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47화 (147/151)

#147. 신입사원(6)

“형, 겉잎은 한두 개만 떼면 돼요.”

“이렇게 말이므니까?”

“아뇨. 이렇게요.”

고작 세 시간 먼저 와서 일을 시작한 주제에 선배 노릇을 하는 우주의 행동과 그걸 또 진지하게 배우고 있는 두 녀석도 나와 우주 못지않게 웃긴 조합이다.

뒤늦게 합류한 철진이와 지환이 역시 내 카톡을 받고 우주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복장으로 밭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장 배추를 다듬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부쩍 짧아진 해가 산 위에 걸릴 시간이라 웃고 떠들 여유가 없었다.

특히 약을 치지 않은 배추는 찬바람이 들면 금방 시들어버린다. 수확 시기를 놓치면 1년 동안 키운 배추가 사료나 거름으로 쓰이는 참사를 겪지 않으려면 최대한 빠르게 수확해야 했다.

“얘들아, 슬슬 그만 따고 빨리 담아.”

“응? 오늘 저거 다 해야 하는 거 아냐?”

“해 지면 못 해. 괜히 따놓으면 시드니까 지금 딴 것까지만 얼른 담아.”

아직 수확이 덜된 밭은 많았다. 족히 1, 2주는 빠듯하게 일해야 마무리가 될 만한 넓이다. 양배추와 콜라비, 당근, 쪽파 등등.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르신들이 파종하실 때 서로 땅을 나누지 않고 종류별로 심으셨다는 것이다.

“인자 다들 가서 푹 쉬드라고. 내일 아침에 봐야.”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야밤이 되어서야 다시 문방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샤워는 형부터 할 거지? 빨리 하고 와. 우리도 찝찝해.”

사람이 넷인데 욕실은 하나다. 하나씩 들어간다면 샤워에만 족히 1시간이 넘게 걸린다. 특히 곱게 자란 녀석들은 남자의 샤워를 배우지 못한 것인지 한번 샤워기를 틀면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 샤워는 전투샤워로 한다.”

“전투샤워?”

“다들 신발이랑 상의 벗어.”

어차피 밤이라 잘 보이지도 않았고 땀에 절어 축축해진 상의를 벗는 데에는 모두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세 녀석은 졸지에 몸빼바지만 입고 마당에 멀뚱히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자, 물부터.”

“으앗! 차가워!”

마당에 둘둘 감겨 있던 고무호스로 녀석들에게 물을 뿌리는 게 먼저였다. 가을 공기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몸에 닿자 모두 비명을 질러댔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고통은 다소 감수를 해야 했다.

“자, 이제 이걸로 문질러.”

나는 어른 주먹만 한 비누를 철진이에게 던졌다.

“형, 이거 빨래비누이므니다! 어푸, 어푸!”

“하루 정도는 괜찮아. 다 문질렀으면 아까 벗었던 상의도 문질러.”

빨래와 샤워를 원터치에 끝내는 혁신적인 전투샤워는 군대에서 진지 공사를 갔을 때 협소한 샤워장에서 행해지던 기행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와 지금은 계절도 비슷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계속 몸을 씻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손동작이 빨라질 수밖에 없고 수백 명이 6개 남짓한 샤워기로 단시간에 빨래와 샤워를 마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녀석들의 빨래를 도맡아 하며 샤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내 입장에선 이 방법이 가장 최선이었다.

그렇게 샤워와 빨래는 5분 만에 끝났다.

문방구 간판 사이에 연결된 빨랫줄에는 급하게 빤 옷들이 개업식 만국기처럼 가을바람에 펄럭였고 녀석들은 이불을 둘둘 두른 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언 몸을 녹였다.

“배고프지?”

“얼어 죽겠어요.”

“야, 남들은 일부러 냉수마찰도 하는데 호들갑은. 조금만 기다려.”

“오늘 족발집도 쉬잖아. 라면이나 끓여 먹자.”

철진이의 말대로 가는 날이 장날인지 오늘 하필 유일하게 배달이 가능한 족발집이 쉬는 날이었다. 먹을 음식이라고는 오늘 뽑아온 배추가 전부.

하지만 배추면 충분하다.

“쌈장에 찍어 먹게요?”

“기다려봐.”

나는 커다란 대접에 부침개 반죽을 만들어 배춧잎을 담갔다.

배추전.

경상도에서 먹는 음식으로, 우리 마을은 전국팔도에서 모인 어르신들 덕분에 잔칫상에 심심치 않게 오르던 메뉴였다.

맛이야 그냥 심심하게 익은 배추맛이라지만 종일 밭일을 하고 온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시장이 반찬이다. 프라이팬 두 개로 구워내는 배추전은 채 그릇에 담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졌다.

“창고에 있는 버너도 꺼내므니까?”

“그래, 이걸로는 턱도 없겠다. 야, 우주도 좀 줘! 뒤에서 못 먹고 있잖아!”

노릇하게 익은 배추전과 슬러시 한 컵으로 익어가는 밤이었다.

* * *

‘이건 대박이야!’

차 안에서 대포알만 한 카메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여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보세요? 편집장님? 드디어 잡았어요!”

(뭘 잡아?)

“우주가 쉬는 날마다 가는 곳이요!”

(여자친구지?)

“아뇨! 일단 취재 끝나고 전화 드릴게요! 오늘 퇴근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야, 김민지! 뭔지는 알려 주…….)

평소 같으면 신입 기자 주제에 편집장과의 통화 도중에 먼저 전화를 끊는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다. 하지만 지금 이 특종 앞에서 그런 일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무려 인기가수 우주라고! 이번 취재만 성공하면 지긋지긋한 인터넷 커뮤니티 검색에서 졸업이야!’

연예부 기자라는 타이틀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힘들게 취재한 결과가 기삿거리도 되지 못할 시시콜콜한 내용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어쩌다 좋은 정보를 캐치한다 해도 이미 더 발 빠른 기자들이 단독보도로 한바탕 조회수를 빨아간 뒤였다.

명색이 기자라지만 최소한의 할당량은 채워야 했기에 결국 아무런 성과가 없으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럴싸한 글을 긁어와 어그로성 제목으로 바꿔 기사로 쓰기 일쑤였다.

‘기레기 수준.’

‘나도 기자 하겠네.’

‘기자가 아니라 그냥 고속도로 레카 아니냐?’

라는 댓글이 도배되다시피 달리는 것은 당연지사. 선배, 동료들 사이에도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져 이번 취재까지 수포로 돌아간다면 일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던 그녀였다.

“좋아. 됐어!”

조심스럽게 뒤를 미행한 그녀는 우주가 숙소로 들어가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고서야 다시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종일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쳐 매고 다니는 바람에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처음 특종다운 특종을 잡았다는 기쁨에 통증은 이빨 사이에 낀 고기처럼 이물감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요!”

사무실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카메라를 올려둔 그녀는 서둘러 인화기에 메모리카드를 꽂고 사진들을 뽑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인터넷 짤방이나 긁어 기사를 작성했을 그녀라 인화기를 사용하는 손은 더디기만 했다.

“너 이번에도 허탕이기만 해봐. 진짜 시말서감이야! 그리고 폰으로 찍으면 되지 카메라는 왜 들고 나간 거야? 너 그거 얼마짜린 줄 알아!”

인가도 없이 수천만 원짜리 촬영 장비를 들고 나간 맹랑한 신입 기자가 퇴근도 하지 말라 하고선 자정이 넘도록 자신을 기다리게 했으니 그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사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린트된 사진을 코앞까지 불쑥 내밀었다.

“보세요! 우주가 쉬는 날 시골 마을에서 이러고 있어요!”

“뭐? 봉사활동 아니야?”

“입고 있는 옷이랑 옆을 보라고요!”

“이거 삼정그룹 장남에 루데그룹 외동아들이 맞아? 아니, 그리고 우주는 왜 이런 옷을 입고 있어?”

연예부 편집장을 맡아 이 바닥에 제법 오래 있었다 자부하는 중년의 사내는 신출내기 기자가 찍어온 사진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일부러 컨셉 사진을 찍으라 해도 이렇게 부자연스러울 수 없을 것 같은 조합이다!’

가수들에게 쉬는 날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자신이 보기에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사진이었다.

가수들의 대부분은 활동 시즌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한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잠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자야 하며 그마저도 쪽잠에 지나지 않아 녹화 중에도 꾸벅꾸벅 졸거나 심지어 기절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꿀맛 같은 휴식기가 왔을 때 가수들은 백이면 백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일주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집에 틀어박혀 잠을 원 없이 잔다.

‘우주가 해외 활동을 앞두고 스케쥴을 조금 널널하게 조정했다지만 이건 말이 안 돼. 마치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니 사진을 찍어달라 광고를 하는 꼴이지 않은가? 게다가 재벌집 아들들이 왜 여기 같이 있는 거야?’

얼마나 찍어댔으면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마치 동영상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청년 네 명이 배추를 다듬고 망에 넣어 경운기에 차곡차곡 쌓는 모습이 어느 숙련된 농사꾼이나 다름없었다.

혹시나 삼정그룹이나 루데그룹에서 지역상생을 들먹이는 행사 사진이나 찍을 자리였나 싶어 아무리 사진을 넘겨봐도 촬영 장비나 스탭은 보이지 않았다.

“어때요? 특종 맞죠? 메인에 실릴 만하죠? 우주, 재벌 2세들과 은밀한 밀회! 그 장소가 시골 배추밭!”

“안 돼.”

“네? 왜요! 이만한 특종이 어디 있다고요!”

“너 몰라서 물어? 자체 엠바고 걸린 인물들이야.”

편집장조차 너무 어이없는 사진이라 잠시 잊고 있었다. 재벌 2세, 3세들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엠바고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그래도……!”

“차라리 우주랑 이… 누구야, 이 청년은? 가수 지망생인가? 얼굴은 괜찮은데?”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에서 만든 미니카 프로팀 구단주예요. 작년 미니카 대회 우승으로 유명했던.”

“아아, 그래. 이 두 명만 잘라서 미담 기사로 써.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거 잘못 나갔다간 우리 계열사까지 싹 다 광고 한 장 못 받고 문 닫을 수 있어.”

“편집장님!”

“단독 걸어줄 테니까 그렇게 내보내. 너도 공치는 건 싫잖아.”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일개 연예부 기자실에서 다루기엔 후폭풍이 너무나 큰 사진들이었으니.

그녀는 과하게 짧게 잘린 사진들을 대충 파일에 붙이고는 영혼 없는 얼굴로 타이핑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일생일대의 기회로 잡은 특종이 그저 그런 미담기사가 되어야 함이 아직 납득되질 않았지만, 편집장의 말대로 이번 취재도 아무 성과 없이 끝난다면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쉬지도 못하고 오늘 새벽부터 다시 커뮤니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출처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위 썰이라 칭하는 내용으로 쓰레기 같은 기사를 써야 했으니까.

더 이상 자신의 이름에 그런 것들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5분도 되지 않아 무미건조한 기사 하나를 완성했다.

「우주와 시골 문방구 주인의 색다른 인연. 농촌 봉사활동으로 이어져.

(사진)

인기가수 우주가 미국 진출을 앞두고 남양주 소재지의 한 농촌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우주는 비쥬얼 가수라는 선입견을 깨고 뛰어난 가창력을 무기로 오는 10월 미국 진출 전 짧은 휴식기를 가지는 중이다.

휴식기 중 인연이 되었던 미니카 프로팀 MM의 구단주와의 인연으로…….」

“그래, 이 정도면 되겠네.”

뒤에서 가만히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긴 뭐가 돼요. 누가 봐도 돈 받고 기사 써준 티가 팍팍 나잖아요.”

“소속사에서 한우세트라도 들어오면 너 줄게. 됐지? 난 간다. 정리하고 퇴근해.”

그렇게 흙과 구슬땀이 범벅된 얼굴로 웃으며 배추를 옮기는 두 잘생긴 남자의 사진이 담긴 기사가 늦은 새벽 한 언론사 포털사이트의 연예란에 단독이라는 인증마크와 함께 업로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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