무를 가장 빨리 파악할 방법을 스스로 선택했으니.
첫 인사로 수습 기간이 끝나고 잘리기 싫으면 퇴근 없이 일해야 한다는 뼈 있는 조언을 들었던 내 신입 시절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발이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 MM 프로팀은 식구가 늘었다. 조금 더 많이 먹는 식구가.
* * *
철진이를 한바탕 거하게 놀린 뒤에 문방구로 돌아오는 길. 저 멀리서 익숙한 경운기가 보였다.
새마을운동 로고가 찍힌 색 바랜 연두색 모자, 그리고 목에 걸친 수건과 깡마른 체격. 누가 보더라도 우리 동네 이장님이다.
탈탈탈탈.
“이장님, 안녕하세요.”
행여나 도랑으로 바퀴가 빠질까 싶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곁을 지나가면서도 이장님께 인사는 잊지 않았다.
“이이, 인자 퇴근하는 겨?”
“네. 이제 바빠지시나 봐요?”
“올해는 다들 풍년이니께. 할마시들 골병 안 들라믄 나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제.”
“저도 도울게요. 오늘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이이, 안 그래도 되야. 회사 일도 하고 피곤할 텐디.”
“운동 삼아 하는 건데요, 뭘. 옷 갈아입고 바로 갈게요.”
“그라믄 저짝 윤씨 할매 밭부터 시작하니께 그짝으로 오면 되야.”
“네, 알겠습니다.”
사람을 쓸 정도로 많은 작물을 심지는 않으신다. 큰돈을 벌자고 하시는 일이 아니니까. 그저 손수 키운 쌀이며 채소를 자식들에게 보내고 이웃들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농사를 지으셨다.
그렇게 다 나눠주고 나면 그제야 남은 작물을 저장고로 보내거나 소쿠리에 담아 손수 오일장에 나서신다.
사람을 쓰면 당연히 수지타산이 맞질 않고 뜨문뜨문 오던 농활이나 대민지원에 의지할 분들이 아니셨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야 그저 일 년에 몇 번 들르는 수준이니 이런 일을 도울 기회가 많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도 어엿한 마을의 구성원이고 귀한 젊은 피다. 일손 하나가 귀한 마당에 하릴없이 문방구에 앉아 어르신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간만에 몸을 움직이려니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스박스에 어르신들이 드실 아이스크림을 넣고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트렁크도 비워야 했다.
그렇게 조금 급한 마음으로 엑셀레이터를 부지런히 밟아 도착한 문방구에는 의외의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우주! 요새 자주 오네?”
“안녕하세요, 형. 휴식 시즌이잖아요. 연말 콘서트 말고는 그래도 쉬는 날이 꽤 많아요.”
“그래. 참, 용케 열쇠를 찾았네?”
“전에 철진이 형이 알려주셨어요.”
“슬러시 기계도 켜놓고 우리 문방구 사람 다 됐네.”
“하하… 그냥 혼자 뻘쭘하게 있기 심심해서요.”
우리 문방구 단골들은 모두 알고 있다. 평상의 오른쪽 발에 열쇠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오전에는 내가 오질 않으니 세 녀석은 당연히 문방구 문을 열고 임시 사장을 자처한다. 오락기는 오전에 내가 켜놓고 가기에 굳이 우주가 문방구 문을 열어두지 않아도 되지만 어떻게 배웠는지 슬러시 기계도 꺼내 시럽을 채워두고 방방에 잠겨 있던 자물쇠도 풀어 두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명예 문방구 사장이다.
“그런데 어디 가세요?”
“응? 아, 요 앞에 어르신들 밭에 가려고.”
문방구로 들어가자마자 편한 복장에 목장갑까지 챙겨나오는 모습에 우주가 오락을 하다 말고 물었다.
“저도 가도 될까요?”
“밭일 힘들 텐데 그냥 오락이나 하고 있지 왜?”
“어차피 다른 형들도 다 그쪽으로 오잖아요.”
같이 놀아야 즐겁다. 듀얼을 하기 위해 마을회관을 들락거리던 우주도 또래가 많은 우리 문방구에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미니카며 오락기에 푹 빠져 있었다. 딴에는 선배랍시고 훈수를 두는 세 녀석과 같이 노는 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굳이 같이 가겠다며 오락기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깐 기다려봐.”
나는 그런 우주를 위해 방으로 다시 들어가 장롱 한 구석에 가지런히 접혀 있는 몸빼바지와 꽃무늬 티를 꺼내왔다.
세 녀석이 가끔 산나물을 캐거나 물놀이를 할 때 입었던 옷들로 우리 문방구가 아니면 딱히 입을 기회가 없던지라 그냥 맡겨놓다시피 했었다. 어차피 상진이는 당분간 오지 못하니 상진이의 옷은 오늘 다른 주인을 만나도 괜찮을 듯싶었다.
“이게 뭐예요?”
“그 옷 입고 하면 너 힘들어서 한 시간도 못 해. 자, 얼른 갈아입고 와.”
“아무리 그래도…….”
“이거 맛들리면 다른 곳에서 구하지도 못해.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얼른 입고 와.”
기자도 없고 팬들도 없다.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는다 해서 놀림감으로 여길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잘 맞네. 자, 가자.”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던가? 아무리 몸빼바지에 꽃무늬 티를 입어도 얼굴이 잘생기니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나는 우주를 태우고 곧장 어르신들이 계신 밭으로 향했다.
밭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나와 구슬땀을 한창 흘리고 계셨다. 시골 어르신들의 기력은 보이는 것과는 달라서 어느 건장한 청년도 하루면 포기할 농사일을 매년 거르지 않고 하신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만다꼬 왔디야.”
“인자 다 해서 할 것도 없는디.”
속없는 말씀이다.
아직 밭에 자르지 못한 배추가 한가득이고 망에 담기지 못한 것들은 하얀 배를 뒤집고 눕혀져 있었다. 우리가 곧장 일손을 도와도 오늘 내에 끝내지 못할 양이었다.
“저기 가서 배추 담을 망 좀 가져와. 다 담으면 이장님 경운기에 쌓아두고.”
“네.”
시골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돕는다. 고사리 같은 손이 무슨 도움이 될까만은 아이들은 농사일을 도왔다는 사실이 짐짓 어른스럽게 여겨져 큰 자랑거리가 되곤 했다. 그래서 겉잎을 떼고 그물망에 배추를 가지런히 넣는 손동작은 금세 능숙해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주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밭일하다 몸살 오면 약도 안 들어.”
“이 정도는 괜찮아요.”
나는 의욕이 넘쳐 손이 바빠지는 우주의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밭일은 중노동이다.
온몸을 쓰기에 생각보다 힘들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울퉁불퉁한 밭에 무거운 작물을 들고 종일 씨름을 하는데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즐거운 추억이다. 누군가 허리를 부여잡고 걷는 이유를 묻는다면 어린 시절 우리가 그랬듯이 배추를 옮기다가 그랬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게 분명했다.
“우주야. 너 팔에 벌레.”
어설픈 손놀림으로 배추를 과하게 다듬어 거의 알배추를 만들고 있는 우주의 팔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애벌레가 붙어 있었다.
“벌레요? 으악!”
“야야, 그러면 몸속으로 들어가잖아!”
“하이고메, 허우대는 멀쩡해서 애벌레가 그리 무서우면 우짠댜? 누가 보면 비암이라도 본 줄 알것네! 깔깔깔!”
천상 서울 도시에서만 살아 애벌레가 팔을 기어다니는 장면에 적잖게 충격을 받은 우주가 허우적대며 밭을 뛰어다녔다.
어르신들에게도 오늘 우주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한동안 적적한 날 무심코 웃음을 짓게 해줄 추억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